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모르고 있는 사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정중한 몸짓으로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불쑥 나타난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상당히 기품 있는 인사였다.
그는 허락 없이 들어와 침실을 살펴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꾸며 낸 얼굴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거부감이 느껴졌다.
“파티라도 할 생각이었나 봐?”
생긋 웃는 얼굴을 향해 요한이 전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가.”
“쌀쌀맞긴. 하여튼 너는 귀여운 맛이 없어.”
의도적으로 눈가를 축 늘어트리는 모습에 이제는 화까지 치밀었다. 이제 곧 리세트가 돌아온다. 한시라도 빨리 저놈을 치워야만 했다.
“이대로 나를 내쫓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텐데.”
“후회? 그럴 리가.”
문 앞에 오도카니 선 하인은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살폈다. 차갑게 메마른 듯한 요한의 눈길이 그 하인에게 날아들었다.
“내 허락 없이 사람을 들여?”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카에덴 델피니움은 벌벌 떠는 하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왜 애를 괴롭히고 그래. 둘이서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만 나가 줄래?”
요한의 눈치를 살피던 하인은 그가 나가도 좋다는 눈짓을 보내자 단숨에 달아났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피식거리며 걸어왔다. 의자를 빼 앉는 모습이 무척 느긋해 보였다.
“나가라는 말이 안 들리나?”
“너무 잘 들리는데, 우리 조카님께서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하실까 싶어서. 걱정이 되어 잠까지 설칠 지경이거든.”
그의 어조에는 걱정은 고사하고 안쓰럽다는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재미와 호기심, 그것이 전부였다.
“리세트 델피니움이 제 발로 나를 찾아왔어. 이 가문에 대해 궁금한 게 엄청 많은 것 같더라.”
카에덴 델피니움의 손에는 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방금까지도 화병에 꽂혀 있던 분홍빛의 장미였다.
“너는 그 여자를 사랑하잖아.”
손을 타고 흘러나온 마력이 탐스러운 꽃잎으로 흘러들었다.
“이렇게 죽어 버리면 곤란할 테고.”
아름다운 빛을 간직하고 있던 꽃이 서서히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회색빛으로 바랜 꽃이 부서지자 그의 얼굴에 올라온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네가 모르고 있는 사실 하나를 말해 줄게.”
저도 모르는 새 숨을 죽인 요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요를 보이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 그는 일부러 시간을 길게 끌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얼굴이라 놀리고 싶어졌다.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조카를 향한 작은 복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저 얼굴. 그의 형제를 쏙 빼닮은 그 얼굴이 더 큰 희열을 불러왔다. 성격마저 제 아버지를 닮았다면 재수가 없어 더 긴 시간 동안 놀렸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착한 아이이기는 하니 슬슬 장난을 끝맺어 주기로 했다.
“그 여자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궁금하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창백해진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나를 즐겁게 해 줄까.
“너야.”
그는 새롭게 화병에서 빼 든 꽃 한 송이로 요한을 가리켰다.
“요한 델피니움.”
❖ ❖ ❖
치유 계열의 수업이 끝난 직후 리세트는 빠른 걸음으로 실습실로 향했다.
“부탁하신 대로 초반에 쓴 연구 자료는 델피니움 연구원께 드렸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바르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책을 보고 있던 그에게 길어진 햇살의 줄기가 닿아 있었다. 가만 보면 은근히 바닥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필사본은 있으니 찾으러 갈 필요는 없는 거지요?”
“왜요?”
“그 사람과는 더 이상 교류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습니다. 대화를 하는 내내 영혼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전적으로 리세트의 말에 동의를 표한 노바르는 깊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정도였어요?”
“네. 저에게는 최악의 상대였습니다.”
웬만하면 평생 피하고 싶은 남자인 건 확실하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노바르는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전에 없던 행동에 리세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부인의 몸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계신 것 같던데 이대로 교류를 끊어 내도 괜찮을까요?”
노바르는 슬쩍 떠보듯 리세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요?”
“네.”
“그런 분을 찾았다니 너무 잘되었네요.”
노바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괴상한 남자에게서 온전히 벗어나도 된다는 해방감이 물씬 밀려들었다.
“누구신가요? 이번에도 제가 직접 가 보는 게 좋을까요?”
“……제가 물어볼게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을 걸 보니 그쪽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분인가 보네요. 델피니움 연구원보다 견디기 힘든 분이에요?”
“아니요. 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사적이고 착하고 다정한 분이에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요.”
단호하게 반박하는 리세트가 신기해 노바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를 박박 긁던 손도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저토록 강한 부정이라니, 설마…….
