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발각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어도 이처럼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택은 고요한 적막에 휩싸인 채로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계단 밑에서 서성거리던 로드니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바닥을 밟아 오는 소리가 가까워져 갔다.
그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공작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아마도 승기를 잡은 쪽은 카에덴 델피니움이라는 뜻이었다. 주인님께서는 절대 그자를 가만히 돌려보낼 작정이 아니었으니.
카에덴 델피니움은 웃는 낯으로 그를 보았다.
“조만간 또 올게.”
다시는 찾아와 들쑤시지 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로드니는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 가 볼 테니 요한 좀 잘 챙겨 줘.”
불청객이 등을 돌리기도 전에 로드니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공작은 텅 빈 시선으로 그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르려던 마음을 애써 누르며 로드니는 잠자코 문 앞에서 대기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서서히 시선을 들어 올린 공작의 얼굴에는 까마득한 절망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강인한 분의 마음을 뒤흔든 것인가.
유일하게 공작을 흔들 수 있는 건 마님, 한 사람뿐이었다. 마님과 카에덴 델피니움. 도저히 어떠한 연결 고리도 찾아볼 수가 없는 조합에 로드니의 근심이 깊어졌을 때였다. 공작이 일어섰다.
“……주인님.”
그가 붙잡을 새도 없이 공작은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행복의 시간은 막을 내렸다. 로드니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 ❖
메이는 무릎에 올려놓은 케이크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리세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자꾸만 창밖을 흘끔거리는 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여 걱정이 되다가도 금세 심드렁해졌다.
파티 때문에 들떠 있을 텐데 불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좋으세요?”
뾰족한 투로 물어보자 리세트의 시선이 다시 메이에게 돌아왔다. 당황스러운 듯이 깜빡거리는 속눈썹조차 순하고 예뻐 보이다니. 이러니 그 요한 델피니움 공작도 아내에게 미쳐 사는 것이리라. 메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이스크림 꼭 같이 먹으러 가자.”
“제가 지금 아이스크림 때문에 삐진 것 같아요?”
단단히 오해를 한 리세트를 보는 메이의 입술 사이로 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이스크림은 머릿속에서 떠나보낸 지 오래였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가 불현듯 떠오르자 정말 삐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나중에 고향으로 놀러 갈까?”
차츰 가늘어지는 눈초리를 보던 리세트가 뜬금없이 제안했다.
“고향이요?”
“우리 둘의 고향 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곳.”
“태어나 자란 곳이 고향 아닌가요?”
“어디든 너와 놀러 가고 싶어서.”
삐진 것 같으니 괜히 말을 돌리는 건가 싶었지만 메이는 특별히 져 준다는 듯 선심을 베풀었다.
“마님께서 부탁하시는 거라면 좋게 생각해 볼게요.”
한 번 튕겨 보았지만 메이는 금방 여행 계획에 빠져들었다.
“주인님은 우리 여행에 끼지 않으시겠지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이 우정 여행에 공작이 끼어든다면 메이는 차라리 공작저에 남는 걸 택할 것이다. 어디를 가려고 하면 사사건건 따라오겠지. 그건 여행이 아니라 감시였다. 아주 지독한 감시.
“놓고 가자.”
“정말이지? 나 믿는다?”
어렸을 적 친구를 대하듯이 얘기하던 메이는 신이 나 손뼉을 쳤다.
그곳은 얼마나 변했을지, 고아원은 아직 그 자리에 있을지, 어떤 걸 먹고 어디를 놀러 다닐지 꽤 세세하게 계획을 세우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멈추어 섰다.
“뭐 하세요?”
마차 앞에서 리세트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던 메이가 문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세트는 어느새 메이에게 빼앗긴 케이크 상자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저택으로 들어온 리세트와 메이는 로비 중앙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티 준비 때문에 어수선할 줄 알았는데, 그런 예상을 비웃듯 홀에는 삭막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메이가 하녀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사이 리세트는 사용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주변을 살폈다. 마지못해 웃고 있는 모습이라는 걸 모를 수 없게 그들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계단을 보았다. 리세트가 귀가하는 시간에 맞추어 마중을 나오는 요한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정원으로 통하는 통로, 그리고 다시 홀. 차근차근 살펴보았지만 요한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마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표정이 어두운 사용인들 틈으로 집사가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주인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요한의 행방을 묻기도 전에 로드니가 먼저 알려 왔다.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혹시 귀족들이 또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집무실이요?”
