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4)화 (84/151)

84화
장미가 지는 계절

시야가 자꾸만 흐릿해져 요한은 눈을 감았다. 시중을 들던 하인들은 조금 물러나 먼저 주변을 정돈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하인의 손길까지 떠나가자 요한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이 보였다. 단추를 잠그던 손이 돌연히 멈춘 건 거울 속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알아보았을 때였다. 유독 색이 진해진 것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꼭 누군가를 닮은 듯해 요한은 거울을 등지고 섰다. 아버지의 잔상을 떨쳐 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심장 부근에서 멈춘 손을 타고 거센 박동 소리 전해졌다. 셔츠의 단추를 마저 잠그기 시작할 무렵에 집사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초대장은 제 선에서 적절하게 처리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기 시작한 기념으로 귀족들은 돌아가며 파티를 열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위급한 상황이라며 그를 다그쳤던 귀족들까지도 본분을 잊은 채 파티 분위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오렌티아 가문에서 세 번씩이나 초대장을 보내왔지만 이번에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로드니는 굳이 그의 손이 닿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세세하게 보고해 나갔다.

재킷을 두르는 것으로 준비를 끝낸 요한의 눈길이 며칠 새 근심이 깊어진 듯한 집사의 얼굴에 닿았다.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는 건 퀭하니 질린 눈만 보아도 알 수 있을 듯했다.

“다른 건?”

일부러 말을 돌려 주자 집사는 조금 시간을 끌다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오늘도 그분들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노바르 로슈만, 셀번 밀란, 케서린 로티, 그리고…… 카에덴 델피니움. 집사가 지칭하는 그 네 명은 끈질기게 편지를 보냈다. 요한은 그걸 리세트에게 보여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마님께 이대로 숨겨도 될까요?”

침묵으로 긍정을 표한 요한은 그만 드레스 룸을 벗어나려고 했다.

“크리프 후작께서도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좀 전의 이름들과 달리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람의 이름에 요한은 탄식 같은 한숨을 삼켰다. 잊으려고 했던 의문들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본 아트반 크리프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용서를 해 달라고 했지. 다 잘못했으니 이제는 그만 예전처럼 돌아가자고.

용서…….

하지만 만약, 네가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속인 거라면?

결코 달갑지 않은 의문이었다.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요한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집사에게 눈짓했다.

“임무를 수행하러 가기 전에 마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로드니는 심상치 않은 요한의 분위기를 적절히 살펴 가며 보고했다.

그래도 여지조차 주지 않은 다른 사람들보다 크리프 후작의 처지가 훨씬 나은 듯했다. 역시 오랜 세월을 보아 온 친구 사이라 그런 것이겠지.

“날짜를 잡아서 곧 편지를 보내겠다고 전해.”

요한은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서며 명을 내렸다. 부드럽게 출발한 마차에 점차 속력이 붙기 시작하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커져 갔다. 요한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에 두고 온 리세트가 마음에 걸렸다.

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리세트의 손목에 묶어 둔 건 현존하는 제어구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도망가지는 못하겠지. 설령 도망을 친다 하더라도 리세트가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걸 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겠지. 그가 곁에 없으면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주지시켜 두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할 터였다.

꼭 이런 방법밖에 없었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요한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이마를 짚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깥으로, 리세트가 있는 저택의 침실 쪽으로 향한 채였다.

길의 저편으로 저택의 모습이 멀어지자 그제야 하늘이 보였다. 비가 오려는지 회색빛의 비구름이 겹겹이 쌓인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보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요한은 살며시 창문을 밀었다. 휘몰아치듯 들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몰라보게 달라진 바람의 온도가 느껴졌다. 이제 정말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비가 내리면 여름도 끝이 나겠지.

이맘때쯤 내리는 비는 여름의 흔적을 전부 지운다. 정원에 핀 꽃들도 그 비에 쓸려 내려가 내년이 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리세트가 사랑하는 예쁜 꽃들이 다가오는 계절을 이기지 못하고 다 져 버리겠지.

