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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69)화 (69/151)

69화
죽어도 상관없어?

안온한 분위기가 감돌던 저택의 2층은 이제 전쟁터로 변모할 것이다.

로드니는 불어닥칠 폭풍을 예견해 2층의 사용인들을 전부 물렸다. 공작은 그마저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떠한 소란이 벌어지든 아무도 이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남기고서.

“오랜만이야.”

소파에 누워 있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동작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란 것 같네. 역시 애들은 잠시만 눈을 떼면 금방 자란다니까. 서운하네. 언제 이렇게 큰 거지?”

그는 속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영 인사치고는 너무 과한 것 같은데.”

불에 달군 칼날 같은 기세로 시퍼렇게 빛나는 마력은 그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소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온몸을 난도질할 것처럼 요동쳤다.

“이제 그만 마법진을 파훼하는 게 어떨까.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허세를 부리네.”

“네가 감히, 내 아내를 만나?”

“그렇게 얘기하니까 꼭 우리가 나쁜 짓이라도 하고 온 것 같잖아. 그저 나는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간 것뿐이고, 부인께서는 내 인사에 화답했을 뿐인데. 너무 자극적으로 몰아가는 것 아니야?”

“허튼수작을 부릴 거라면 당장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던 얼굴과 달리 오늘은 요한의 속마음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저토록 표출하다니. 그가 수년간 보아 온 요한 델피니움의 모습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꼭 이러려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주먹 쥔 손등에 올라온 핏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다소 거친 숨결. 그 모든 것을 느긋하게 살핀 카에덴 델피니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아, 이건 정말 사랑 같잖아?”

점점 농도가 짙어지는 마력이 거슬렸지만 그는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주기로 하였다. 그의 형을 꼭 닮은, 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저 얼굴이 불러다 준 즐거움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다니 신기하네. 그래서 나는 공의 진심 어린 사랑을 의심했지 뭐야.”

와락 구겨지는 미간을 본 그는 설렁설렁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참으로 딱하다는 듯이 한쪽 눈매를 찡그린 채였다.

“아내를 사랑하긴 하지만 아이를 더 사랑하나?”

“내 아내를 찾아간 이유를 말해.”

“네가 먼저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데, 내가 왜 그런 친절을 보여야 하지?”

요한의 마력이 점점 더 그의 주변으로 가까워져 왔다. 타 죽을 것 같은 열기 속에서도 카에덴 델피니움은 킥킥거리며 웃기만 했다.

더 이상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힘도 없이 결핍투성이가 된 놈이, 그 요한 델피니움이 사랑을 한다니.

수도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감정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하더라도 요한은 근본적으로 델피니움이었다. 그 피를 이어받은 녀석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리세트 델피니움을 만난 후에는 당연히 사랑이 아닐 거라 확신했고.

하지만 이런 요한의 모습을 보니…… 아마도 사랑이 맞는 듯했다. 기가 차지만 사랑 같았다. 저 얼굴이 드러내는 감정은 다른 무엇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예전 같았으면 답은 하나였을 터였다. 죽일 수 있겠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요한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처럼 형편없는 협박질이나 하며 겁을 주고 있는 것일 테고.

“그럼 죽여 봐.”

목을 조일 듯이 지척까지 다가온 마력은 그에게 닿기 전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행동은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요한 델피니움,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기라도 해?”

“내 아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 카에덴 델피니움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을 터 주는 파란빛의 마력 때문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고 요한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한참 고개를 숙여야만 눈을 맞출 수 있었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다니. 새삼스러운 감상에는 얼마쯤 감탄도 섞여 있었다.

“네 아내가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오면?”

“…….”

“그건 말리지 못하겠지?”

침묵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평생 어둠 속에서 숨어 살 것 같았던 놈이 이런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제 아이를 갖게 하다니. 게다가 그 상태로 방치하는 게 말이 되나.

