86화
꿈같은 행복
영지에서 보내는 시간은 잔잔하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하늘을 올려다보기로 한 날에는 정원에 누워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 먹은 음식. 책에서 본 신기한 동물과 예쁜 식물.
사소한 주제가 전부였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 멀리 흘러간 구름의 색이 변했다. 노을빛에 물든 예쁜 빛깔이었다.
주황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분홍빛이 돌았고, 어떤 날에는 보랏빛으로, 또 다른 날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색깔이 어우러져 있었다. 노아는 꼭 한 가지 색으로 정하고 싶었는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골몰했지만 금세 웃어 버렸다.
“그냥 주황 분홍 구름으로 할래.”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내놓은 결정은 그처럼 싱거웠다.
노아는 해마다 철새들이 돌아온다는 호숫가로 놀러 가면 유독 신나했다. 부드러워 보인다며 새를 잡으려고 호수로 뛰어들려는 동생을 말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에 들어가는 대신 호숫가에 엎드려 누워 새를 관찰하기로 했다. 노아가 언제고 뛰어들 것만 같아 요한은 좀처럼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곁을 지켰다. 우와아, 노아가 천진한 감탄을 보일 때가 가장 두려웠다. 꼭 그러고 나서는 손을 쭉 뻗거나 벌떡 몸을 일으켰으니.
주의를 주며 지켜보던 요한은 노아에게 읽어 주던 책에서 본 새들이 보일 때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호숫가로 돌리고 말았다. 책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노아의 한 손이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가려는 새를 쫓아갔다.
요한은 물에 빠질 뻔한 노아를 끌어당기며 한숨지었다. 다시 단단히 주의를 주고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선을 돌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보였다.
모포를 펼쳐 둔 잔디밭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미소 짓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셨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그 행복을 끝낼 시간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요한은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든 창문을 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요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한구석에 놓아둔 가방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요한은 옷 사이에 숨겨 온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영지로 오기 전, 주치의를 찾아가 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건네줄 때 주치의는 심각한 얼굴로 당부했다. 아주 독한 것이니 꼭 정량을 지키라고, 이런 것에 의존해 잠을 청하는 습관을 들여서는 안 된다며 걱정을 표했다. 그러지 않겠다고, 요한은 웃는 얼굴로 약속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쓸 일이 없는 물건이니 어찌 되었든 약속을 지키는 셈이었다.
요한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유리병을 움켜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치의를 찾아갈 때만 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이제 와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오늘이 지나면 다 끝난다.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거다. 다시는.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망설일 시간은 없다. 이미 며칠간 행복을 누린 것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은 아니었다. 영지로 오면, 그러면 곧바로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지로 오는 길 내내 들은 어머니와 노아의 웃음소리가 좋았고, 소소하게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그저 좋았다. 그래서 계속 하루만, 하루만 더. 그렇게 바라다 보니 오늘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그만해요. 나 좀, 살려 줘.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요.’
행복해서 이 시간을 깨고 싶지 않을 때마다 요한은 지하실에서 본 어머니를 떠올렸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매일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동생을,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몸부림치던 어머니를.
창백한 달빛이 내려앉은 요한의 손이 유리병을 꽉 움켜쥐었다. 유리병 가득 채워 넣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 ❖ ❖
요한은 아직도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있는 노아를 데리러 갔다.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를 바라보고 있던 맑은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잘 준비를 마친 터라 잠옷을 입고 있는 노아는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이제 자러 가야지.”
“조금만 더 나비 구경하면 안 돼?”
노아는 조그만 손가락을 펼쳐 샛노란 나비를 가리켰다. 노아의 말처럼 작고 예쁜 나비를 보던 요한은 간신히 한쪽 입매를 끌어당겨 웃음을 그려 냈다. 어서 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
결국 요한은 쪼그려 앉은 노아 곁에 서서 나비가 날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 더, 나비가 오래도록 꽃잎에 앉아 있길. 잠시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필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비가 파르르 몸을 떨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노아는 아쉬운 듯 탄식하다 그의 두 손가락을 꼭 움켜잡으며 일어섰다. 번지기 시작하는 온기를 놓치기 싫어 요한은 조금 더 힘을 실어 손을 마주 잡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떨어진 꽃잎을 하나씩 다 밟으며 노아는 명랑한 목소리로 재잘댔다. 요한은 주의 깊게 동생의 말을 들어 주고 적절하게 대답도 해 주었다. 시선은 조금도 떼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겨 두어야 하니까.
