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네가 함께 있는 지옥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불덩어리를 억지로 집어삼킨 듯했다.
헉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데 입술 새로 빠져나오는 건 고작해야 쇳소리 같은 신음뿐이었다. 침실을 가득 채운 요한의 마력이 천천히 리세트의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은빛 머리카락도, 초봄의 여린 잎사귀를 닮은 눈동자도 전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요한은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제 색으로 더럽혀지는 리세트의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렇게 아파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억지로 기절이라도 시킬 생각이었지만, 계속해서 그를 설득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리세트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헛된 희망의 싹을 자를 작정으로 시작했다. 무어라도 하려는 생각을 다시는 품을 수 없게 몰아갔다.
“아……!”
참지 못한 신음을 흘린 리세트는 까무룩 기절할 것만 같아 눈을 부릅뜨며 이 시간을 견뎠다. 콧날을 타고 흐르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그런 예감이 뇌리에 스쳤다.
어깨를 감싸듯 붙잡고 있던 요한의 손이 쇄골 언저리를 강하게 압박하자 조금 전까지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기이한 열감이 목을 조르듯이 휘감고 사라졌다. 요한의 손도 떠나갔다.
요한은 천천히 리세트의 몸에서 내려왔다.
몸을 옭아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났지만 리세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주변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질 뿐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데…… 요한 너는, 언제까지 나를 속일 생각이었어?”
몇 시간 동안 비명을 지른 것처럼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요한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네가 나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아플 일은 없었겠지. 그 애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최소한의 마력만, 네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해서 마력을 줄 수 있었으니까.”
요한은 축 늘어진 리세트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주먹 쥔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지만 그것을 인지할 여력은 없었다.
“이 정도의 아픔만 견디면 된다는 거지?”
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태연하게 반문하는 리세트가 그의 정신을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 정도면 괜찮아. 언젠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성공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때까지만 견디면 돼.”
“성공하지 못하면?”
“만약 그렇다 해도, 우리 아기 절대 너한테 뺏기지 않을 거야.”
“대체, 너는…….”
요한은 아직도 미련하게 부질없는 희망을 붙잡고 있는 리세트가 미웠다. 너무나도 리세트다운 말인데, 그건 결국 요한의 결심을 견고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리세트 너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요한은 더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다 들었다고 했지?”
평생 미움받을 거라는 걸 알지만 한번 시작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손으로 리세트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들었으니까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나는…….”
“그만해. 더 이상 말하지 마.”
다급하게 그의 말을 자르는 리세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 아기가 다 듣는단 말이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애는 죽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붙잡은 요한은 잠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앙상한 손목 위로 차가운 빛이 내려앉았다.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는 사람답지 않게 리세트의 손목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기억보다도 훨씬 야위어 있었다.
“하지 마, 요한.”
애원하듯 만류하는 목소리도 제어구를 잡아 쥐는 요한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싫어.”
“…….”
“싫다고 말했잖아!”
요한은 리세트와 시선을 맞춘 채로 가는 손목에 구속 제어구를 채웠다. 만에 하나라도 도망갈 생각 따위 품을 수 없게, 몸과 마력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리세트를 끝없는 절망에 빠트리는 일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 절망 속에 그는 이미 묻혀 있었으므로.
함께할 수 있어 차라리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옥이라 해도 리세트가 있으니까. 지옥에서, 함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게 뭔지, 어떤 의미인지 너도 알고 있잖아.”
소리칠 기운은 고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리세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래도 상관없어.”
요한은 리세트의 손목에 채워진 구속 제어구의 다른 한쪽을 제 손목에 채웠다. 한 줄로 연결된 제어구가 두 사람의 몸과 마력을 묶은 셈이었다.
“요한, 너…….”
요한은 제어구가 채워진 손목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것에 함께 묶인 리세트의 손목은 저항 없이 딸려 올라갔다.
“이렇게 같이 있으면 돼.”
리세트는 멍하니 요한을,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고 있는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리세트가 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해?”
“같이 있자. 계속.”
밤이 깊어진 만큼 요한의 목소리도 나직해졌다. 언뜻 잠긴 듯도 하였지만 그런 걸 알아챌 여력 같은 건 리세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리세트는 가물거리던 의식을 결국 놓아 버렸다.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밤의 기억이 까맣게 물들었다.
