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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1)화 (81/151)

81화
돌이킬 수 없는

리세트는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을 무렵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처음에는 그저 멍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생각이라는 걸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김없이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생각을 비우고 계속 비워 냈다.

창문을 등지고 있던 리세트는 스르르 몸을 돌려 누웠다. 새삼스레 침대가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날 길 한복판에 버려진 것처럼 추웠다. 이불을 아랫입술까지 끌어 올려 덮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커튼 밑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투명했다. 빛을 쬐면 조금이나마 이 추위가 가실 듯해 리세트는 급하게 일어났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정원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싱그러운 꽃향기가 실려 왔지만 리세트는 굳이 그것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 요한의 침실에도 꽃은 무척이나 많았다. 꽃향기에 질식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소맷단을 장식한 섬세한 레이스가 바람결을 타고 흔들렸다.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언제 교복을 갈아입었나 생각해 보다가 다시, 리세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리세트는 한참 동안 햇빛을 쬐다 천천히 돌아섰다. 창문은 그대로 열어 두었다. 침실을 가득 채운 꽃향기가 조금이나마 빠져나갈 수 있게.

문밖으로 나가 보려고 했지만 발걸음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리세트는 조금 머뭇거리다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기를 한참, 의식하지 못한 새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눈이 굉장히 뻐근했다. 눈두덩을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떠 보았지만 특별한 효험은 없었다.

부어오른 눈가를 살며시 쓸어 보던 리세트는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씻어 내자 눈에 몰린 열기가 차츰 옅어졌다. 손이 시릴 정도로 오랫동안 씻고, 다시 또 씻어 냈다.

물기를 닦지도 않은 채로 침실로 돌아온 리세트의 눈에 띈 건 케이크였다. 어제 메이와 함께 사 온 그 케이크.

하지만 그건 다 망가졌는데…….

무의식적으로 다리가 움직였다. 리세트는 테이블 앞에 서서 가만히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다 망가져 버린 케이크가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지그시 바라만 보았지만 케이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망가지지도 않고 어느 한 곳 부서지지 않은 채로.

리세트는 잡념을 털어 내듯 고개를 저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힘없이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구나.

포크를 쥐기까지 자연스럽게 동작이 이어졌지만 딱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포크를 든 손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뻐근한 눈두덩에 다시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리세트는 황급히 케이크를 푹 펐다. 자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포크로 찌르고, 크게 퍼서 꼭꼭 씹어 먹었다.

오물오물, 말캉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파도에 휩쓸리듯 흔들리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리세트는 의무적으로 케이크를 계속 먹었다. 잠시라도 입이 쉬면 소리가 사라졌고, 그러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평소라면 둘이 먹어도 남았을 케이크가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서서히 느려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리세트는 남은 케이크를 아주 조그맣게 조각냈다. 평소에 먹는 크기보다 훨씬 작게, 입에 들어가는 느낌조차 안 날 정도로 작게 부수어 먹었다.

의식하지 않고 끝없이 먹고, 속이 안 좋으면 입 안에 집어넣은 것만 한참을 씹었다. 토기가 올라왔지만 그조차도 무시하려고 하니 차츰 괜찮아졌다.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리세트는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먹고 기운을 차려야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그것만 생각하면서 리세트는 열심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기. 마력의 이상 징후. 그 외에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게 쉬지 않고 먹고 또 그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분명히 맛있는 케이크인데. 어떤 맛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조각까지 입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건 조금 더 늦게 깨달았다.

❖ ❖ ❖

흐릿했던 초점이 또렷하게 잡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요한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침대 위로 툭 내려놓았다. 잡히지 않는 온기를 찾듯 옆자리를 쓸어 보았지만 무의미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요한은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매일 아침을 리세트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지하실의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한 지 벌써 수일째였다. 그만큼이나 리세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시간도 쌓여 갔다. 목소리도 스치듯이 들은 게 전부였다. 그것조차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닌 다른 하녀들을 부를 때, 침실 앞을 서성거리다 우연히 들었다.

