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우정이라는 이름
“평소보다 더 맛있는 것 같네.”
가벼운 목소리가 침묵에 잠긴 집무실의 분위기를 흔들었다. 아트반은 말끔하게 비워 낸 찻잔에 직접 차를 더 따랐다. 조르륵, 조용한 소리가 끊기자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애초에 가벼워진 적이 없기도 하였지만.
“너 아니어도 갈 사람은 많아.”
한참 동안 아트반을 응시하고만 있던 요한이 마침내 전한 첫 마디였다.
“걱정해 주는 거야? 진작 좀 해 주시지 그랬어. 일을 죽어라 가져다주셔서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하시는 줄 알았거든.”
장난스럽게 받아쳐 보아도 구겨진 요한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리세트에게는 늘 웃는 얼굴과 다정한 모습만 보여 주면서 나에게만 쌀쌀맞지.
“농담할 기분 아니야. 후작저로 돌아가는 즉시, 네가 저지른 실수를 수습해.”
“실수가 아니니 수습할 필요가 없겠네.”
“아트반 크리프.”
“네. 듣고 있습니다, 델피니움 공.”
아트반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온화한 어조를 이어 갔다.
“좋네. 네가 내 걱정을 다 해 주고.”
황제를 알현해 극비 사항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날 아트반은 결심했다. 요한 대신 자신이 이번 임무가 진행될 곳으로 가겠다고. 어차피 누군가 가야 한다면 그가 가는 편이 모두에게 이롭다.
리세트를 이곳에 홀로 남겨 둔 채로 요한은 절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해 내지 못할 테니까.
‘다시 생각해 보시게. 자네가 가는 것보다야 당연히 델피니움 공이 가는 게 이롭지.’
결정을 번복하길 원하는 귀족들은 결사코 그를 만류했다. 그의 마력이 방어 계열이니 그러나 싶었다. 지난 토벌전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속내를 읽어 내지 못했을 터였다.
전투 계열 마법사들 중 요한이 가장 뛰어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아트반 또한 다른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 요한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왔는지를. 그저 묵묵히, 미련하게 버티며 살아왔겠지. 그러니 위험한 곳으로 떠넘기듯 보내졌을 때도 아무런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해 왔을 테니까.
아트반은 그런 태도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요한이 다른 이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인가?
제발 좀 그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동안은 반기조차 들지 않고 명령을 따랐던 걸까.
약점을 잡힐 놈은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밝혀질까 두려워 제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는 바보는 더더욱 아니었다. 증거를 없애거나 그 무엇을 없애 버렸을 녀석이지. 그가 아는 요한 델피니움은 그랬다.
‘임신한 아내의 곁에 있겠다는 핑계를 고수하고 있지 않나. 공작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 하네!’
요한이 열두 살 때 작위를 승계한 후 벌써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버릇을 고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요한이 얼마나 무르게 행동했을까 싶기도 했다.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던 첫날에는 정말 기절할 뻔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두에 설 때도, 미끼가 되어 적을 유인해 오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도 요한의 대답은 그처럼 간명했다.
아트반은 조금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요한을 응시했다.
“나도 리세트도 없이, 너 혼자 거길 가서 뭘 하겠다고.”
“임무를 잘 수행하겠지? 완벽하고, 무탈하게.”
“우리는 한 번도 임무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어. 평생 호흡을 맞춰 온 팀과 이번에 급조된 팀. 당연히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생각은 못 해?”
“생각의 전환을 해 보는 건 어떨까? 너와 리세트를 팀원으로 거느린 내가 다른 녀석들이야 뭐, 너무 잘 이끌 것 같은데. 너희가 좀 유별났어야 말이지.”
아트반은 진심을 담아 웃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이 같은 팀이 된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졸업장을 들고 달려오던 리세트. 그녀를 위험한 전선에 보낸다고 불안해하면서도 함께하게 되어 내심 기뻐하던 요한. 그 둘을 지켜보며 웃음을 터트린 나.
완벽한 팀이었다. 서로를 너무 위하는 탓에 다툼이 잦기도 했지만.
너희가 옆에 있을 때는 어떠한 순간도 두렵지 않았는데.
“겨우 한 달이야.”
“그 말을 믿어?”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린 요한의 입매가 비틀렸다.
임무에 소환될 것을 요청하는 그 서류에는 한 달이라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앞선 조사원들의 보고가 틀렸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그들의 예상대로 동굴 안에 몬스터 부대가 은신하고 있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느 누구도 이번에 파견 갈 인원들의 안전과 무사 귀환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보고서에 올라온 내용이 사실이라면 너희는 계속 그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지도 몰라. 선발대로서 그대로 전쟁에 임할 수도 있어.”
“그런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트반은 등받이에 몸을 깊이 밀어 넣었다.
“리세트를 공작저에 두고, 네가 직접 갈 것도 아니잖아?”
“너 아니어도 갈 사람은 많아.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어도 갈 사람은 얼마든지…….”
