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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5)화 (75/151)

75화
조금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수행인은 상기된 얼굴로 공작의 뒤를 따랐다. 양손에는 작은 꽃다발 여러 개를 모아 든 채였다. 그는 곁눈질로 힐긋 상점가의 거리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단정한 걸음걸이와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공작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공작은 그것을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된 양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고 거리를 걸어갔다.

분홍색 꽃을 감싼 것도 같은 빛깔의 포장지였다. 공작이 무채색의 옷으로만 갖추어 입은 터라 유독 튀어 보였다. 사람들이 시선이 하나둘 모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벌써 세 시간째였다. 상점가에 들어와 이런 기행을 벌이고 있는 게 벌써 그만큼이나 되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시려나.

그 생각만 하면 어김없이 걸음을 멈추시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은 가만히 멈추어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또 꽃은 아니겠지.

“주인님, 이번에는 어떤 걸 찾으십니까?”

생각에 잠겨 조금 뒤처져 있던 수행인은 헐레벌떡 그에게 달려갔다.

공작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또 그것이 보였다. 바라만 보아도 두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밝은 꽃집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색색의 예쁜 꽃들. 그중에서도 단연 분홍색 장미가 눈에 띄었다.

“꽃을, 또요?”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공작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꽃에 미치기라도 하셨나.

주인님은 한 품에 안고 있지만 마님께는 꽤나 버거운 크기이지 않은가.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공작은 마치 꽃으로 마님을 깔아뭉갤 작정이라도 한 듯 꽃을 사들이고 있었다.

불충한 생각을 하던 그는 얼른 정신을 다잡으며 꽃집의 문을 열었다. 공작은 주인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걸음을 옮겼다.

꽃을 포장하는 동안 손님들이 쉴 수 있게 마련해 둔 곳에도 꽃이 가득 있었다. 소파에 앉는 대신 공작은 천천히 그 공간을 둘러보기도 하였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멈추어 서서 유심히 바라보기도 했다.

“다 되었습니다, 손님.”

공작은 주인이 가져온 거대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만 그곳을 벗어났다.

여덟 개의 꽃다발. 그중 여섯 개는 수행인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두 개는 공작의 품에 안겨 있었다. 특별한 차이라고 해 보아야 크기와 종류 정도였다. 가장 큰 공통점은 모든 꽃이 분홍빛이라는 것.

수행인은 어렵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작 본인이 직접 가지고 가는 건 마님께 선물할 꽃. 다른 건 아마도 침실의 화병에 장식할 꽃일 터였다.

공작을 곁에서 모시게 된 건 약 2년 전,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조금 흘렀을 무렵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집사를 도와 가문의 일을 적당한 선에서 처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공작을 모시게 되었다.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 있던 덕분에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놀랍거나 황당하지는 않았다. 물론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은 조금 유별나다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공작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꽃을 준비해 마님께 안겨 주었다.

어느 날은 탐스러운 한 송이를, 다른 날은 작은 꽃다발을, 또 다른 날은 마님의 몸을 다 덮을 만큼이나 큰 꽃다발을 준비하기도 했다. 마님께서 잠시 공작저를 떠나가 계셨을 때도 침실에는 언제나 공작이 가져온 꽃이 있곤 했다.

신혼이니 그런 것이라고, 아직 연애의 연장선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사의 말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렸을 때도 저러셨지.’

집사의 증언이 이어질수록 놀라움은 커졌다. 공작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직접 꽃을 준비해 자신의 연인에게 주었다고,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쭉 해 오던 일상과 같은 일이라 집사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고도 했지. 황량한 전장에서도 들꽃이라도 발견해 주었을지 모른다고.

선대 공작 부인의 부재 속에서 삭막하기만 하던 정원이 탈바꿈한 것도 다 마님 덕분이라고 했다. 눈을 돌리면 어디서든 볼 수 있게, 원하면 언제든 꽃을 가질 수 있게 정원을 조성해 결혼식을 올리기 전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고 했다.

그걸 지시한 사람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공작이 고개를 틀었다. 이 바람을 닮은 미소가 공작의 입가에 떠올랐다. 꽃다발을 묶은 은색 리본이 그 바람결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행인은 불현듯 깨달았다. 매일 비슷한 꽃을 받는 마님께서 언제나 활짝 웃으시던 이유를.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저 얼굴을 좋아하시는 건 아닐까.

“무슨 일 있나?”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건지 공작은 벌써 열 걸음은 족히 넘게 그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아닙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수행인은 잰걸음으로 급히 달려갔다.