답하기 힘든 질문이 아님에도 집사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입술을 열었다.
“네.”
“아직도 일이 많이 남은 건가요?”
“그건…….”
망설이던 로드니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마님께 거짓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남은 일정은 없으십니다.”
주인님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말씀드려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주인님이 마님께 해가 될 일을 하실 분이 아니지 않는가.
로드니는 지난날 공작이 보여 준 모든 모습에 희망을 걸었다. 오늘은 두 분께서 오랜만에 갖는 특별하고 오붓한 시간이니까, 괜찮겠지. 그 정신 나간 사람이 몰고 온 지옥도의 풍경도 금세 변모할 터였다. 마님께서 돌아오셨으니까.
“침실로 오라고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메이에게 상자를 건네받은 리세트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집무실을 지나올 때는 살며시 눈길을 주었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침실에 먼저 가서 케이크를 준비해 두어야지.
앞으로 닥쳐올 일이 두려운 만큼이나 상자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겨우 케이크를 방패처럼 생각하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둘이 함께한 좋은 기억을 불러오면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어렵게 다짐한 결심을 자꾸만 번복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에 몰두해야 했다. 그 생각들이 결국 케이크로 귀결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이걸 먹으며 그동안 켜켜이 쌓아 둔 말을 전할 것이다.
아이를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그래서 너를 떠날 생각을 했다고. 아트반이 아니라 요한, 너의 아이라고. 믿기지는 않겠지만 아이가 반년 동안 자라지 않아 너무 무서웠다고 말할 것이다. 숨김없이, 전부 다. 몸에서 일어난 변화까지.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지.
요한이 배신감 때문에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끝까지 아이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나를 많이 미워하게 되겠지?
두려운 모든 생각을 리세트는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걸 각오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상상 속에서 오늘 같은 날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 덕인지 조금이나마 의연한 모습을 꾸며 낼 수 있었다.
리세트는 떨리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문을 열었다. 메이의 말대로 요한의 침실은 연회장을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본래 이곳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커다랗다 못해 거대하기까지 한 꽃다발을 발견한 건 그 무렵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이 요한의 선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항상 등 뒤에 감추어 오거나 가방에 몰래 넣어 오는 요한인데 저렇게 다 보이는 장소에 꽃다발을 방치해 두다니.
넓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꽃다발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리세트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상자를 열어 케이크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꺼내던 순간, 예고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리세트는 그만 상자를 놓쳤다. 케이크가 바닥으로 떨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당혹감에 휩싸인 리세트의 몸을 돌려 세운 건 요한이었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하지만 이면에 절박함이 깃든 눈동자가 리세트를 옭아맸다.
“내 아이라고?”
순간 모든 말을 잊어버린 듯해 리세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카에덴 델피니움. 그 이름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울화가 치밀었다.
‘말하게?’
연구실을 떠나기 전 그는 즐거운 일을 앞둔 사람처럼 생긋 웃으며 물었다.
‘네가, 직접?’
놀리는 듯한 말투보다 더욱 거슬리는 건 그 말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리세트가 대꾸하지 않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요한이 알면 죽이려고 할 텐데.’
재미있는 놀잇감이라도 찾은 양 빙글거리며 웃을 때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말하겠구나. 그걸 빌미 삼아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야. 그런 속내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부리는 수작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얘기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요한이 듣기 전에 직접 말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리세트의 계획을 다 망쳐 버렸다.
입술을 달싹이다 꾹 물고, 다시 무어라 말을 전하려 했지만 누군가 입을 틀어막은 것만 같았다. 리세트의 숨통을 조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궁지에 내몰린 것 같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지?”
저 질문에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리세트의 어깨를 틀어쥔 손이 가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걸 인지한 순간 오히려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아직도 요한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받았지만 리세트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어렵게 결심한 만큼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세트의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요한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