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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8)화 (78/151)

78화
이토록 후회할 걸 알았다면

요한은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리세트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리세트.”

그러니 제발, 아니라고 말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지?”

리세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 가는 것을 지켜본 요한은 애써 웃음 지었다. 역시 내 착각이었구나.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 같은 건 그대로 흘려보낼걸.

뻔한 수작질에 현혹된 자신을 향한 욕지거리를 억누르며 요한은 움켜쥐고 있던 리세트의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괜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해.”

그제야 요한은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생겼다.

“케이크, 사 왔구나.”

리세트가 딛고 선 바닥 주위가 온통 크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요한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둘만의 파티인데 내가 다 망쳐 버렸네.”

파티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종종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그곳 카페에서 파는 케이크와 주스로, 방학 때는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각자 원하는 음식을 골라서. 그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바닥에 떨어져 처참하게 뭉개진 케이크가 마치 그 시간의 추억 같았다. 되돌리고 싶지만 이제는 결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 한편에 머무르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어서 치우라고 할게. 조금만 늦게 시작하자.”

요한은 미동조차 없는 리세트의 손에 살며시 제 손가락을 엮었다.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게.

“일단 너의 침실로…….”

“맞아.”

리세트를 이끌어 이곳을 벗어나려던 요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힘이 실린 목소리에 요한의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우리 아이야.”

그를 직시하는 곧은 눈길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의 손을 힘껏 맞잡은 손의 떨림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건 리세트의 목소리뿐이었다.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서, 정말 미안해.”

잠시 말을 멈춘 리세트는 요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선뜻 믿기 힘들 거라는 거 알아.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황당할지도 알아. 그런데 요한, 정말 우리의 아이야.”

마주 잡은 손의 악력이 점차 세질수록 리세트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내가…….”

말을 꺼낸 후부터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다 잘못했어. 미안해.”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인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눈에 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얼굴로 요한은 그저 가만히 리세트를 보고 있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리세트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요한의 손에서도 점차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모든 걸 놓아 버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끝까지 멈추지 마. 피하지 않고 마주 보기로 했잖아.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잖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그 말들을 되새겼다. 흩어지는 용기를 끌어모아 리세트는 다시 한번 진심을 전했다.

“미안해, 요한.”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듯했던 손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리세트는 힘주어 그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더 이상 리세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배신감도 분노도 아닌 어떠한 감정이 요한의 두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던 리세트의 등허리에 테이블이 닿았다. 그 위를 장식하고 있던 접시와 커트러리, 화사한 꽃을 담은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케이크의 잔해에 이미 엉망이 된 바닥 위로 그 빛을 닮은 분홍색 장미꽃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내렸다.

그 소란 속에서 요한은 리세트의 손을 움켜쥔 채로 끌어당겼다.

“왜.”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유리 파편의 소음 속에서도 리세트는 요한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했어?”

❖ ❖ ❖

카에덴 델피니움은 아카데미의 후문을 넘어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널린 시든 꽃잎들이 발끝에 채어 나뒹굴었다.

지금쯤 요한 델피니움은 무얼 하고 있으려나.

사랑하는 아내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존재가 제 아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델피니움 공작 부부의 앞날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한쪽은 끝까지 아이를 죽이려 혈안일 테고, 다른 한쪽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자 할 테니까.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책상 앞에 당도했다. 널브러진 각종 자료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파란색 열매가 맺힌 약초를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열매의 색깔이 꼭 누군가의 눈을 떠올리게 해서.

요한 델피니움이 그렇게까지 망가질 줄이야.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하지만 도움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와 요한의 일이니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단호하게 거절을 표한 리세트 델피니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예의를 갖춘 어조와는 달리 바르르 떨리던 주먹 쥔 손과 굳게 다문 입술이 제법 용맹스러웠지.

어찌나 기백이 대단하시던지.

고작 편지를 보내고 꽃 한 송이 쥐여 준 게 전부인 사이에 저런 불신 섞인 눈빛을 받으니 꽤 억울해졌다. 나름 신사적인 방법을 취했다고 생각했으니.

리세트 델피니움의 육체가 있어야만 연구를 완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밉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를 경계하는 이유가 뭐야?’