바스락바스락, 포장지가 구겨지면서 생기는 소리와 함께 싱그러운 꽃향기가 밀려들었다. 잠시 멈추어 서 있던 공작은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사랑하는 남편과 그가 직접 준비한 꽃. 오늘따라 유독 맑은 하늘까지.

마님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가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 ❖ ❖

사용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공작의 침실에 설렘이 가득 묻어나는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좋았어!”

비장하게 앞치마 끈을 다시 묶은 하녀들의 두 손에는 각종 연장들이 들려 있었다. 불끈 쥔 주먹을 한데 모은 그녀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소파는 내가 할게.”

광택제와 마른 수건을 들고 온 하녀는 소파로 달려갔다.

“우리는 창문!”

창문으로 달려간 하녀들은 우선 커튼부터 걷었다. 맑은 햇살이 웃음을 머금은 그녀들의 얼굴 위로 스며들었다.

“테이블은 내가 꾸밀게!”

평소보다 더욱 열과 성을 다한 하녀들의 손에서 시작된 단장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져 갈 즈음에야 끝이 났다.

하늘하늘한 새하얀 레이스로 끝이 장식된 테이블보를 빳빳하게 편 하녀는 깨끗하게 씻어 둔 화병을 들고 왔다. 주인님께서 특별히 명하신 것이라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모른다. 테이블 중앙에 화병을 올려놓자 뿌듯한 마음이 한껏 밀려들었다.

“이거 예전에 깨졌던 그 화병 아니야?”

질문을 건넨 하녀가 휘둥그레진 눈을 끔뻑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을 바라보았다.

“맞아. 마님께서 말도 없이 떠나신 날 깨져 있던 건데, 주인님이 똑같은 걸 구해 오셨더라.”

“그런데 꽃은 어디 있어? 네가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

“주인님께서 화병만 준비해 놓으라고 하셔서.”

하나둘 기지개를 켜며 하녀들은 자신이 맡은 일의 마무리를 알렸다. 가장 늦게 허리를 편 하녀가 수건을 높이 들어 올리자 와아-!, 기쁨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주인님,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하녀들은 때마침 침실로 들어선 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마님께서 돌아오실 무렵에 맞추어 음식도 준비하고 있어요.”

“어느 때보다도 준비는 완벽합니다.”

“마음에 드시지요?”

요한은 찬찬히 침실을 살펴보았다. 사뭇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이 작은 연회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수고했어.”

하녀들이 폴짝폴짝 뛰듯이 물러가자 요한은 걸음을 옮겨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어 꽃을 꽂아 두었다. 화병을 장식한 분홍색 장미는 탐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손끝으로 싱그러운 꽃잎을 매만져 본 요한은 문득 몸을 돌려 세웠다.

노을빛이 흘러 들어오는 창가는 평화로워 보였고 얼마쯤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빛과 분위기였다.

아트반 크리프가 돌아간 후에 곧장 리세트를 찾아간 요한은 뜬금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내일 파티를 하고 싶어. 우리 둘만의 파티.’

리세트가 원래 전하려 했던 말은 파티 같은 것이 아니었겠지. 집사가 불쑥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 전혀 다른 말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너무도 밝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본 순간 요한은 그저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듯해 초조했지만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쩌면 오늘, 리세트가 그 말을 전할지도 모르니까.

짐작이었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도,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는 순간에도 리세트의 얼굴에는 갈무리하지 못한 불안감이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안심하라고, 어떠한 것도 괜찮다고 입맞춤을 건넸다. 비로소 리세트가 환하게 웃어 주어 요한 또한 조금이나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웃음을 되찾았다.

괜찮겠지.

처음에는 리세트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말이었다.

괜찮겠지.

이제는 그의 정신을 지탱해 주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요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니. 괜찮지 않았다. 하나도, 전혀. 괜찮을 수가 없기도 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리세트가 만약,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걸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나는 어디까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너는, 모든 걸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요한도 말하고 싶었다. 말해 주고 싶었다. 속에 감춘 말을, 이 가문의 더러운 모든 것을 전부 털어놓고 리세트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결심을 뒤흔든 건 리세트의 미소였다.

다시는 그 미소를 보지 못할까 봐. 이제는 나를 보며 웃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사실 웃어 주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슬프겠지만 견뎌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두려움에 떠는 리세트를 마주하게 되면 형편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조금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밤이 천천히 찾아오길.

그의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오늘은 유독 해가 짧게 느껴졌다. 이제 곧 리세트가 집으로 돌아오겠지. 메마른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 찰나에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세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리라는 걸 요한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어린 하인의 뒤로 지겨운 얼굴이 보였다.

“꼭 해 주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카에덴 델피니움이 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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