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나를 찾아와
리세트의 얼굴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하게 읽어 낼 수 있는 감정이 있었다.
슬픔이었다.
리세트를 뒤따라온 하녀들을 눈짓으로 조용히 물리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리세트가 가쁘게 내뱉는 숨결만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 주었다.
“얼마 전에 이상한 사람을 봤어.”
리세트는 요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어.”
예상대로 그 수상쩍은 남자가 카에덴 델피니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사실 그 남자가 카에덴 델피니움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나한테 갑자기 꽃을 주더라. 고백이라도 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꽃만 주고 가 버렸어. 실습실에 꽃다발을 두고 간 사람도 있고. 되게 이상하지?”
집무실로 달려올 때만 해도 샘솟던 용기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지 이처럼 실없는 말만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선생님은 아닌 것 같았고, 연구원인가? 아마 그렇겠지?”
요한, 계속 너를 속여야 할까.
이 아슬아슬한 평화는 누군가의 침묵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요한일지 자신일지, 아니면 우리 둘 모두일지. 그것을 알 길이 없어 리세트는 초조해졌다.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더 이상 요한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리세트가 원했던 그 삶 속에는 거짓과 혼란 같은 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러니 말해야지.
노바르가 무언가를 알아 온다고 해도 리세트는 이제 거짓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프지는 않은데 꼭 죽을 것처럼 마력이 뒤틀려 있는 몸, 델피니움 가문의 마력으로 물든 본래의 마력, 그리고…… 우리 아기를 죽이려던 너.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과 노바르와의 비밀스러운 연구까지도, 다 말해야지.
“요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차 안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다.
우리 아이야. 그 말을 차마 뱉기가 어려워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직 두렵고 무서웠다. 진실을 알게 된 요한이 끝내 아이를 죽이려고 할까 봐. 화를 낼 수도 있겠지. 너무 미워 원망할 수도. 처음부터 그걸 감내해 내리라 생각한 게 무색할 만큼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어젯밤과 오늘, 줄곧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요한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 사실…….”
리세트의 시선이 비스듬히 내려갔다. 제 손을 단단히 맞잡아 주는 커다란 손이 불안감에 잠식당한 마지막 망설임마저 지워 버렸다. 결심을 굳힌 리세트가 막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주인님, 마님. 두 분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가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갑작스러운 방문을 알려 왔다.
❖ ❖ ❖
황제의 명으로 공작저까지 내몰리게 된 보좌관은 참을 수 없는 탄식을 연신 뱉어 냈다.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그 남자가 강경하게 버티는 탓에!
“내 뜻은 변하지 않아.”
편지와 서류, 인편을 통해 델피니움 공작이 수없이 내놓았던 답변은 여전히 건재하기만 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무책임한 말만 하실 겁니까!”
참다못한 보좌관의 노기 띤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내가 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적은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난 회의 결과를 전해 듣지 못했나?”
“그 의무의 연장선으로 이번 파견도 가셔야지요.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다는 걸 모르고 계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이런 조사를 위해 나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이 정도의 일을 수행할 마법사들은 많을 텐데.”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계속 말해 오고 있지만 그 뜻, 이번에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래서 일방적으로 회의까지 불참하시는 겁니까?”
“일방적이라…….”
그는 뜨끔한 속내를 들킬까 싶어 황급히 끼어들었다.
“물론 원칙적으로 따지면 공께서는 현재 일시적으로 임무를 쉬고 계시지요. 하지만 이런 큰일이 벌어졌으니 다시 복귀하시는 게 온당한 처사이지 않겠습니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델피니움 공작이 이번 파견을 거부하는 이유. 다름 아닌 공작 부인의 임신 때문일 터였다.
차를 내오던 하녀들은 흘긋 분위기를 살피다 곧 물러갔다. 불편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 두려던 편지를 품에서 꺼내 놓았다.
“읽어 보시지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넨 그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차를 마셨다.
봉투가 찢어지고 마침내 공작이 편지를 펼치는 그 순간까지 숨도 쉬지 못한 채로 멈추어 있었다. 극비 사항인 만큼 공작이 거절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 편지를 본 순간 뜻을 굽히겠지. 하지만 그의 예상은 이번에도 처참하게 빗나갔다.