의문을 품던 그의 뇌리에 흘려듣듯 넘긴 소문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임신했다. 유산을 했다더라. 영지로 요양을 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나중에는 크리프 후작저에서 지낸다더라. 그러더니 또 임신을 했다고 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가문의 영지에 그 여자가 없었던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소문들이 들려오던 때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첫 임신과 유산, 크리프 후작저를 촘촘히 연결해 보던 카에덴 델피니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여자가 죽어도 상관없어?”

마지막 확인을 위해, 그가 세운 가정에 확신을 얻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또 가족이 죽는 불상사가 생기면, 공께서 많이 힘들지 않을까? 나도 소중한 조카가 힘들어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거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너는 절대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겠지.

“내 연구에 관해서는 공께서도 너무 잘 아실 테니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고. 이제부터는 내가 공작 부인을 살펴 주도록 할까? 무사히 아이를 낳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 수 있게 도와줄게.”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이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너는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는 존재가 네 아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이런 헛똑똑이를 보았나.

“그래. 알겠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가볍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공작저를 나선 후부터는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세트 델피니움은 어째서 도망칠 결심을 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남편을 속이고 있는 걸까.

답은 하나였다. 요한이 아이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도망친 것이겠지.

그래야만 모든 사건이 하나로 연결된다.

도망쳤으니 요한의 마력과 멀어졌을 것이고, 지금처럼 온몸이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른 채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며 릴프랑 약초 따위와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기가 아비의 마력 대신 제 마력과 생명을 갉아먹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안타까워라.”

혼자서 불안에 떨고 있을 그 불쌍한 여자를 위해 그는 친절하게 덫을 깔아 둘 생각이었다. 절대 거절하지 못할, 아주 먹음직스러운 덫을.

❖ ❖ ❖

노바르는 결국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해 심란했다.

스승님의 말씀은 전부 옳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한 번 더 스승님의 입을 통해 확인받은 시간이었다. 마력의 흐름은 죽어 가는 도중에, 혹은 죽기 직전에 바뀌는 것이 맞다. 다른 선례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고, 죽음은 신의 영역이니 그것을 바꿀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셨다.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어 간절하게 스승님께 매달려 보았지만 노바르는 인정해야만 했다.

리세트 델피니움은 죽어 가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를 찾아온 건 까마득한 절망감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차라리 공작에게 진실을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두 사람에게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게 좋지는 않을지 고민했다. 더 이상 해결책이 없으면 리세트가 직접 밝힌다 하였으니 그가 나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노바르는 리세트의 말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던 사람인데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있을까. 이 일을 스스로 해결한 뒤 남편에게 알리고 싶다던 고집스러운 여자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상념이 길어져 아직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노바르의 어깨를 누군가 토닥여 주었다.

“스승님.”

“얘야, 노바르. 네가 정확히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 주지 않아 나도 참 궁금하지만 너에게도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

인자하게 웃어 준 그는 따듯한 차를 내어 주며 작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받아 든 노바르는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이건 뭔가요?”

“네가 궁금해하는 것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단다. 워낙 혼자 연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영지의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웬일로 올해 아카데미로 복귀한다고 하더구나.”

돌연 말을 멈춘 스승님은 허허,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정정해 주셨다.

“복귀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하긴 하구나. 애초 정식 연구원은 아니거든. 혼자 발표하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지고. 그러다 또다시 해괴한 실험들을 진행해 결과를 내 왔단다.”

“그런 분이 계신다니 놀랍네요. 급해서 그런데 혹시 그분께서 아카데미로 오시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와 있을 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노바르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종이를 펼쳤다. 별로 좋은 징조라 볼 수 없는 이름이 그 안에 적혀 있었다.

“……카에덴 델피니움?”

마지막 희망처럼 여겼던 그 종이에는 믿을 수 없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실 노바르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델피니움, 그 이름이 가져다준 당혹감이 너무도 커 말을 잇지 못했다.

“케서린 로티를 찾아가거라. 그 남자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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