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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70)화 (70/151)

70화
가장 진실한 마음

리세트는 오늘 본 이상한 남자의 말을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 피를 이어받은 것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뜬금없는 사랑 얘기는 또 무엇이고.

혈통과 사랑. 리세트 앞에서 그것을 논한다는 건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요한 델피니움.

그 남자도 분명 요한을 염두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왜?

갑자기 건넨 이상한 질문과 손에 닿자마자 시들어 버린 꽃.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는 말. 그 남자가 남긴 모든 것들이 의문투성이였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수상쩍은 남자 때문에 머릿속도 마음도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지러웠다.

“리세트.”

요한은 여전히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아내를 다시 불렀다. 혼자 씻고 싶다며 욕실로 들어가더니 30분이 넘어가도록 리세트는 나오지 않았다.

설마 쓰러진 건가 싶어 급하게 욕실로 들어왔지만 리세트는 그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벌써 세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그마저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리세트.”

다시 한번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리세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세트 델피니움.”

가까이 다가가자 리세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 왜?”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미안. 못 들었어.”

“무슨 일이야.”

요한은 욕조에서 나온 리세트의 몸을 수건으로 감싸 주었다. 기다란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투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뺨에 남은 물기마저 닦아 주었을 때 리세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내가 널 몰라?”

집에 돌아온 후부터 리세트는 내내 다른 곳에 정신을 남겨 두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 원인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리세트를 제 실험의 도구로 이용할 생각뿐인 카에덴 델피니움일 것 같아 속이 탔다.

요한은 계속 시선을 피하려는 리세트의 뺨을 감싸 제게로 끌어왔다.

“말해.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숨기지 말고 말해.”

“……꼭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단정 짓네.”

언제나 맑은 빛이 스며들어 있던 눈망울에 지친 기색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고된 일을 겪어 더 이상의 희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눈. 요한이 알아 온 리세트의 눈이 아니었다.

손 안에 닿는 온기가 점차 식어 가는 걸 느낀 요한은 우선 리세트를 밖으로 이끌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꼼꼼히 수건으로 닦아 주는 동안 리세트는 잠옷을 입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만연하고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듯했다. 들뜬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재잘대던 입술도 꾹 다문 채였다. 침대에 앉혀 주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리세트는 이불을 끌어 올려 배를 덮었다. 요한은 그 옆에 앉아 이불 속으로 숨은 손을 찾아 쥐었다. 불안해서 자꾸만 온기를 갈구하듯 손바닥을 쓸어 보고 손등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리세트는 조금도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듯 앞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나날이 말라 가는 듯한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대 보고 뺨을 문질러 보아도 단 한 순간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 내던져진 것처럼 속이 바짝 말랐다.

요한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리세트를 불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물어보면, 대답은 해 주려고?”

“그래. 뭐든.”

완강한 거부, 혹은 불신. 뚜렷하게 느껴지는 전혀 달갑지 않은 시선에 요한은 조용히 한숨을 삼켜 냈다.

리세트가 쉽게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대답이 없는 리세트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요한은 봉긋하게 부푼 배를 감싸듯 만져 보았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한 행동이었다.

“아기를…….”

떨림이 느껴지는 리세트의 목소리가 오랜 침묵을 깨트렸다.

“좋아해?”

요한이 예상한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 전혀 그 범주에 넣어 보지도 못한 주제가 화두에 올랐다. 얼마간은 리세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기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리세트가 지칭하는 건 포괄적인 개념이 아닐 터였다. 그 남자와 리세트 사이에서 잉태되어 태어날 그 아기를 말하는 것이려나. 아마 그렇겠지.

요한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리세트의 불안감을 읽어 내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처럼 리세트도 많이 심란하고 불안했을 터였다. 지금도 그렇겠지. 리세트를 다시 만났을 때 이성을 잃고 질투에 미쳐 날뛰어 평소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말도 하였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더럽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비참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세트의 손을 놓는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꿈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 남자가 싫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찾아내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다. 하지만 리세트가 떠나지 않는다면 잊고 살아도 상관없는 존재일 뿐.

리세트의 아이는 그 남자의 피를 이어받은 것 말고는 접점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곁에서, 그를 아버지라 알고 그렇게 부르며 살아갈 테니.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아이의 탄생을 맞아 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스럽게 그리된 일이었다.

