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모르는구나
“누구세요?”
남자는 멍해져 있던 리세트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 꽂혀 있던 책을 빼냈다.
“이걸 찾아?”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목소리도 차갑고 낮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남자.
“아……. 감사합니다.”
책을 찾던 건 아니었지만 리세트는 손을 내밀었다. 아니라는 말을 골라낼 여력조차 없었다. 일단 책을 빌린 뒤 내일 다시 와 반납할 생각이었다.
“정말?”
“네?”
“아닌 것 같아서.”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리세트를 살피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내려가는 시선에서는 노골적인 호기심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 눈이 리세트의 배에 닿은 순간 그 감정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남자의 눈을 바라보던 리세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이제 리세트의 어깨로 옮겨 가 있었다.
“버린 건가?”
놀랍다는 듯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가방에 들어갈 크기는 아니니 버렸나 보네. 보기보다 매정하다. 나 상처받았어. 생전 누군가를 위해 그런 걸 준비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지 그는 리세트가 물어보기도 전에 화두를 돌렸다.
“자, 이건 선물.”
남자는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처음 보는 새빨간 꽃은 한눈에 보아도 반할 만큼 탐스럽고 예뻤다. 다만 그 색이 피처럼 붉어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너 주려고 가져온 거야. 그러니 받아.”
“…….”
“어서. 아아, 나 손 아파. 팔도 저리는 것 같아.”
겨우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으면서 엄살을 부리다니. 리세트가 거두어들인 손을 끝내 등 뒤로 감추자 남자는 들고 있던 책을 펼쳐 꽃을 꽂아 넣었다.
“생긴 건 유들유들 착하게 생겼는데 냉정하네. 선물 준 사람 성의를 눈앞에서 무시하고 말이야.”
“선물,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돼요.”
“싫어. 내가 주고 싶으니까 받아.”
그만 자리를 벗어나려던 리세트의 길목을 차단하며 그가 생긋 웃었다.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의 몸은 무척 컸다.
“열렬한 사랑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역시 착각이었나. 하긴 그 피를 이어받은 것들이 뭐 다 그렇겠지.”
남자는 리세트의 손에 그 책을 쥐여 주었다. 아니. 쥐여 주는 줄만 알았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남자는 바닥으로 책을 떨어트렸다.
“아, 실수.”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인데도 남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안 주울 거야? 사서한테 다 일러야지. 여기 책을 막 다루는 사람이 있다고.”
“저한테 왜 이러세요? 비켜 주세요.”
“저거 주워 주면 비킬게.”
선선히 물러설 기세는 아니었다.
소란이 일어났어도 주위가 조용한 걸 보면 지금 도서관에는 리세트와 눈앞에 이 이상한 남자, 단둘뿐인 듯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 사람을 자극해 보아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찡그린 눈을 내려 뜬 리세트는 결국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다시 책을 주워 들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 한 송이가 보였다.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준 꽃이.
버리고 싶었지만 이 남자는 처음부터 꽃을 주려고 했다. 책은 그걸 위한 수단일 뿐이겠지. 멀쩡히 눈 뜨고 속는 기분이 들었지만 리세트는 한숨을 내쉬며 그 꽃도 다시 주워 들었다.
“……어?”
리세트의 손이 닿은 순간 꽃이 시들어 버렸다. 붉은 잔해가 흩어지더니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
그 말이 끝이었다. 그는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 짧게 탄식한 남자가 다시 리세트에게 다가왔다. 느릿한 걸음이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찾으러 가는 듯한 여유로운 포식자의 모습 같았다.
점점 걸음을 물리던 리세트는 뒷등에 책장이 닿고서야 흠칫 놀랐다. 고개를 깊숙이 내려 리세트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생긋 웃었다.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꼭 살아 있어야 해.”
남자의 그림자가 완전히 문밖으로 사라졌다.
“뭐야……. 저런 사람이 아카데미에 있었나? 어떻게 한 번도 마주친 기억이 없지?”
한 번 스치듯 보기만 해도 쉽게 잊기 힘든 인상의 남자였다. 풍기는 기운 자체가 워낙 섬뜩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되는 남자. 그러다 문득 리세트는 떠올렸다. 남자의 눈동자를, 그 서늘한 눈매를.
그 남자의 눈동자는 요한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걸 리세트는 뒤늦게 깨달았다.
❖ ❖ ❖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경매장으로 모인 귀족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크리프 후작은 불참 의사를 밝혔으니 남은 건 한 사람뿐이었다. 델피니움 공작을 본 노년의 귀족들은 그에게 다가갔다.
