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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2)화 (82/151)

82화
보고 싶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요한의 눈길이 창문으로 향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빛이 마치 꼭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듯 보였다.

몸에 걸친 얇은 가운은 가벼웠다. 허리를 감싼 끈조차도 느슨하게 풀어 두었다. 머릿속까지 옅은 물안개가 낀 듯 텅 비워졌다. 그러니 마땅히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온몸이 밧줄에 칭칭 감긴 것처럼 갑갑하고 숨통이 조이는 것만 같았다.

요한은 손에 쥐고만 있던 상자의 모서리를 얼마간 문지르다 천천히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마력 구속 제어구가 담겨 있었다. 이것의 용도를 모르지 않았고, 언제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듯 요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상자를 닫는 손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오늘은 꼭 리세트를 만나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었다. 이 순간에도 리세트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그의 마력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억지로 기절을 시켜 마력을 주입해 보았지만 리세트는 그 상태로도 괴로워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하던 그날, 지하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숨이 멎을 것처럼 입술이 바싹 말랐다.

리세트를 설득할 방법을 고심해 보았지만 결국 어느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순순히 들어줄 리 없으니까. 지금껏 그를 속이고 버텨 온 걸 보면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터였다.

요한은 떨리는 숨을 뱉어 내며 어서 하늘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하늘의 색깔이 변하고 구름마저 까맣게 변했을 무렵이 다 되어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열쇠를 챙겨 넣은 가운의 주머니가 마치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는 양 무겁게 느껴졌다. 문을 열기 전, 요한은 잠시 창문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내려앉은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다. 드문드문 불을 붙여 놓은 양초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 뿐, 복도는 이미 잠에 빠진 듯 조용했다.

그의 침실 앞을 지키던 하녀들에게 물러가라 눈짓하자 그녀들은 당황스러운 듯이 시선을 주고받다가 물러났다.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계단 밑으로 사라져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도 요한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문이 굳게 닫혀 있었으니까,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그런 상황을 대비해 창문을 열 열쇠는 이미 챙겼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리세트가 머물고 있는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문 앞까지 당도한 요한의 손은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매일 밤, 닫힌 방문 앞을 서성거리다 노크를 하려고 뻗어 보았지만 끝내 거두어들여야 했던 손이었다. 발코니에 서서 차가운 창문을 하염없이 매만지던 그 손에 창백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듯 상자를 쥔 손마저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문손잡이를 돌리자 서서히 틈이 벌어졌다.

오늘은 리세트가 문을 잠그지 않았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깜빡하고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별것 아닌 일에도 간절하게 매달려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경직되어 있던 입매가 조금 풀어졌다. 기쁜 마음도 잠시. 부숴 버릴 듯이 틀어쥐고 온 상자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띠었다.

리세트는 잠들어 있었다. 문 쪽을 향해 돌아누운 상태라 얼굴이 바로 보였다. 복도보다는 비교적 불을 많이 밝혀 두었지만 리세트의 얼굴도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아내를 앞에 두고도 요한은 한 걸음도 채 뗄 수가 없었다. 망설임이 커질수록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리세트가 잠결에 작게 뒤척이기 시작하자 요한은 저절로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얼마간 이불에 뺨을 비비던 리세트는 이제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머리카락이 야윈 어깨를 타고 침대로 흘러내렸다.

보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한은 어느새 침대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전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두 눈 가득 리세트를 담은 채로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협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으며 요한은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가 리세트 곁에 몸을 누였다. 가까워져 갈수록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포도와 초콜릿 냄새. 어렵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즘에는 리세트가 늘 묻히고 다니는 것이니.

그가 몸을 누이는 순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침대가 흔들린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리세트가 갑작스럽게 돌아누웠다. 눈은 여전히 꼭 감긴 채로,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색색거리는 숨결이 흘러나왔다.

요한은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온기를 찾듯 가까이 다가오던 리세트가 돌연 멈추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주어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던 요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뺨에 손끝이 닿은 것뿐인 작은 접촉에도 충일감이 느껴졌다. 불안에 떨던 마음이 한순간 녹아 버리는 듯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달콤해서 더욱 절망적인 바람을 되뇌는 사이에 리세트가 스르르 눈을 떴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고 리세트는 몽롱한 눈을 끔뻑이며 웃었다. 꿈만 같았다.