할 말을 고심하던 리세트 델피니움은 전혀 엉뚱한 말을 던졌다.

‘연구원께서는 요한의 가족이 아니잖아요.’

다른 말을 더 덧붙일 줄 알았지만 그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가족, 그처럼 황당한 단어가 불신의 이유 전부였다.

‘아직 내 이름을 몰라? 카에덴 델피니움. 이 이름만큼 확실한 가족의 증표는 없을 텐데.’

‘아니요. 요한에게 이제 가족은 저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자기 입으로 그렇게 얘기했어? 이런, 서운해라.’

‘저희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

‘요한을 믿어?’

‘네.’

단단하게 닿아 오는 시선에는 한 줌의 아쉬움도, 망설임도, 두려움조차도 없었다. 조금 더 흔들어 볼 생각을 접은 건 그래서였다. 그토록 누군가를 향해 신뢰를 보이는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라서.

글쎄. 요한이 순순히 아내의 말에 따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만약에, 결국 요한이 뜻을 굽힌다면?

곤란한 건 당연히 그였다. 아내에게 미쳐 있는 요한 델피니움은 절대 그에게 아내와 아기를 맡기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일이 틀어지기 전에 손을 썼다. 리세트 델피니움을 유인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아직 남아 있으니.

‘요한은 끝까지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만약 지하실로 부인을 데려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조금 흔들리던 눈동자는 금세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이미 그가 목격한 뒤였다.

‘한 번도 지하실을 보지 못했구나. 아,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나? 그럼 경고 하나만 할게. 지하실을 가면, 그 애는 죽어. 지금 품고 있는 요한의 아이 말이야.’

마력이 뒤틀려 버린 리세트 델피니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요한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일단 지하실로 데려가겠지. 그래야 목숨은 붙여 놓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쯤 두 사람은 무얼 하고 있으려나.

카에덴 델피니움은 어둠이 다가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서 내일이 오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기다림이었다.

❖ ❖ ❖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요한!”

리세트가 애원하듯 외쳤지만 요한의 발걸음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발에 밟히고 챈 유리 조각이 더 큰 소란을 만들어 냈다.

“어딜 가는 거야?”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수록 리세트를 안아 든 손과 팔에는 더욱 억센 힘만 실릴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잖아!”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사용인들이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마님을 안아 든 채로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공작의 모습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날 보아 왔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저건 마치 마님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요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순간 사용인들은 공작에게 달려갔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울렸다.

“내가, 너희를 부른 적이 있던가.”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목소리가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깨를 움찔 떠는 사람들 틈에서 한 하녀가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메이는 뒤돌아보지 않는 공작을 향해 다시 한번 질문을 건넸다.

“혹시 저희가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건가요?”

살며시 고개를 돌린 공작의 옆얼굴은 그저 평소와 똑같았다. 사용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래서 문제였다. 마님과 함께 있을 때면 절대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신경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금방 다시 손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공작의 발걸음을 막은 기백과 달리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인 게 분명한데 의외로 공작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턱 끝을 까딱였다.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놔.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모습 그대로, 다시 원래대로 꾸며.”

공작은 그 명령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를 죽인 채 버둥거리며 공작의 어깨를 힘껏 움켜쥔 그 손을 메이는 도저히 못 본 척 넘길 수가 없었다.

“저, 주인님!”

요한의 시선이 제 앞을 막아선 하녀에게 닿았다. 바들바들 떨고 있으면서도 끝내 비켜서지 않는 그 하녀는 리세트가 아끼는 사람이었다. 수행 하녀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로서 곁을 지키는 사람.

간신히 메이 하핀을 알아본 요한은 눈짓으로 물러가라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하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마, 마님께는 무슨…….”

“너는 너의 일을, 나는 나의 일을. 이처럼 간단한 일을 왜 그리 복잡하게 만들지?”

그녀를 짧게 일별한 요한은 더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멀어지는 메이 하핀을 살피는 리세트의 반항은 점차 잠잠해졌다.

집무실로 들어온 요한은 책장 옆으로 다가가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벽면에 마력을 흘려 보냈다. 마침내 벽을 이루고 있던 책장이 서서히 옆으로 밀렸고, 그 사이로 문이 나타났다.

요한은 지체 없이 그 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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