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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1)화 (71/151)

71화
기다릴게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한 얼굴로 리세트는 끝내 입술을 닫았다. 붙잡은 걸 후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제발 가지 말라는 듯이 간절해 보이는 그 눈을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다.

“옆에 있을까?”

리세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보다 빠르게 리세트 곁으로 간 요한은 다시 쿠키에 잼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듬뿍 잼을 바른 쿠키는 리세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고운 입자와 파사삭, 쿠키를 부수어 먹는 소리가 대화의 여백을 채웠다.

한 개, 두 개. 천천히 받아먹던 리세트는 돌연 스푼을 쥔 요한의 손을 붙들었다.

“어려워.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책에 시선을 고정해 두던 리세트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울 것 같지는 않았다. 눈물이 차오를 듯한 눈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뭐가 어려워?”

요한은 그만 쿠키를 내려놓은 손으로 리세트의 눈가를 쓸어 보았다.

“문제가, 너무 어려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풀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어.”

“어떤 문제?”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요한 너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모르는 게 당연한 건데 너한테 의지하려고나 하고. 나 정말 한심하지?”

리세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모르는 거니까 당연히 내 힘으로 풀어야 하는 건데…….”

펼쳐져 있는 책장이나 공책은 새하얗기만 했다. 밑줄을 하나도 긋지 않아 새 책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공책 또한 별다를 바 없었다. 고민한 흔적이 보이거나 잉크 방울이 떨어진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한은 다시 독서대로 시선을 가져갔다. 일부러 리세트의 눈을 보지는 않았다.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치유 계열의 학생들이 보는 책은 요한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의 언어로 보일 뿐이었다. 리세트가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요한은 오래도록 곁에 머물러 주었다.

리세트가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일까. 아기에 관련된 일일 것이라고, 요한은 짐작했지만 선뜻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만약, 그 문제가 맞다면 요한이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요한은 무릎을 굽혀 앉아 리세트의 뺨을 감쌌다.

“고민을 얘기해 주는 것도, 나한테 의지하는 것도 좋아. 나는 뭐든 네가 하는 거라면 다 좋으니까, 그러니 괜찮아, 리세트.”

따스한 불빛이 스며들었지만 리세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림자 뒤에 숨은 것만 같았다.

“기다릴게. 네가 말해 줄 때까지.”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어들이자 리세트가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요한은 아기를 품고 있음에도 여전히 가녀리기만 한 아내의 몸을 마주 안아 주었다.

밤이 깊어 가도록 리세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다녀올게.”

마차의 창 너머를 보며 리세트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다녀와.”

뺨에 짧은 키스를 남긴 요한은 마차가 떠나가는 걸 지켜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리세트는 요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요한도 그러고 있었으니까.

“마님, 잘 다녀오세요.”

문을 열어 준 마부의 다정한 인사에 리세트도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다녀올게요. 그럼 이따 봐요.”

마차에서 멀어질수록 리세트의 입술에 맺혀 있던 웃음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짙은 피로감으로 뒤덮인 얼굴뿐이었다.

어제 본 수상쩍은 남자의 얼굴이 불쑥 뇌리에 찾아온 건 그 무렵이었다. 강의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리세트는 도서관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책을 하나씩 꽂아 넣고 있던 사서가 벌컥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여쭈어볼 것이 있어서요.”

사서에게 그 남자의 생김새를 상세하게 설명해 보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허탈하기만 했다.

“글쎄요. 그 시간에는 자리를 비워 잘 모르겠네요.”

“꼭 어제가 아니어도 돼요. 다른 날에 보신 적은 없으세요?”

리세트의 말로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눈매, 새까만 머리카락과 짙은 파란색 눈동자. 빈약한 단서를 쥐어짜 내 보던 리세트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요한과 무척 닮았다는 말을 하면 조금 더 인상착의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리하지는 못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제가 자리를 너무 자주 비우지요? 죄송합니다.”

말이 없는 리세트의 행동을 질책으로 받아들인 그가 돌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요즘 일이 좀 많이 바빠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꼭 제시간에 있을 테니 다른 분들께는 말하지 말아 주실 수 있나요?”

잠시간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던 리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혹시 나중에 제가 말한 내용과 일치하는 분을 발견하신다면 이름 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멋쩍게 웃고 있는 그를 본 리세트는 그만 도서관을 떠났다. 강의실로 들어서며 앞자리를 보았더니 역시나 노바르가 앉아 있었다. 리세트는 걸음을 빨리해 그에게 다가갔다.

