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전부 소용없는 짓
조용하게 걸어가던 노바르는 잠시 멈추어 섰다. 슬금슬금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여자와 분한 얼굴로 눈물을 참아 내던 소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때도 너를 도와줄 기회는 많았는데. 겨우 이런 말 몇 마디면 충분했던 건데.
“뭐 해요. 안 갈 거예요?”
어린 날 저지른 바보 같은 짓을 후회하고 있는 사이 리세트가 웃으며 몸을 돌려 세웠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 때리던 그 소녀를 닮아 있었다.
“아니요.”
노바르는 다시 리세트 곁으로 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예약한 실습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사람은 빠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열쇠는 관리자와 해당 실습실을 빌린 인원이 아니면 소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누군가 억지로 문을 열어 본 게 틀림없었다.
“제가 밖으로 갈게요. 로슈만 경은 안을 살펴 줘요.”
“잠깐만요!”
노바르는 달려 나가려는 리세트의 가방끈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움직임이 돌연 저지당하자 리세트가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았다.
“부인, 안에서 기다리세요.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로슈만 경보다는 제가 훨씬 빨라요.”
“그건 그렇지만 부인께서는 홑몸도 아니시잖아요. 일단 실습실부터 함께 확인한 후에 제가 건물 주변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리세트가 영 못 미더워하는 눈빛이라 노바르의 목소리가 제법 커졌다.
“달려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흙 속에 묻어 버리겠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묻는 건 자신 있어요.”
“알겠어요. 그럼 빨리 가요.”
실습실 안은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 그대로였다. 어제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찬찬히 둘러본 리세트의 눈길이 책상 위에 놓인 꽃으로 향했다. 어제와 유일하게 다른 건 저 꽃다발이 전부였다.
리세트는 빨간 장미꽃 사이에 꽂혀 있는 편지를 빼어 들어 펼쳐 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노바르도 함께 보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 아닙니까?”
너무 황당해 말을 잃은 리세트를 대신해 그가 불쑥 말했다.
“결혼하신 분께 어떻게 이런 편지를…….”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보게 될 날만을 얼마나 고대하였는지 모른다는 말로 시작을 연 편지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가관이었다.
무서운 방해꾼의 눈을 피하느라 늦어졌다니. 편지에 적힌 방해꾼의 정체야 뻔하다. 요한을 말하는 것이겠지.
“우리 연구를 염탐하려는 사람도 아니니 그만 우리 일이나 해요.”
“이대로 넘어간다고요? 이런 수상쩍은 일을, 부인께서요?”
“왜요?”
“꺼림칙하잖아요. 직접 전해 주면 될 걸 굳이 문까지 억지로 열고 들어와 꽃다발 하나만 남겨 두다니. 게다가 이 문, 열쇠 구멍을 만지지도 않고 그냥 부순 거잖아요. 하는 짓을 보나 이 편지를 보나 제정신인 놈이 아니에요.”
“제정신이 아니니 또 오지 않을까요?”
반문하는 목소리는 태연하다 못해 얼마쯤은 재미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또 오면 잡아서 물어볼게요. 아마 내가 찾기 전에 우리 남편이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 같지만.”
노바르는 그제야 요한 델피니움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래. 괜한 걱정이었다. 마력이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곤 하나 리세트는 여전히 강하고, 요한 델피니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대담하게 이런 짓을 벌인 멍청한 자의 명복을 빌어 준다면 또 모를까.
“먼저 준비하고 계세요. 금방 오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노바르는 실습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공작의 사람을 찾으며 혹시 모르는 수상한 자도 있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 외에 외부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리세트 하리펜에게 밀려나 차석으로 강등된 노바르 로슈만, 안녕? 오늘도 너희 조가 3구역이야?”
같은 수업을 듣는 한 동기생이 손을 번쩍 들어 알은체를 했다.
“응. 너희는?”
“우리는 5구역. 대체 3구역은 어떻게 잡는 거야? 제일 좋은 위치라 빌리기 쉽지 않을 텐데.”
“잠을 줄이면 가능하지.”
“하여튼 지겹다, 지겨워. 가만 보면 너나 리세트 하리펜이나 참 독종들이시지. 독하다, 독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손을 휘저으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실습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제외하면 별다른 이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노바르는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몸은 좀 어떠신…….”
실습실로 다시 돌아온 노바르는 눈앞에 보이는 아찔한 광경에 이마를 짚었다. 리세트가 릴프랑 약초를 통째로 씹어 먹고 있었다. 약으로 만든 것도 아닌, 저 쓴 것을 뿌리째로.
“부인의 미각은 살아 있습니까?”
도저히 묻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아니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 같아요.”