❖ ❖ ❖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아침이 밝아 오면 함께 눈을 뜨는 시간이 흘러갔다.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첫날에는 리세트 혼자 말을 많이 했다. 대부분 부탁이었고, 끝에는 부탁을 빙자한 협박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후로는 요한이 주도권을 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의 마력을 매일같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리세트는 기운이 없어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네가 선택해.’
요한은 전적으로 리세트에게 선택권을 주었지만 리세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기절한 채로 마력을 받아들이든지, 견디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더니 후자를 골랐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걸 부탁이라고 했다. 간절하게, 애원하듯이 그의 두 손을 모아 붙잡은 손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리세트가 원한 건 릴프랑 약초였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것에 목숨이라도 걸었는지 애타게 찾았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일갈했지만 그래도 리세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이 원하는 걸 얻어 냈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약초를 뿌리째 뜯어 먹었다. 입술이 녹색 물이 들 정도로 쉼 없이 씹어 댔다.
어떻게든 아기를 살리려고 하는 리세트를 볼 때마다 요한은 기억 속에 웅크린 어머니의 모습을 드문드문 꺼내 보곤 했다. 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그 악몽은 현재로 되살아났다.
리세트는 맨정신으로 그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혈관이 비쳐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열이 번진 듯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헉헉거리며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을 한순간도 피하지 않는 그 대단한 집념이 이제는 정말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포기할 줄 알았다. 울면서 그만하라고 할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건데…….
“오늘 아카데미에 다녀올 거야.”
리세트의 정신이 한계까지 내몰린 듯해 요한은 천천히 마력의 양을 조절하며 말했다.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빛이 꺼져 가던 리세트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빛났다.
“휴학 신청서 제출하고 올게.”
말을 하고 보니 그제야 시간 개념이 재정립되는 듯했다.
벌써 방학 학기가 끝났다는 걸 깨닫자 일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아이가 받아들이는 마력의 양을 계산해 보면 대략 반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한 듯 보였다.
이 짓을, 리세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반년씩이나 더 보아야 한다니.
무력감이 온몸을 관통하는 듯해 허탈해졌다. 리세트가 그 시간을 꿋꿋하게 견디리라는 걸 알고 있어 더욱 그러했다.
침대 주변으로 퍼트려 놓은 마력의 양이 점차 줄어들었다.
마력의 빛깔이 옅어지자 리세트의 모습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델피니움의 색채가 사라진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기억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만 손을 거둔 요한은 적당한 온도로 맞추어진 물에 담가 놓은 수건을 꺼내 비틀었다. 대야의 수면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침실의 숨 막히는 정적을 지워 주었다.
리세트에게 돌아가기 전, 그는 풀어놓은 구속 제어구를 다시 제 손목에 채우며 침대로 올라왔다.
리세트 곁에 앉아 이불을 짚듯 손을 대자 축축한 물기가 손바닥 가득 느껴졌다.
그 작은 몸에서 쏟아 낼 것이 이처럼 많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땀이 흐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요한은 우선 이마와 뺨을 닦아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콧날을 타고 흘러 움푹한 쇄골을 지나 더 아래로 향해 갔다.
차마 배를 만져 볼 수는 없어 요한은 시선을 돌리며 맥없이 늘어진 허벅지를 꼼꼼하게 닦았다.
“배가…… 조금 아픈 것 같아.”
기운 없는 목소리에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차가운 것 같아.”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지금 리세트의 몸은 불덩어리와 다름이 없었으니.
“요한…….”
다시 수건을 물속에 담근 요한은 대꾸하지 않고 물기를 짜낸 뒤 몸을 닦아 나갔다. 다행히 금방 포기를 했는지 리세트는 더 이상 입술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외면하듯 요한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다정했다.
잠이 들었는지 리세트의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조금 느릿하게 변했다. 비로소 시선을 들어 올린 요한의 입술 새로 안도감에 찬 한숨이 나직이 터져 나왔다.
요한은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 준 뒤 그만 침대 밑으로 발을 디뎠다.
찰그랑, 본래 한쌍인 구속 제어구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리세트가 참고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이 저절로 튀어 오를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꼭 머릿속에서는 찰그랑찰그랑, 소름이 끼치는 금속의 소리로 채워지곤 했다.
요한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제 손목에 자리한 제어구를 풀어냈다.
침대 기둥에 단단히 그것을 묶어 두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한 번 더 확인했다. 요한은 기절하듯 잠든 리세트의 뺨에 입 맞추었다.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