“안녕, 요한.”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안녕, 리세트.”

망설이다 인사를 돌려주자 리세트가 싱긋 미소 지어 주었다.

꿈인 줄 착각하고 있구나.

요한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웃어 주는 것일 테니.

“보고 싶었어. 너무 많이.”

느릿느릿 속삭이듯 말해 주는 목소리에 요한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나도.”

조금 더 그럴듯한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목이 메어 와 간신히 그 한 마디만 전했다. 리세트가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고 요한은 조심스럽게 품에 당겨 안았다.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든 리세트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꿈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진심이겠지.

요한은 끊임없이 되새기고 또 웃음 짓다가 눈을 감았다.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리세트를 눈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협탁에 올려놓은 상자로 신경이 쏠렸다. 등을 감싸고 있는 리세트의 팔을 살며시 잡아 내린 요한은 가는 손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리세트가 반짝 눈을 떴다.

방금 전과는 다른 눈이라는 걸 안다. 현실감을 되찾았는지 리세트의 눈동자에서는 아까의 웃음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

리세트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요한이 먼저 와락 끌어안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요한.”

아직도 조금은 잠겨 있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할 말이 있어.”

꿈에서 깨어나면 당연히 밀어 낼 줄 알았는데 리세트는 오히려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요한은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노바르가 나를 도와주고 있었어.”

달갑지 않은 이름이 화두에 올랐다.

“내 마력의 흐름이 뒤틀린 걸 제일 먼저 알아보고, 그걸 해결할 방법을 함께 찾고 있었어. 릴프랑 약초를 먹으면서 많이 좋아졌는데, 이제는 델피니움 가문의 마력이 내 마력에 많이 섞여 있대.”

리세트는 며칠 동안 거울 앞에서 연습해 본 말을 차분하게 전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요한 때문에 문득문득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도중에 멈추지는 않았다.

“델피니움 연구원께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셨어.”

카에덴 델피니움 이야기를 꺼낼 때는 조금 긴장이 되어 요한의 등을 감싸고 있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실렸다.

“두 사람이 도와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너도 있잖아. 우리 넷이…….”

“어떤 일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리세트의 말을 잘랐다.

“내가 말했지. 네가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오랜만에 보는 요한과 싸우고 싶지는 않아 리세트는 조곤조곤 반박했다. 여전히 속에 감추어 둔 말을 꺼낼 생각은 없는 듯 요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얼마간 기다리다 리세트가 다시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네가 죽어.”

“선대 공작 부인들은…….”

고개를 들어 마주한 요한의 얼굴이 너무도 슬퍼 보여 리세트의 입술이 저절로 다물렸다. 말을 제대로 끝맺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는다고 당장 죽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시달리게 될 거야.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그럼…… 다행이네. 죽지는 않는다는 거잖아.”

일부러 밝게 이야기해 보아도 요한의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 거야.”

“요한 너는, 내가 아픈 게 싫은 거지? 그래서 많이 걱정하는 거고, 우리 아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잖아. 하지만 이미 선례가 있어. 선대 공작 부인들께서도 후계자를 낳았지만 사교 모임에 잘 참석하시고, 가문도 다스려 오셨잖아. 나도 할 수 있어.”

“아니. 못 해.”

리세트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하는 요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무거워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한 번 더 괜찮다고, 나를 좀 믿고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말을 전하려고 했을 때였다.

“내가 괜찮지 않아.”

몸을 일으킨 요한은 협탁에 놓아 둔 물건을 가져왔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리세트를 향한 채였다.

“나는…… 그걸 옆에서 보고 견딜 자신이 없어.”

목소리는 떨리고 있는데 상자를 여는 동작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한이 꺼내 드는 물건을 본 리세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력 구속 제어구잖아. 그걸 왜, 가져왔어?”

“…….”

“요한!”

황급히 침대를 벗어나려고 상체를 세우는 리세트의 어깨를 요한이 내리눌렀다. 발버둥 쳐 보았지만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을 찢어발길 것처럼 달려들었다.

“리세트.”

리세트의 머리 옆에 내던지듯 제어구를 내려놓은 요한은 버둥거리는 몸을 타고 올랐다.

“견뎌.”

무정한 말을 뱉는 사람답지 않게 요한의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느껴야 할 고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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