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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2)화 (72/151)

72화
다 알고 있었구나

노바르는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 카에덴 델피니움에 관한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그가 주관했던 연구 과제와 성과, 학회에 실린 각종 비평들. 실로 두려움이 샘솟는 발자취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탓에 긴장한 면도 적지 않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리세트가 말한 인상착의와 상당히 흡사해서.

실상을 따져 보면 생김새에 관한 양질의 정보를 얻은 건 아니었다.

그저 대략적인 몇 가지와 분위기. 사람을 판별하기에는 다소 무리인 정보였지만 노바르는 똑똑히 알았다. 저 사람이 바로 리세트가 말한, 위험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남자라는 걸. 풍기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눈동자가 어딘가에 단단히 미쳐 있는 듯한 사람을 연상케 해 저절로 확신이 섰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죄다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생긴 게 마음에 드네. 난 너처럼 생긴 애들이 좋더라.’

통성명을 한 뒤 곧바로 면전에다 대고 한 말이었다.

‘키 크고 사납게 생긴 애들, 딱 질색이라서. 크긴 크지만 너는 굳이 따지면 귀여운 쪽이거든. 순하게 생기기도 했고.’

노바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건넨 말 또한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본인도 꽤나 큰 편이면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기도 하였지만.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카에덴 델피니움이 먼저 말문을 텄다.

“누가 나를 좀 찾아 달라고 해? 내가 보고 싶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이 연달아 이어졌다.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는 연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기 전 노바르는 재빠르게 답했다.

“선생님이라…….”

의도적으로 말끝을 늘이는 목소리에 노바르는 바짝 긴장했다.

“이 기분 때문에 케서린이 교육자가 된 건가? 상쾌하네.”

“……네?”

“아, 그렇다고 굳이 선생까지 될 생각은 없어. 시험 문제 만들고 채점하고, 귀찮잖아.”

시선을 돌려 문득 그의 연구실을 살펴본 노바르는 어쩐지 긴장감이 배가 되는 기분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책으로만 접한 진귀한 약초와 괴이하게 생긴 식물 여러 개. 극독으로 정평이 나 있는 독초.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사뭇 두렵기까지 했다. 리세트의 경고를 떠올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가 진행하는 연구를 어디까지 알고 있어?”

“가장 최근에 발표하신 마력 폭주를 가속화시키는 것, 제일 높은 평가를 받으신 마력 개화를 영원히 막는 것에 관한 연구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뒷조사를 상당히 철저하게 했네.”

대개 명망 높은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반기곤 하지 않나.

저런 반응은 예상에 없던 것이라 노바르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런 속내를 읽었는지 카에덴 델피니움은 한 손을 휘휘 저었다.

“미안. 내가 요즘 좀 신경을 세우는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 기분이 더럽거든.”

“어…… 죄송합니다. 그저 너무 닮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기분이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야. 너는 괜찮아. 말했잖아, 너 귀엽게 생겨서 좋다고.”

도무지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노바르는 일단 상대를 살피기로 하였다. 그러려면 우선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해야겠지.

“아직 그 머리로 이해하긴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네.”

“…….”

“칭찬인데 표정을 보니 별로였던 모양이네.”

정말, 이 남자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노바르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가 피식 웃었다.

“내 연구는 지금의 너에게는 필요 없지 않나? 애초에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내 연구를 공부 자료로 쓰는 건 적합하지 않을 텐데.”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저 남자의 연구에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긴 하지만 노바르가 그걸 가지고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연구라는 건 발전의 기반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저 남자의 연구는 발전을 퇴보시킨다. 그가 발표한 모든 것은 리세트 델피니움에게는 필요 없는, 정반대의 내용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새로 시작하신다는 연구 과제가 마력의 흐름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마력의 흐름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연구를 진행하실지 궁금해서요.”

노바르는 그의 눈치를 힐긋 살폈다.

“거창하게 연구라고 할 순 없지만 제가 최근에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과제가 있거든요. 스스로 해 보는 중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네.”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린 카에덴 델피니움이 한 손을 건넸다. 흠칫 놀란 노바르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악수하자는 건 아니고. 달라고.”

맡겨 놓은 물건을 찾아가는 듯한 말투에 노바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정중하게 잡았던 손을 그만 놓으며 노바르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연구한 거. 다 보여 줘. 궁금해.”