“릴프랑을 그런 식으로 먹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생식을 할 때 효과가 더 좋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먹으면 너무 힘들잖아요.”
리세트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빨리 원래대로 마력을 되돌리고 싶어요. 아기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니 이만한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럼 마력을 한번 확인해 볼까요?”
리세트는 잎사귀에서 묻어난 짙은 초록색 물을 툭툭 털어 낸 손에 천천히 마력을 모았다. 깨끗한 은빛의 마력은 더 환한 빛줄기와 함께 모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금씩 아쉬움이 남았던 부분까지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마력을 점점 더 많이 모을수록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흐름도 농도도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가슴속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했다. 기쁨인 것도 같고, 안도인 것도 같았다.
어찌 되었든 아기는 무사할 거다. 나 또한 아무런 문제없이 아기를 안을 수 있겠지. 요한의 옆에서, 소중한 내 남편의 곁에서.
미소 짓던 리세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진 건 심각하게 굳어 가는 노바르의 표정을 발견했을 때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부인의 마력에서 델피니움가의 마력이 느껴져요.”
“그게, 무슨…….”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부인께서도 잘 아시지요?”
치유 마법을 받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그 마법을 전개해 준 사람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사례였다.
하지만 델피니움가의 마력은 전투 계열,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일컬어지는 불의 힘을 가졌다. 요한이 리세트를 공격하지 않는 한 그의 마력이 리세트에게 흘러 들어올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면 리세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였다.
요한의 마력에 닿는 그 순간 죽었을 테니까.
“아기 때문일까요?”
노바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태어날 아기의 마력을 그토록 쉽게 판별할 수 있었다면 많은 귀족 가문이 그리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기의 마력이 모체를 통해 발현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델피니움가라서 그런 걸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지.
고심하던 그는 힘겹게 입매를 당겨 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가 리세트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정말 나한테서 요한의 마력이 느껴져요?”
“…….”
“제발 말해 줘요!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말을 하던 리세트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노바르도 흠칫 놀랐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리세트는 멍하니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익숙하다. 이 온기도, 빛도, 감각조차도.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의 계열 자체를 판별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손 안에 모인 게 정말 내 마력인가?
벅찬 희망으로 두근거렸던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리세트 주변으로 파란색으로 물든 은빛의 마력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 ❖ ❖
노바르는 자신의 연구를 도와주는 스승님을 찾아가 자문을 구해 보겠다고 했다.
도서관 건물까지 데려다준 그가 급하게 자리를 뜨고 나서야 리세트는 비로소 억눌린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옅은 온기가 묻어나는 바람이 불어왔지만 몸에서는 한기가 퍼지는 듯했다.
리세트는 더듬더듬 배와 목을 쓰다듬던 손을 옮겨 잘게 떨리는 팔을 연신 문질렀다. 분주했던 손은 소중하게 배를 감싸 안았다.
릴프랑 약초를 먹은 뒤로는 천천히 본래의 마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리세트뿐만 아니라 노바르까지 확언해 준 일이었다. 그래서 방금 눈으로 확인한 그 마력의 빛깔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각인되었다. 은빛을 압도하던 그 색이, 요한을 닮은 빛이.
직감적으로나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끌어서도 안 된다는 걸. 그렇다면 요한에게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 그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텐데.
다른 곳에 정신을 두고 온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리세트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터벅터벅 둔탁한 발걸음 소리조차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요즘에는 부탁하지 않아도 요한이 먼저 배를 만져 주고는 했다.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기에게 말을 건네주기도 했지. 자기 아이라는 걸 모르니까, 그래서 가능한 일이겠지.
‘어서 엄마가 음식다운 걸 좀 먹었으면 좋겠어. 너도 포도만 먹으면 질릴 것 같은데, 아니야?’
짓궂게 놀리며 웃는 얼굴도 다시는 못 보겠지.
‘잘 자. 우리 내일 만나자.’
다정하게 저녁 인사를 건네주는 일도 이제는 없겠지. 요한의 아이라는 걸 알면 다시는, 이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절대 보지 못할 모습일 것이다.
해결할 수는 있나. 요한도 못 한 걸, 내가?
습관처럼 귀족 가문의 역사서가 진열된 곳으로 향한 리세트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은 책장에 빼곡하게 채워진 이 많은 책들을 전부 다 읽어 보았다.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발견할까 싶어서.
천 개에 다다르는 마법식을 만들어 내고 델피니움 가문을 포함한 다른 귀족 가문까지 빠짐없이 조사했다. 릴프랑 약초를 먹으며 마력의 농도를 매일같이 점검하기도 했다. 결국 그 모든 게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속삭이듯 말한 리세트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녕.”
리세트의 몸을 전부 덮어 버린 그림자의 주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