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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80)화 (80/151)

80화
너를 떠난 이유

고요와 평화를 찾는 듯 보였던 공작저의 2층에 번잡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차마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을 수 없었던 사용인들은 계단 근처에서 모여 있었다.

“두 분이 집무실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지?”

“족히 세 시간은 지난 듯한데.”

“대체 뭘 하시기에 아직까지 안 나오셔? 심지어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싸우시는 거라면 미친 척하고 달려 들어가 말리기라도 할 텐데 말이야.”

염려스러워하는 사용인들 틈에는 메이도 섞여 있었다. 바짝 자른 손톱 끝을 매만지며 메이는 초조한 눈으로 시계를 살폈다.

엉망이 된 침실을 처음 목격했을 때보다 지금의 공포가 더욱 컸다. 집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시계 초침은 야속하게 계속 움직였고, 집무실의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마님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주인님의 목소리라도 들린다면 이처럼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텐데.

이대로 하염없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있을까?

의문을 곱씹던 메이가 입술을 꾹 깨물며 발걸음을 내딛던 찰나에 계단을 올라오는 방정맞은 소리가 울렸다.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경쾌하고 쾌활한 콧노래 소리에 사용인들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한눈에 집무실을 살피기 위해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사용인들은 일제히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때, 최고지?”

자랑스럽게 외친 하녀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못 살 뻔했지 뭐야. 하나 남았더라고.”

“쉿! 조용!”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주의를 준 사용인들은 검지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퍽퍽 내리눌렀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아직도?”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이곳에서 이 소리가 들려올 곳은 오직 한 곳, 공작의 집무실뿐이었다.

들어갈 때와 똑같이 마님을 품에 안은 채로 복도로 나선 공작의 눈길이 단번에 그들을 향했다. 흠칫 놀란 사용인들은 엉거주춤 발을 움직여 공작에게 다가갔다.

“메이 하핀.”

공작이 찾는 그 이름의 주인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왔다.

“케이크.”

전혀 뜻밖의 단어가 흘러나온 탓에 메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소란을 벌이고서 갑자기 케이크라니.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을까!

“리세트가 사 온 그 케이크. 똑같은 것으로, 지금 바로 구해 와.”

마님께 직접 전해 드리며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던 메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얼른 감추고서 한 하녀의 등을 쿡 찔렀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놀란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케, 케이크는 제가…….”

“다행히 케이크를 구해 왔습니다.”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대신해 메이가 상자를 건네받았다. 짧은 턱짓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은 공작은 그만 몸을 돌려 세웠다.

따라오라는 말씀 하나 하기가 참 어려우신 모양이구나.

메이는 넓은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하여간 등이 참 쓸데없이 넓으셔. 우리 마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방금까지는 사용인들 틈에 끼어 있어서, 지금은 공작의 등에 가려져서 메이는 리세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언뜻 보이는 은발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마님의 침실 앞에 멈추어 선 공작의 옆얼굴을 본 탓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자유로운 손을 들어 눈가를 벅벅 문지른 메이는 똑똑히 보았다.

공작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짓씹은 듯한 입술,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이는 눈동자. 이런 공작의 모습을 예전에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마님이 말없이 공작저를 떠나셨을 때. 그날에도 꼭 이런 눈을 하고 계셨다.

지옥 같은 반년 동안 질리도록 본,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작의 모습이었다.

❖ ❖ ❖

푹신한 이불이 온몸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눈을 뜬 리세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변을 살폈다.

사용하는 일이 드문 요한의 침실. 오늘, 우리가 파티를 하기로 한 그곳.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

리세트는 화려하게 단장을 마친 침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금빛 촛불이 일렁이는 것만 제외하면 그다지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기이한 느낌에 휩싸였다. 리세트는 곧 그 이유를 찾아냈다.

꿈이었을까.

요한과 대화를 나누고자 했는데, 그는 리세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억지로 끌고 나갔다. 품에 안은 채로 집무실로 갔고, 처음 보는 문이 생겨났고, 그리고 계단을…….