❖ ❖ ❖

리세트는 초조한 마음이 들어 자꾸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카데미가 있는, 노바르 로슈만이 있을 방향으로.

카에덴 델피니움에 관한 것이라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요한에게 물어보면 된다.

안다.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요한에게 가족에 관한 걸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요한의 부모님과 동생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일 때문에 요한이 어떤 시간을 견뎌 냈는지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더더욱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리세트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꼭 쥔 주먹을 들어 가슴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쿵쿵쿵. 어느 때보다도 귓전을 때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했다.

‘나한테 가족은 리세트, 너 하나뿐이야.’

불안하게 날뛰는 소리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오늘 아침, 깨어나서 처음 본 요한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대해 주지만 그 눈에 담긴 게 걱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식사를 챙기고 배웅을 해 주던 때도 요한은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리세트가 힘들고 지쳐 주저앉을 때마다 곁을 지켜 주던 그 미소였다.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낸 리세트의 시야에 거대한 저택의 입구가 들어왔다.

어느새 공작저가 가까워져 있었다.

❖ ❖ ❖

“주인님?”

수행인은 다시 조심스럽게 공작을 불렀다. 벌써 세 번의 부름이었지만 공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 공작은 회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고 잠시 서류를 보다가도 금세 덮어 버렸다. 마님이 돌아오신 후 처음 목격하는 광경이었다. 책상 앞으로 돌아온 공작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마님께서 아카데미로 가시기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

그는 공작이 말없이 건넨 서류를 받아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그만 나가 봐.”

홀로 집무실에 남은 요한은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활자를 읽어 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그저 무분별한 글자들의 나열로만 읽혔다. 결국 서류를 내려놓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흘러가는 구름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곧 리세트가 집으로 돌아오겠지. 아이와 함께.

‘우리 아기는 왜 싫어했어?’

어젯밤, 잠에 들기 전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리세트는 속삭이듯 물어 왔다. 일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인데 리세트는 그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품속으로 더욱 깊이 안겨 와 등을 감쌌다.

조용했고, 그래서 더욱 길고 고단한 밤이었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리세트가 알고 있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리세트 앞에서는 언제나 함께 아이 이야기를 하며 마주 웃어 주었으니까. 바라고 있을 법한 대답을 적절하게 해 주었다 생각했는데…….

그런데 너는,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런 나 때문에 상처받았겠구나.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리세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손길이 스치고 눈에 담는 모든 것들을 전부 아름다운 것으로만 꾸며 주고 싶었다.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사랑만 받아도 되는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리세트가 가장 원했던 건 주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웃고 떠드는 일상을, 어느 날은 실컷 다투다가도 또다시 금세 마주 웃는 예쁜 행복을.

그에게는 리세트가 이 세상의 전부였지만 리세트는 아기 또한 그 세상의 일부로 사랑했다.

창밖에서 포근한 노을빛이 흘러 들어왔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요한은 그 빛 속에 파묻혀 눈을 감았다.

예전처럼 돌아간 줄 알았다. 돌아갈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나. 이대로, 서로에게 가장 묻고 싶은 말은 묻어 둔 채로?

어떻게 해야 그때의 시간을 가져올 수 있을까. 우리가 행복했던,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았던 그 시간으로.

서로 마음속에 감추어 버린 이야기를 꺼내면 되겠지.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요한에게는 가장 어렵고 끝까지 숨겨 두고 싶은 진실이었다.

내가 만약, 너에게 모든 걸 알려 준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너는 그때처럼 내 편을 들어 줄까. 계속 내 곁에 남아 줄까.

이대로 어떠한 말도 해 주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될 거라는 걸 안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처럼 주변을 떠돌겠지. 하지만 모든 사실을 밝히면 리세트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괴물로 여길 것이다.

그래. 괴물 보듯 바라보게 되겠지.

요한은 그 시선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끝나지 않을 고민이 점차 깊어져 갈 무렵에 다급하게 이곳으로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거칠어진 숨소리가 집무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문을 등지고 있던 요한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사용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급박한 일이 생겨 이처럼 달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문고리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는 리세트였다. 너무도 소중한 그의 연인, 리세트 델피니움.

“요한.”

그의 연인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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