리세트가 잠이 들었을 깊은 밤에 조용히 찾아갈까 생각도 했다. 실행에 옮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커튼도 단단히 쳐 놓아 그림자조차 닿을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건 리세트가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 먹는다는 것 정도. 침실에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지만 식사를 챙겨 주는 하녀들에게는 선선히 문을 열어 주었다.

요한은 리세트의 침실에서, 리세트는 요한의 침실에서 생활했다.

그는 집무실이나 서재로 가지 않고 모든 업무를 이곳에서 처리했다. 그러다 보면 하녀들의 목소리에 섞인 리세트의 목소리를 먼발치에서나마 들을 수 있었으니까.

“저, 주인님……?”

요한은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사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침대 근처에 서 있었다.

“식사는?”

굳이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아도 로드니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마님께서는 이미 식사를 끝내셔서 방금 후식을 가져다드렸습니다.”

마음이 놓이는 대답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던 이불을 그만 놓아주었다.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잠기운은 완전히 달아난 탓에 그조차 쉽지 않았다.

“주인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물러간 줄 알았는데 로드니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해 보라는 듯 눈짓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는 언제 준비해 드릴까요?”

“괜찮아.”

“하지만…….”

“생각 없어.”

말을 더 붙여 보려던 로드니는 잠시 물러나는 걸 택했다. 피로가 몰려온 듯한 얼굴이 보여 더는 식사를 하자고 강권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주인님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을 시작하시겠지.

고작 과일 몇 조각.

공작이 그나마 조금씩 챙겨 먹던 것도 이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까지 싸우셨는지 궁금했지만 인내심을 총동원해 참아 냈다. 그러던 중 공작은 어제 이 일의 원인을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내 아이였어.’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도무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놀라움과 경악도 아닌 전혀 다른 것. 이명이 들린 건 아닌지 제 귀까지 잡아당겨 보고 싶었지만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님께서 다 들으셨단다. 지하실을 개방하는 걸 의논하던 중 그들이 나눈 대화를 모조리, 전부 다 듣고 공작저를 떠나신 것이라고. 자신도 이렇듯 막막한데 공작의 마음은 어떠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 후로 공작은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이따금 업무 사항에 관한 걸 의논하고 적절한 명령을 내리고, 그러다 마님의 식사를 챙길 뿐 어느 것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일과를 끝마친 뒤에는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마님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건가.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드는 걱정도 차마 내비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작이 그보다 평온해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마님께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으니 저토록 가만히 있는 것일 테니.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켰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의문까지 다 누를 수는 없었다.

마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저렇게 있을 수 있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도 쓰지 않은 채로 지켜보는 게 더 이상했다.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할 얼굴을 하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일부러 물잔 옆에 과일을 깎아 두었지만 그는 간단하게 입술만 축인 후 그만 잔을 내려놓았다.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침묵을 깨트린 쪽은 공작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로드니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방금, 무슨 말씀을…….”

도무지 믿기지 않아 로드니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공작은 여전히 뜻 모를 얼굴로 담담하게 명을 내렸다.

“마력 구속 제어구를 가져와.”

다시 들어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 로드니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마력 구속 제어구라니.

마법사에게 마력은 삶의 이유이자 원천 그 자체였다. 그것을 억지로 빼앗을 때는 단 두 가지의 경우뿐. 죄를 지었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힘을 잘 다루지 못해 불순분자로 낙인이 찍힌 경우뿐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여지없이 제어구를 채웠지만 후자의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다 성장했다 하더라도 제 자식에게 그런 걸 직접 가져다주는 부모는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게 영지로 보내거나 철저하게 진실을 숨기는 편을 택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을 내린 사람답지 않게 공작은 무감한 얼굴로 협탁 위에 놓인 화병에서 꽃 한 송이를 빼 들었다.

그래. 설마, 아니겠지.

부정해 보았지만 사실 로드니는 알고 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러했다. 공작이 사용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마님께 그것을 쓸 생각이시겠지. 미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주인님,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마님께 제어구를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까.”

한사코 만류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님께서 결코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협박처럼 말해 보아도 결국 제자리. 어느 것도 공작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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