“억지라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우리처럼 몸이 멀쩡한 사람이 없어. 아직 다들 마력 고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잖아. 하여튼 약해 빠진 귀족들 같으니라고.”
부드럽게 요한의 말을 자른 아트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찰랑거리는 찻물을 잠시 응시하던 시선은 다시 요한에게 돌아갔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돌아올게. 나도 얼굴 보고 싶거든.”
어쩌면 이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트반은 알았다. 리세트의 아이에게 아빠, 그 소리를 먼저 듣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꿈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아쉬웠지만 괜찮다. 지은 죄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기꺼워지기도 하였으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대답하지 않는 요한을 향해 아트반은 간절한 뜻을 전했다.
“이만하면 나 좀 용서해 줘.”
너에게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한 것, 지금까지도 너를 속이고 있는 것까지 전부.
“얼마나 뼈저리게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지 몰라.”
소중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뒤를 맡길 수 있는 팀원들을 남겨 둔 채 혼자 떠난다는 불안감은 이제 완전히 떨쳐 냈다. 임무를 위해 떠나겠다는 그 말을 전할 때, 그리고 지금. 요한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잘 다녀올게.”
아트반은 한낮의 햇빛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 동안 나 못 본다고 울지 말고.”
아쉽게도 이런 농담으로도 요한의 마음을 달래지는 못한 듯 보였다. 그래서 더욱 아트반은 이 임무가 기꺼워졌다.
요한이 그만큼 그를 친구로 아낀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 ❖ ❖
카에덴 델피니움은 공책 여러 권을 손에 들고서 연구실에 들어섰다. 묵직한 무게만큼이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설렘이었다.
노바르 로슈만이 가져다준 이 공책은 분명 재미있겠지.
어리숙한 마법사 두 명이 치열하게 머리를 맞댄 결과물 같은 건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이건 다르다. 델피니움의 핏줄을 잉태한 여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니까.
얼마나 기를 쓰고 조사했을까. 과연, 제대로 알아낸 것이 있기는 하려나.
절정에 치달았던 기대감은 소파에 몸을 던진 순간 사라졌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탄식하며 활짝 열어 둔 창문을 보았다.
케서린인가.
꽉 닫혀 있어야 할 창문이 열린 것도 그렇고, 커튼까지 한데 모아 단단히 묶어 둔 것을 보니 영락없이 케서린이 벌인 짓인 게 분명했다.
환기 좀 하고 살라고 하였던가.
종종 예고 없이 기숙사로 쳐들어오던 그 애가 이제는 연구실까지 침범했다. 어렸을 때 버릇을 아직까지 못 고쳤다니. 하여튼 그의 영역 어느 곳이든 케서린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영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두 눈을 아프게 찔러 오는 햇살이 거슬렸지만 다시 몸을 일으키기는 귀찮았다. 빛을 등지는 것으로 타협을 본 그는 공책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음미하듯 공책 한 권을 다 읽은 카에덴 델피니움은 다음 권으로 손을 뻗었다.
여러 연구 자료를 취합해 만든 첫 번째 공책.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가설을 담은 두 번째 공책. 실패한 실험을 기록한 마지막 공책. 총 세 권의 공책을 읽은 후에 든 감상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귀엽고 맹랑하다는 정도이려나.
깜찍하네. 나한테 준 건 제일 보잘것없는 공책만 던져 준 건가?
이 공책의 내용 전부를 아우르는 다른 공책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야 듬성듬성 비어 있는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겠지.
이번 학기 수석과 차석이라더니. 제법 머리를 쓴 모양이었다. 뻔히 수가 보여 가소로웠지만.
‘리세트 델피니움이 죽을지도 몰라. 너희가 하는 연구가 무엇이든, 내 도움 없이는 가장 중요한 걸 알아낼 수는 없을 거야.’
그를 찾아온 노바르 로슈만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끝까지 예의 바른 태도로 대화를 이어 가던 그 애송이가 인사를 전하고 문밖을 나간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어찌나 바쁘게 달려 나가던지. 발걸음 소리가 잠시도 멈추지 않은 걸 보면 곧장 리세트 델피니움을 찾아갔을 터였다.
요한을 사랑한다면 나에게 오겠지.
그 예상에 화답하듯 저 멀리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박자박 바닥을 밟아 오는 그 소리는 머지않아 그의 연구실 앞에 다다라서야 끊겼다.
“들어와.”
노크 소리에 답변을 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그가 미치도록 기다리던 그 여자였다.
마력만 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인데 눈빛은 어찌나 또 용맹하신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맹수의 것인데,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자세는 꽤나 예의가 발랐다.
상대방이 먼저 예의를 차렸으니 그도 맞추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안녕.”
반가운 마음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여자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비교적 표정 변화가 없는 요한에게 익숙한 그에게는 상당히 생경한 모습이었다. 리세트 델피니움이나 노바르 로슈만은 딱 그 나이대로 보였다. 그 재미없는 녀석이 너무 무신경한 것이지만.
“이리 와. 어서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