불현듯 크리프 후작저의 유리온실이 떠올랐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느 계절이 와도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면 리세트가 기뻐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꽃이 지면 새롭게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옮겨 다시 온실을 가꾸어 놓으면 된다. 리세트는 그 아름다운 온실 안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보며 살아가게 되겠지.

그의 곁에서, 영원히.

돌아가는 즉시 건축가를 찾아보라고 해야겠다. 후작저의 온실을 설계한 노년의 건축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아야 했다. 낙원이라 평가받는 후작저의 온실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리세트는 작은 새들도 좋아했지. 후작저의 유리온실에만 들어가면 새의 둥지를 기웃거리느라 바빴다.

싱그러운 꽃과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채워진 온실을 제법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았다.

그 상상 속에 존재하는 리세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온실을 채운 꽃을 닮은 싱그러운 미소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웃는 모습이 예뻤다. 요즘 그에게 보여 주는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요한은 더욱 집요하게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가 죽으면 많이 슬퍼하겠지만 그걸 상쇄할 만한 행복을 선물하면 된다.

지금이야 오래되지 않았으니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겠지만 평생 그 고통을 견뎌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미움을 받더라도 리세트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다면 요한은 기꺼이 악역을 자처할 수 있었다.

모든 아픔이 씻겨 나간 뒤의 미래는 지독하게 감미로웠다.

마차가 멈추어 서자 요한이 그려 내던 세상의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어서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리세트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 ❖ ❖

셀번 밀란은 조금도 줄지 않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찻잔과는 달리 요한의 찻잔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 식어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자기 휴학 신청이라니.

맞은편에 앉은 요한을 살핀 눈길은 다시 손에 쥔 서류로 돌아왔다.

리세트의 이름이 적힌 그 서류를 유심히 살펴볼수록 펜을 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명만 하고 돌려주면 되는데 그처럼 간단한 일을 몇 분째 붙잡고 있었다. 리세트의 필체가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결국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리세트가 혹시 많이 아픈 건가요?”

“선생님께서 신경을 써 주실 정도로 심각하지 않습니다. 임신 중인데 무리하게 학업에 집중하는 듯해 제가 먼저 조금 쉬어 가자고 한 겁니다.”

“직접 오지 못한 걸 보면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델피니움 공께서 직접 오신 건 그렇다 쳐도, 신청서까지 쓰지 못할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셀번 밀란은 리세트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이 부분, 리세트가 쓴 게 아니잖아요. 공께서 쓰신 거 아닌가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 보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표정이 없는 얼굴이라 날카로운 빛을 띠는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제가 쓴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텐데요.”

날을 세우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목소리였지만 표정과 움직임은 그러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은 요한은 다시 서류를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제 아내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세트가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라도 답장을 써 보낼 아이이지 않나.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셀번 밀란은 피곤해 보이는 요한을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펜을 들었다. 서명을 마친 서류를 돌려주자 요한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요한을 불러 세웠다.

“너는 괜찮은 거니?”

이미 다 커 버린 아이였다. 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요한은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요한은 어렸을 적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던 그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렴.”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섰다.

셀번 밀란도 케서린 로티와 똑같은 걸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리세트의 안부를, 그러고 나서는 의심 섞인 눈길을 보냈다. 그 둘 모두 마지막에는 그를 향해 괜찮으냐고 물었다.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 그러하다고 답했다.

거짓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던 제 모습이 마치 꼭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아버지도 늘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답했으니까.

치유 계열의 건물을 나가려던 요한은 불현듯 몸을 돌려 세웠다.

충동적으로 마음을 바꾸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어린 리세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강의실로 무작정 걸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요한이 그랬을 리 없잖아!’

어디선가 리세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가족이 눈앞에서 죽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빨리 사과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맹세하라고!’

그 목소리가 끊긴 지점에서 요한의 걸음도 멈추었다.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빈 강의실을 바라보았다. 그날에도 오늘처럼 숨을 죽이며 뒷걸음질 쳤다.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녀석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주먹을 휘두르는 리세트를 외면하고 도망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달아났다.

그 소문이 사실이니까.

그걸 알게 되면 리세트가 다시는 그를 보러 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투둑,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리세트가 사랑하는, 이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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