“델피니움 공작입니까?”
침묵하던 리세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겠어요? 공작께 비밀로 할 만큼 끝까지 숨기고 싶으셨을 것 아닙니까.”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서요.”
노바르는 교복 재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리세트가 조금 머뭇거리다 한 손을 내밀었다. 노바르는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우리의 연구는 이대로 끝나는 건가요?”
“아니요.”
리세트는 단호한 어조로 뜻을 전했다.
요한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후에, 서로 대화를 잘 마무리 짓는다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요한조차도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아이를 거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요한이 아이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날을 위해서는 그편이 이로웠다.
“원만하게 해결되겠네요. 델피니움 공작이 자신의 아내를 목숨처럼 여긴다는 말, 사교계에서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해도 결국 부인께 져 주실 거예요.”
면전에서 들으니 조금 쑥스러워져 리세트는 살며시 시선을 내렸다.
“그보다 제 안위가 걱정이네요.”
한탄하듯 흘러나온 목소리였지만 꽤나 진지해 보였다.
“왜요?”
“공작께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으니 저를 가만히 두실지 걱정입니다. 지난번에는 정말 죽일 것처럼 쳐다보셨거든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했다. 노바르는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가 금세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니 부인께서 더 저를 변호해 주셔야 해요. 저는 부인만 믿고 있겠습니다.”
“당연하죠. 꼭 그럴 거예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똑똑한 사람이 셋이나 모였으니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아요. 델피니움 가문의 비전 마법과 관련된 일이니 공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하고요.”
갑작스럽게 비전 마법을 언급해 리세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리세트를 배려해 그 말을 묻어 주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으니까.
“잘 다녀오세요. 집으로 돌아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 테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요.”
“마음의 준비요?”
“내일은 공작께서 함께 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면 하루 종일 얼굴이라도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수를 하기 위해 마주 잡은 손에 더욱 큰 힘이 실렸다. 장난치듯 긴장을 풀어 주는 그에게 리세트는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고마워요. 내일 봐요.”
❖ ❖ ❖
“저는 너무 기대돼요!”
상기된 메이의 목소리가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타고 흘러갔다. 양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메이 덕분에 긴장감을 조금 덜어 낸 리세트의 얼굴에도 한결 편안한 미소가 찾아왔다.
“제가 마지막으로 주인님의 침실을 확인하고 왔을 때는 황홀할 정도로 예뻤거든요. 기대 많이 하셔도 좋아요.”
리세트는 메이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상자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 상자 안에는 수업 시간과 과제 발표 시간 내내 고심해서 고른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요한이 아카데미에 있는 카페에서 즐겨 먹던 것으로 고를지, 자주 사 오던 것으로 골라 갈지 고민하다 결국 카페에 들러 사 왔다.
아트반과 둘이 먹었던 기억이 불현듯 찾아와 의외로 결정은 쉬웠다. 리세트는 한 입도 먹지 못했는데 아트반 혼자 그걸 다 먹었다. 먹으라고 사 왔지만 괜히 얄미웠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요한과 세 번씩이나 찾아왔지만 끝내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 상점을 스쳐 갈 무렵에 메이가 제안했다.
“초콜릿 맛, 좋아하시잖아요.”
“지금은 괜찮아. 어서 가자.”
“올 때마다 못 드셔서 속상하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빨리 가서 사 올게요!”
맡겨만 달라는 듯이 메이는 주먹 쥔 손을 펼치며 달려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리세트는 황급히 메이의 손을 붙잡았다.
“나중에 다시 와도 돼.”
“마님께서 여기를, 이플로 상점을 그냥 지나치신다고요? 아이스크림인데요?”
고개를 갸웃하는 메이의 눈매가 차츰 가늘어졌다. 주인님과 함께 오고 싶으신 거구나. 입술을 삐죽이는 메이의 뺨을 꾹 누른 리세트가 작게 키득거렸다.
“다음에 같이 먹으러 오자. 지금은 어서 집으로 가고 싶어.”
“정말이지요? 주인님 다음은 제 차례예요!”
“그래.”
“다른 애들은 데려오지 말고, 마님과 저만 와요. 단둘이요!”
“응! 알겠어.”
리세트는 마차가 멈추어 서 있는 곳으로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노을빛으로 물든 거리로 나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뛰어가는 길에 떠들썩한 소리가 번져 나갔다. 리세트와 메이의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리세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금은 이플로 상점도, 그곳에서 파는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요한 델피니움. 사랑하는 남편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