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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9)화 (79/151)

79화
지하실

책장 뒤편에 숨겨진 세상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그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는 암흑 그 자체. 그곳에 어떤 것이 있는지, 무언가 있기는 한 것인지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리세트의 시야 안으로 차가운 불빛이 번졌다. 언제나 안도감을 선사하던 요한의 색. 하지만 지금은 가장 두렵고 무서운 새파란 마력이 빚어낸 빛깔이.

어둠이 걷힌 그 세상 너머에서 리세트는 보았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그 끝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문을, 촛대 위에서 흔들리는 불꽃이 피워 낸 검은 연기를. 리세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건지 바로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잠잠한 바다 같은 눈동자는 이 모든 것을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악몽이라면, 벗어날 수 있는 꿈이면 좋을 텐데.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몸을 옭아맨 단단한 팔과 한시도 시선을 놓치지 않는 짙푸른 눈이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지하실. 우리 아기를 죽이려는 공간.

‘지하실을 가면, 그 애는 죽어.’

불쑥 떠오른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질 나쁜 장난이라 치부했던 그 말이 리세트의 마음을 좀먹었다.

아기가 죽는다. 간신히 커 가고 있는 우리 아기가 결국, 요한의 손에 죽는다.

끔찍한 상상이 하나둘 떠오르는 사이에 지하실로 이어져 있는 계단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괜찮아.”

굳어 가는 몸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요한은 천천히 모든 불을 밝혔다. 여전히 두 눈은 오롯이 리세트만을 담은 채였다.

이곳의 모든 불이 켜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어둠에 묻혀 있었고, 요한 본인조차도 초점을 잡기 위한 최소한의 불빛만 켜 두곤 했던 공간이었으니.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초록빛 눈동자에 파란 불빛이 스며들었다. 새하얀 살결 위로도, 보드라운 머리카락으로도 그 불빛이 번져 갔다. 그처럼 델피니움의 색채로 서서히 물들어 갔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던 시선은 요한이 고개를 틀자 어긋나 버렸다.

“겁먹지 마.”

짧게 리세트의 부푼 배를 바라본 요한이 마침내 걸음을 내딛는 순간 리세트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는 몸을 놓치지 않으려는 두 손에도 우악스러운 힘이 실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설마 지하실이야?”

“…….”

“지하실 아니지?”

까마득한 계단을 애써 모른 척하며 리세트는 요한의 옷자락을 힘껏 그러쥐었다. 핏줄이 올라온 새하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요한, 우리 지금 어디를 가는 거야?”

요한은 대꾸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내 말에 대답해!”

이성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리세트는 결국 두려움에 굴복했다.

“나 좀 내려 줘. 나 이곳이 너무 무서워. 응? 다시 올라가자. 어서 밖으로,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소리와 피맺힌 절규가 뒤섞인 애원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우리 파티 하기로 했잖아. 메이가 벌써 다 치웠을지도 몰라. 어서 가자. 응?”

“…….”

“오늘 아침에 나랑 약속했잖아. 우리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리세트를 살려야 한다. 그 일념에만 사로잡힌 요한의 뇌리에는 어떠한 것도 스치지 못했다. 리세트의 비명 소리도, 울음처럼 터져 나오는 외침도, 애달프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조차도.

요한이 마침내 모든 계단을 다 내려가 바닥으로 내려섰을 때였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리세트는 주먹 쥔 손으로 요한의 몸을 밀어 냈다. 어깨와 다리를 단단히 잡고 있는 손을 할퀴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요한의 몸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고 리세트의 몸을 속박한 힘은 여전히 건재하기만 했다.

“나 좀 보란 말이야. 무시하지 말고, 내 눈을 보라고!”

아무리 외쳐 보아도 요한은 잠시도 리세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을, 문 너머의 공간을 가늠해 보듯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요한의 손이 문손잡이에 닿았다. 리세트는 절박한 심정으로 요한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요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찰나의 시간에 매달리듯 리세트는 그를 껴안은 팔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떨어지면 죽을 듯이, 간절하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천천히 고개를 내려 뺨에 입을 맞추어 주는 요한에게 리세트는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어졌다.

“미안해.”

뜨거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는 냉정했다. 이제 요한의 두 눈은 더 이상 리세트를 향하지 않았다.

“요한 델피니움!”

리세트가 울음 섞인 비명을 토해 내는 동시에 거대한 문이 열렸다. 끼이익-, 금속성의 물체가 만들어 낸 소리가 리세트의 비명을 집어삼켜 버렸다.

길게 드리우던 그림자 하나가 사라진 바닥 위로 파랗게 일렁이는 불빛이 내려앉았다.