“계속 여기 있고 싶다.”
노아가 조그맣게 속삭인 목소리에 요한은 불현듯 멈추어 섰다.
“왜?”
노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툭툭 걷어찼다.
“수도로 가면 형은 바쁘잖아. 방학 때까지는 자주 못 볼 거라 슬퍼서. 다시 전처럼 자주 집에 놀러 오면 안 돼?”
그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재미있어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수도로 가기 싫은 것이라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말을 하는 노아를 요한은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해.”
조그마한 손이 서툴게 그의 등을 감싸 토닥였다.
“그동안 편지 못 해서, 많이 놀아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
재빠르게 품에서 벗어난 노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많이 놀면 돼.”
노아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노아가 먼저 앞서가며 요한을 이끌었다. 저택으로 들어온 요한은 어머니께 뛰어가려는 노아의 몸을 돌려세웠다.
“우유 마시고 가자. 네가 좋아하는 따듯한 우유.”
“그거 마시면 양치 다시 해야 되잖아.”
“오늘은 괜찮아. 안 이를게.”
노아를 의자에 앉힌 뒤 요한은 우유 한 잔을 따듯하게 데워 왔다. 그를 보며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주머니에 숨긴 유리병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아픈 거 싫지?”
요한은 컵을 입가로 가져가는 노아의 손을 붙들며 물었다.
“당연하지! 아픈 게 제일 싫어.”
“……그래. 그거면 됐어.”
그만 놓아주자 노아는 호호 불어 우유를 마셨다. 오래 지나지 않아 똘망똘망하던 눈동자가 흐려지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하품을 한 노아의 고개가 꾸벅꾸벅 숙여지기 시작했다. 빈 컵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을 애써 외면한 요한은 잠이 든 노아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이제 어머니께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낮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사용인들이 별채로 가는 터라 저택 내부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머니의 침실 앞에서 멈추어 선 요한은 어떤 얼굴로 어머니를 보아야 할지 고민했다.
웃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과해 들어온 시린 달빛이 마치 눈물처럼 눈가에 고였다. 마침내 문을 열자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입술을 막은 손뿐만 아니라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은 손까지 피에 젖어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꿈 같았다. 지독한 악몽.
“어머니…….”
조심스럽게 불러 보자 어머니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손수건을 찾아 쥐는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기만 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우리 아가들. 조금만 더 놀다 오지.”
다시 그를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미소 짓는 얼굴만이 남아 있을 뿐.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는 어머니에게 요한은 떨리는 걸음을 천천히 내디뎠다.
침대가에 다가서자 어머니는 그의 뺨을 쓸어 주었다. 한순간도 지워지지 않는 미소가 요한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억지로 웃어 보았다.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든 노아를 어머니 곁에 누이는 순간에도 요한은 내내 어머니와 눈을 맞추었다.
“노아는 벌써 잠이 들었구나. 많이 뛰어다니더니 피곤했나 보네. 이제 노아도 많이 커서 안고 오기 힘들었을 텐데 무겁지는 않았어?”
깊어지는 침묵을 깨트린 어머니는 그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요한,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글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왜 저렇게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계신 걸까.
요한은 어머니의 옷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검은색 옷만 입고 계셨다는 걸. 왜 그랬어야만 했을지 이제야 알았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죄송해요.”
나오는 말은 고작 이것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아픈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항상 괜찮다고만 하셔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어 일부러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부정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뺨을 감싼 어머니의 손을 적신 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아프다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 것 같았지만 요한은 흐릿해진 시야가 만들어 낸 착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이제 아프지 않아도 돼요. 같이 자요.”
요한은 유리병을 꺼내 안에 담긴 걸 조금 삼켰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것이 이제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어머니께 건네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어요. 우리 셋이서요.”
노아 곁에 누우며 요한은 생긋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그들 곁에 몸을 누였다. 베개 옆에 놓은 유리병은 어느새 비워져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기 전 요한은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저택을 감쌌다.
너한테 너무 많은 짐을 주어 미안해. 미안해, 우리 아가.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꿈결처럼 멀게 느껴졌다.
행복하고 슬픈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