“리세트 너의 아이야. 내가 싫어할 리 없잖아.”

조금이라도 마음에 자리 잡은 근심과 불안을 덜어내길 바랐다. 그 마음이 진실해질수록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내 아이기도 해.”

천천히 떨구어지는 고개를 요한은 억지로 잡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붙잡은 손을 더욱 힘껏 움켜쥐며 진심을 전했다.

“너를 사랑하니까 아이도 사랑할 수 있어. 그거면 돼. 그러니 다른 걱정은 하지 마.”

그것이 요한의 가장 진실한 마음이었다.

❖ ❖ ❖

서재로 들어온 리세트는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품에 안고 온 책과 공책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낮에 못다 한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침실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데려다주겠다는 요한에게 혼자 가고 싶다 말했는데 다행히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핑계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바닥에 앉아 있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리세트는 간신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시야가 핑 돌았지만 그대로 멈추어 서서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 축축한 땀이 배어나는 손을 잠옷에 문질러 닦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 냈다.

공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리세트는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갖고 온 책을 펼쳐 독서대에 고정하고 그 앞에 공책과 펜을 나란히 놓았다. 그만하면 되었다는 판단이 선 후부터는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했다.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말을 요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 주었다.

그래서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오늘은 말하려고 했다. 노바르가 어떠한 것을 알아 온다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도 버겁고 힘들었지만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온 듯해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니 말했어야지.

말 한마디면 끝날 행복이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행복의 끝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 무서웠다. 다정하게 아이를 보아 주는 눈빛을 바라볼 때면 더더욱 그러했다.

망설이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그날, 거짓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속이지 말 걸 그랬다.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이 있지 않나. 금지된 마법 중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 시간으로, 요한을 다시 만났을 때로…… 아니, 공작저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요한과 집사의 말을 엿듣던 그때로 돌아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다.

너를 둘러싼 악질적인 소문이 신경 쓰이니 무어라도 얘기를 해 달라고, 너를 믿지만 무섭다고, 솔직히 물어봤어야 했다.

간절한 열망이 커져 갈수록 부질없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금지된 마법식을 한데 모아 둔 고서를 찾아볼까. 도서관 사서실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곳에서 단서를 찾아 책을 훔쳐 나오면 되지 않을까.

정신없이 이어지던 허무맹랑한 생각을 자른 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였다.

얼마간 눈만 깜빡거리던 리세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비로소 제정신을 찾았다.

“자, 잠깐만요!”

리세트는 허겁지겁 책상 위를 살폈다. 공부와 관련된 것 외에는 가져오지도 않았지만 괜한 걱정이 들어 책과 공책을 한 번씩 더 살펴보았다.

“들어오세요.”

집사인 줄 알았는데 요한이 찾아왔다.

“자고 있었던 거야?”

장난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리세트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펜을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제대로 공부하고 있었어. 찾아올 줄 몰라서, 그래서 놀란 거야.”

“알아.”

쟁반을 들고 온 요한은 보폭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평소였으면 당연히 옆으로 갔겠지만 이번에는 맞은편으로 갔다.

“먹으면서 해.”

리세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다 그를 다시 보았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다 되었는걸.”

“요즘 넌 이 시간만 되면 먹을 걸 찾거든.”

“내가?”

“거의 항상 그랬어. 집으로 돌아오기 한참 전부터.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이 시간이 되면 포도를 먹었거든.”

책상에 들고 온 것을 내려놓으며 요한은 리세트의 얼굴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눈물을 흘린 흔적은 보이지 않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요즘 넌 이만큼은 먹었어.”

“아…… 그래?”

접시에 가득 쌓인 쿠키를 본 리세트의 반응은 다소 싱거웠다.

그런 얼굴로 다급하게 서재로 향한 터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요한은 걱정되는 마음을 감추며 쿠키를 집어 들었다. 가장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것을 고를 때처럼 잼을 바르는 동작도 신중했다.

손에 묻을 정도로 듬뿍 잼을 바른 쿠키를 리세트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맛있게 먹고, 쉬어 가면서 해.”

요한은 그만 서재를 나서려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너무 힘들게 고민하지 마.”

잠시간 기다려 보았지만 리세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은 하등 어렵지 않았지만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막 했을 때였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던 요한을 붙잡은 건 리세트였다.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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