“1년간 쉬겠다고 해 경매장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참으로 부지런하십니다.”
요한은 악수를 청하는 이들의 손을 가볍게 마주 잡는 것으로 인사에 화답했다.
“쉬는 것과 가문을 정비하는 건 다른 일이지요.”
“이런 것까지 선대 공작을 빼닮다니.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와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공은 태어날 때부터 훌륭한 가주의 재목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만 짧은 인사를 마무리 지은 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보이는 지정석에 앉았다.
그사이 가장 늦게 도착한 객을 맞이하느라 잠시 멈추었던 대화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저에게도 좀 양보해 주시지요.”
“어허, 이 사람 좀 보게. 전운이 감돌고 있는 판국에 양보라니. 각자 살길을 모색해도 바쁜데 양보가 말이 되나.”
“전운이라니요. 우리의 기우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굳이 양보를 운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경께서는 편히 마음 놓고 경매를 즐기시게.”
“미리 대비를 하자는 것 아닙니까.”
이런 대화의 양상은 경매장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요한은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귀족 몇몇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중앙에서 밀려난 자들까지 기를 쓰고 오늘 열린 경매에 참석한 듯했다.
살상용 무기가 경매 품목으로 대거 올라온다는 걸 듣고 몸이 달았겠지. 이러다 다시 전쟁이라도 발발하는 날에는 제 몸 하나는 지켜야 할 테니.
“모두 착석해 주시지요.”
경매의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요한은 주변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열띤 경매를 이어 가는 귀족들은 어제의 동지도 오늘의 적으로 간주하며 언성 높여 싸웠다. 목에 핏대를 세우지를 않나, 눈에 실핏줄까지 올라올 정도로 치열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금 진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가 경고를 주듯 경매봉을 탕, 내려쳐 보아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도무지 품위와 절제를 중시한다는 귀족들답지 않은 행태였다.
이번 임무에 차출된 인원들의 명단을 받아 보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싸우는 자들은 파견을 갈 인원. 평정을 유지하는 자들은 이번 임무에서 제외되었으니 속 편하게 앉아 곧 이어질 예술품 쪽 진행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사만 골드.”
노기로 달아오른 경매장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손쉽게 싸움판을 정리한 요한은 곁에 온 안내자가 건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소란을 마무리 지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질 좋은 무기를 매입하는 건 가주로서 늘 해 오던 일이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 뒤에 나올 각종 무기도 내구성이 꽤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를 대신해 임무에 나갈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양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얼마 전 가문의 무기고에 지난 경매에서 대거 낙찰받은 살상용 무기와 방어구를 구비해 두었다. 1년 정도는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양이니 괜히 짐을 늘릴 필요도 없고,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크리프 가문도 지난 경매 때 제일 재미를 보았으니 구미가 당기지도 않겠지.
곁에서 대기하던 수행인은 낙찰받은 물건을 확인하러 자리를 떠났다. 눈인사를 건네는 귀족들에게 짧게 목례를 한 뒤 요한은 그만 밖으로 나왔다.
“주, 주인님!”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지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 남자를 알아본 요한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붙인 감시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표적이 마님께 접근했습니다!”
❖ ❖ ❖
“가을이 오려나 봐.”
한 하녀가 화초의 잎사귀를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러게 바람이 조금 선선해졌어.”
로비의 화분들을 관리하고 있는 그녀들은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다. 잎사귀에 맺혀 있던 이슬 같은 물방울이 말라 갈 무렵에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주인님이 오시려면 멀었으니 또 손님이 찾아오신 건가 싶었다. 로비에 모여 있던 사용인들은 하던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
“……주인님?”
저택으로 들어오는 공작의 분위기가 마치 누군가를 죽이고 온 듯해 사용인들은 흠칫거리며 물러섰다. 주방에서 나오던 로드니는 이른 귀환 소식에 놀라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카에덴 델피니움을 잡아 와.”
그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공작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명령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는 동작에서도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 엿보였다. 결코 좋은 징조라 할 수 없었다.
“저…… 주인님.”
잠시 눈치를 살핀 로드니는 조심스럽게 공작을 불렀다. 하지만 공작은 그 부름에 답을 하는 대신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이기만 하면 상관없어. 당장 끌고 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잇지 못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드니는 그 명을 받드는 대신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그런 수고로운 일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작이 찾고 있는 그 남자는 잡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벌써 와 계십니다.”
이미 제 발로, 저택의 문을 사뿐히 넘어와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공작과는 전혀 다른, 아주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