드문드문 조각난 기억을 이어 맞추려고 했지만 누군가 일부러 헝클어트린 것처럼 기억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깨질 것처럼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리세트의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케이크가 흐릿하게 보였다. 메이와 함께 오늘을 위해 준비한 그 케이크였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모호했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졌다.

요한의 침실. 놀라서 달려 나온 사용인들. 요한의 앞을 막아선 메이. 집무실. 천천히 맞추어지던 기억의 끝은 계단을 지나 지하실로 이어졌다. 비로소 온전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하실…….”

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리세트는 조급한 손길로 배를 감싸 안았다.

요한이 아기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준 안도감이 전신에 퍼지자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나날이 무거워지던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져 있었다. 신경이 곤두설 만큼 머리를 울리던 두통도, 비워 낼 것도 없는 속이 쥐어짜지는 느낌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치밀던 헛구역질까지도 전부 사라졌다.

몸이 예전으로 돌아간 듯 가뿐해 마땅히 기뻐해야 하지만 리세트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온몸을 찢을 듯 덤벼들던 마력이, 소름이 절로 돋을 정도로 끔찍했던 그 감각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던 느낌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지금은 너무나 멀쩡했다. 오히려 임신을 하기 전보다도 더 건강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깊은 생각에 잠겨 갈 무렵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리세트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요한의 목소리라는 걸.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누르듯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인 리세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요한은 창틀에 기대선 채로 리세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정하게 느껴지는 그 눈을 본 순간 리세트는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대화로 해결하려던 마음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우리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침대를 박차고 나간 리세트가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을 밟는 둔탁한 소리가 이 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요한의 옷깃을 움켜쥔 리세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나를 속여 온 그 시간 동안 네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기는 해?”

동그랗게 부푼 배에 요한의 눈길이 닿자 리세트는 뒷걸음질 치며 배를 감쌌다.

리세트의 눈빛에는 불신이 가득했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가만히 리세트를 바라보기만 하던 요한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는 만큼 리세트는 뒤로 물러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어? 도대체 왜!”

달빛을 등진 탓에 요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리세트는 속에 꽁꽁 감춰 두었던 원망을 터트렸다.

“네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나를 속이고 우리 아기를 죽이려고 했잖아!”

“……뭐?”

한 뼘의 거리를 남겨 둔 채 멈추어 선 요한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너를 떠난 이유, 궁금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이렇게 망가진 분위기에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미 우리의 오늘은 망가져 버렸는데. 돌이킬 수 없는데. 다 끝났는데.

“너와 집사가 하는 얘기를 들었어.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말. 나 모르게, 내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

거칠게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나한테 허락을 구하지 않았는데, 나는 꼭 뭐든지 너한테 말해야 돼?”

왜?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아기를 왜 죽이려는 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아무런 말도 해 주질 않는데!”

오늘도 리세트의 의견 같은 건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요한의 마음대로, 요한의 뜻대로 지하실로 끌려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다시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단지, 너를 위해서…….”

“그런 변명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

요한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리세트가 단호하게 끊어 냈다. 나를 위해서. 그처럼 잔인한 변명이 있을까?

“내가 궁금한 건 오직 하나뿐이야. 우리 아기를 죽이려는 이유를 말해 줘.”

“…….”

“제발 부탁이야. 제발, 요한…… 무슨 말이든 해 줘.”

리세트가 먼저 요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홀로 두려워하며 헤매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이제는 정말 그럴 만한 여력이 리세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침묵만 깊어져 갈 뿐이었다.

“말할 생각이 없구나.”

리세트의 시선은 굳게 다물린 입술을 지나 멈추어 달라는 듯 애원하는 눈동자를, 붉어진 눈시울을 차례대로 훑었다.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안아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몸은 너무나 멀쩡한데 마음은 고단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황폐해졌다.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면, 당장 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세운 리세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올려 덮었다. 계속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던 요한이 결국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리세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창백한 달빛이 스며든 방 안에 억눌린 듯한 울음소리가 외로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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