“스승님은 잘 만나고 왔어요?”

“네. 뜻밖의 수확이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반가운 말에 리세트는 잠시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 있었다.

“어떤 건데요?”

“카에덴 델피니움. 부인께서는 그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다만 그 이름에 붙은 델피니움이 묘한 의문을 불러왔다. 완전히 닮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한의 분위기와 비슷했던 그 남자, 혹시 그 사람일까. 리세트는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 들었어요.”

“제가 그분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왜요?”

“마력의 흐름에 관한 분야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권위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르고 있을 리 없잖아요.”

“정식 연구원이 아니면 아카데미 측에 따로 요청을 해야만 그분의 연구 자료를 볼 수 있다고 해요.”

노바르는 보고 있던 책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부인께서도 같이 가실래요?”

“저는…….”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아 노바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

의외로 리세트가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라 의아해하던 노바르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10여 년 전, 델피니움 가문을 휩쓴 일을 기억해 냈다. 안타까운 사고라 알려진, 혹자들은 인위적인 악행이라며 비난하는 화재 사고로 생을 마감한 공작 일가의 일을. 그 사건의 배후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던 유일한 생존자 요한 델피니움을.

요한 델피니움은 그날을 계기로 방계 혈족들과 철저하게 선을 긋고 살아왔다. 애초 손이 귀한 가문이니 그 수를 세어 보아야 한 줌 남짓이지만 가문의 크고 작은 행사는 고사하고 왕래조차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 혼자 가는 게 낫겠네요.”

노바르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펜을 들어 공책에 남은 말을 이어 적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연구를 델피니움 공작께 비밀로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분도 델피니움이니 부인께서는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리세트는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펜을 찾아냈다.

[조심해요.]

잠시 숨을 고른 후 조심스럽게 남은 말을 써 내려갔다.

[내 말이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냥, 왠지 모르겠어요. 불안해요.]

그 남자의 인상착의를 꼼꼼하게 적은 리세트는 빠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만약 내가 말한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면 꼭 조심해요. 그 남자,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 ❖ ❖

케서린 로티는 성가신 방해꾼에게 차 한 잔 내어 주지 않은 채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리세트 델피니움이 많이 아팠다고 하던데.”

가뜩이나 신경이 쓰이는 마당에 방해꾼의 입에서 소중한 제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쥐고만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걸 굳이, 이 시간에 찾아와 나에게 묻는 이유는?”

“네가 내 조카의 아내의 선생님이니까?”

“쓸데없는 수식어가 길어.”

연구실을 흥미롭다는 듯 구경하던 방해꾼이 소파에 늘어지듯 기대앉았다. 그 한량 같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찻잔에서 하얗게 피어 올라오는 수증기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내가 뭐, 범죄자라도 돼? 셀번 밀란도 그런 눈으로 쳐다봤는데 너까지 그러니 이제는 서운해지려고 하네.”

“헛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그만 나가지 그래? 내일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바쁘거든.”

대화의 단절을 알리듯 책장 앞으로 다가선 그녀는 내일 수업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 두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심화 과정인데도 그런 쉬운 걸 가르쳐? 애들이 많이 멍청해졌구나. 나는 역시 교육자의 길로 가지 않길 잘했어. 답답해 죽었을 것 같아.”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카에덴 델피니움이 생긋 웃으며 책을 빼앗아 갔다. 다시 소파로 향하는 발걸음도, 소파 위로 풀썩 엎드려 눕는 동작도, 책장을 넘기는 손짓까지도 모조리 눈에 거슬렸다. 얇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팔랑팔랑, 가볍게 울려 퍼졌다.

“교육자는 아무나 되는 줄 알아? 당신 같은 남자가 선생님이 되었다면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이나 끼쳤을 테니 다행이지.”

그를 얼마간 주시하고만 있던 케서린 로티는 너무 놀란 탓에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던졌다. 꽤나 심통이 난 듯한 목소리에 그는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예전에 나와 같이 교육자가 되어 보자던 친우가 내 눈앞에 계신 분이 아니었나?”

“언제 적 얘기를…….”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와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던 케서린 로티를 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의외로 노바르 로슈만이었다. 내심 리세트일까 싶어 걱정했던 그녀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감은 금세 사라졌다.

“선생님, 혹시 카에덴 델피니움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그녀가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는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소파에 누워 있던 남자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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