이제 이 공간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 ❖ ❖

문밖의 어둠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공간이 펼쳐졌다.

기다란 책상, 그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유리병과 한쪽 귀퉁이에 쌓여 있는 꽃, 벽 한 면을 채운 델피니움 가문의 문양을 마지막으로 훑은 리세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 중앙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델피니움을 상징하는 빛이 아닌 검붉은 마법진. 피를 흩뿌려 만들어 낸 듯한 그것을 본 리세트의 뇌리에 불현듯 카에덴 델피니움이 건넨 꽃이 떠올랐다.

다시 고개를 든 리세트는 책상 한편에 쌓인 꽃을 보았다. 이미 본 적이 있는 꽃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이 두 번씩이나 리세트에게 준, 손에 닿은 순간 시들어 버린 그 꽃.

가빠진 숨을 뱉어 내던 리세트는 제 몸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한이 책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죽일 거야?”

리세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질문을 깊은 한숨과 함께 토해 냈다.

“내가, 널?”

반문하듯 물어보는 요한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억지로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낯설고 무서웠다.

“그럴 리 없잖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요한은 가장 시급한 일을 잊지 않았다.

일단 정확히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 리세트가 임신 소식을 전하던 그 밤처럼 제 눈으로 아이가 지닌 마력을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은 오직 그 생각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나 말고, 우리 아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요한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망설임 없이 내디디던 걸음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뭐라고?”

“우리 아기, 죽일 거냐고 물었어.”

요한은 리세트를 내려다보았지만 리세트의 시선은 마법진 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죽이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죽일 거잖아!”

원망이 밴 그 목소리를 요한은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뭐야.”

“지하실을 가면, 네가 우리 아기를 죽일 거라고 했어.”

“카에덴 델피니움이 그래?”

“응.”

“그 사람 말을, 믿어?”

“아니.”

리세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도 못 믿겠어.”

맑은 눈동자가 제 모습을 비추는 순간 요한은 시선을 피했다. 더는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어서. 나를 믿어 달라고, 제발 부탁이라고. 바보처럼 한심한 애원을 하게 될까 봐.

아기. 우리의 아기. 나와 리세트의 아기.

델피니움의 피를 이어받은, 이 끔찍한 마력을 계승할 괴물.

리세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갈 그 존재를 요한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비친들 이로울 것이 없었다. 리세트의 불안감만 가중시킬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여기로 온 이유가 뭐야?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요한은 깨달았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무작정 리세트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는 걸. 그저 제 마음만 앞서 일을 벌인 꼴이 한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요한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해야만 너를 살릴 수 있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지금의 너는, 나를 믿지 않을 테니까.

다시 몸부림치는 리세트를 다치지 않게 내려 준 요한은 옭아매듯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버둥거리는 주먹 쥔 손이 등을 때리고 할퀴어도 개의치 않았다.

요한은 단번에 리세트의 목덜미를 짚어 마력을 흘려 보냈다.

“미안해, 리세트.”

서서히 리세트의 움직임이 멎어 갔다. 그의 몸을 떼어 내려 휘젓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시 만날 거야.”

부릅뜬 눈으로 고집스럽게 버티던 리세트의 눈 주변을 커다란 손이 덮었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곧 눈시울에 내려앉았다. 불규칙하던 숨소리마저 안정적으로 돌아왔을 즈음 요한은 다시 리세트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여윈 팔이 요한의 걸음을 따라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델피니움의 마력을 감별해 내는 붉은 꽃을 손수건으로 쥔 요한은 그것을 리세트의 손끝에 가져다 댔다.

리세트의 손에 닿자 꽃은 회색빛으로, 모래 같은 잔해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에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사실을 비웃듯,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막막한 한숨이 실소처럼 터져 나왔다.

리세트를 품에 안은 채로 책상에 기대선 요한의 시야가 물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번졌다. 메마른 입술을 적신 뜨거운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리세트의 이마로, 뺨 위로, 꼭 감긴 눈시울에도 툭툭,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세상이 새까맣게 점멸한 듯 보였다. 깊은 바닷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발목을 붙잡아 끌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가문의 문양과 새빨간 꽃,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그 모든 것이 흑백으로 뒤덮인 듯했다.

요한은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선명한 빛을 잃지 않는 제 소중한 연인을 눈에 담았다. 그제야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미안해, 우리 아가. 너를 혼자 남겨 둬서, 그래서 너무 미안해.’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츰 희미해졌다.

‘너무 아파, 형아.’

영원히 일곱 살에 머문 동생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요한, 사랑해. 매일매일 더 너를 사랑할게.’

리세트의 목소리를 길잡이로 삼아 요한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마법진 중앙에 다다른 순간 파란빛의 마력이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리세트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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