“다른 사람을 추천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해.”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십니까? 아직 임시 조사단원들이 전부 돌아오지 않아 정확히 확인된 건 없지만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또다시 대규모의 침략전이 발발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수적 열세에 몰린 몬스터들이 서부까지 밀려난 줄 알았다. 겉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그놈들을 완전히 처리하지 않는 건 이 사회의 체제를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서, 그 한심한 이유와 더불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 임시적으로 휴전한 상태였다.
이대로 두고 보자.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니 섣불리 다시 공격해 오지는 않을 거다. 많은 이들의 의견은 그랬다. 하지만 그곳으로 파견 간 인원들의 보고를 취합하면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 그 너머를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헤아리기 힘들 만큼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동굴 주변의 숲에는 다량의 함정이 있어 조사가 순탄치 않다는 내용으로 보고서는 끝을 맺고 있었다.
요한은 그만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었다.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안이니 공께서도 함구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자꾸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공작을 보며 보좌관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까.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이는 듯한 눈으로 문 쪽을 살피고, 계속 시계를 확인하는 요한 델피니움이라니.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지만 공작을 둘러싼 분위기는 지난날 보아 왔던 모습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앉혀 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런 공작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터라 그는 놀랍기도 하고 경악스럽기도 했다. 꿈을 꾸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제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주세요.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재차 간곡하게 부탁하자 공작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매몰찬 거절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인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전혀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아니. 생각하지 마.”
예고 없이 들이닥친 목소리의 주인이 태연한 얼굴로 문턱을 넘어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보좌관은 흠칫 놀라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크리프 후작?”
아트반은 들고 온 서류를 보좌관에게 건넸다.
“이번 파견, 내가 가는 것으로 마무리해.”
서부의 외곽에 자리한, 몬스터들이 터를 잡은 그곳으로 향하는 인원들을 지휘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 반드시 요한 델피니움 공작의 서명을 받아 가야만 했던 그 서류였다.
❖ ❖ ❖
집사에게 노바르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들은 리세트는 잰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의 손에는 피처럼 붉은 색감을 가진 꽃이 들려 있었다. 일전에도 본 적이 있는 그 꽃. 카에덴 델피니움으로 추정되는 그 남자가 준 꽃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어요?”
그의 맞은편에 앉은 리세트의 눈길은 꽃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꽃, 한 번만 만져 봐 주실래요?”
“오늘 만난 그분께서 제게 이 꽃을 가져다주라고 하셨나요?”
노바르는 저릿저릿한 손을 한 번 말아 쥐며 꽃을 건넸다.
“부인께서 이 꽃을 만졌을 때…….”
차마 뒷말을 이을 수 없던 노바르는 떨림을 감추듯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하게, 놀란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이 꽃이 시든다면 델피니움 가문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라 합니다.”
“이미 확인해 보셨잖아요.”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니까요. 정확한 방법으로 다시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리세트가 꽃을 쥐자 탐스러웠던 꽃잎이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졌을 때처럼 꽃은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분께서는 또 뭐라고 하셨나요?”
리세트는 이 꽃을 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더 확인하라는 뜻으로 보낸 것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 그의 말을 들어 판단하라고.
“자세한 건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들은 건 그것이 전부였거든요.”
노바르는 가방을 뒤적여 편지 하나를 꺼냈다.
“델피니움 연구원께서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시는데 괜히 불안해져서요. 어서 보세요.”
델피니움 가문의 문양을 간직한 실링을 뜯어내자 새빨간 편지지가 보였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맞나?
우선 반갑다는 말부터 전할게. 반가워. 편지로는 처음 만나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
공작 부인께는 참 궁금한 게 많아.
무슨 생각으로 요한을 속였어? 대충 짐작하고 있는 이유가 맞을 것 같긴 한데, 그쪽 입으로 확인받고 싶어. 예상한 게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 굉장히 좋아하거든.
마력 이상 징후의 원인을 알고 싶지 않아? 요한에게 물어볼 생각이라면 빨리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계속 부인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요한은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음…… 아닌가? 하긴, 부인이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면 말해 줄 것도 같네. 이제 곧 죽을 테니 나를 통하지 않고도 어쩌면 알게 될 수도 있겠는걸?
그런데 그러지 마. 요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바르르 흔들리던 리세트의 시선이 어느덧 마지막 줄에 닿았다.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본 순간 편지가 천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붉은 먼지처럼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잔해가 흩어질 무렵에 리세트의 머릿속을 차지한 건 마지막 줄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살고 싶지?
그럼 나를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