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66)화 (66/151)

66화
그 여자가 죽기 전에

으슥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 안에 아스라한 불빛 하나가 번졌다.

은색 촛대를 들고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기다란 책상 앞에 다다라서야 멈추어 섰다.

새까만 열매가 맺힌 작은 나뭇가지. 피처럼 붉은 잎사귀를 가진 고목의 뿌리. 그리고 릴프랑 약초.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갖가지 약초들을 툭툭 건드리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답장을 보내지 않네. 건방지게.

릴프랑 약초의 잎사귀를 뜯어 손으로 지분거리던 남자의 시선이 먼 하늘 저편으로 향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 밤을 닮은 눈이 번뜩였다.

요한 델피니움, 시간이 없을 텐데 괜찮겠어?

남자의 반대편 손에는 오늘 도착한 서류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가볍게 종이를 팔랑거리자 촛불이 흔들렸다.

“심심해. 계속 지켜보고 있으려니 슬슬 지겹네.”

그리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쉽게 죽어 버리면 곤란하단 말이야.

그 여자가 완성시켜 줄 내 소중한 연구가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남으면 안 되잖아.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니 말이야. 델피니움가의 후계를 가진 여자가 그토록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다니. 말도 안 되게 이상한 일이라 걷잡을 수 없이 궁금증이 치솟았다.

서류를 촛불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금세 불이 옮겨붙었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빛이 미소 짓는 입가에 고였다. 남자는 한숨 쉬듯 투덜거렸다.

“건방진 어린놈이 괜한 고집을 피워서 내 시간만 아깝게 되었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제 아버지를 닮았단 말이지.”

바로 다음 달부터 새 연구를 시작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의 한 부분이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케서린 로티, 그 여자도 관심을 보였던 연구라 구미가 당겼는데 아쉽게 되었다.

그래도 이쪽이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이니 그리 큰 손해는 아니지.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연구쯤이야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고, 이쪽은 이번이 아니면 영영 못 할 수도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제법 잘 버티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버티려나.

아. 신기하다는 듯 감탄한 그의 눈초리가 예리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그 여자.

살아 있는 기적이라 불리는 리세트 하리펜. 정말 기적일까? 그래서 지금껏 살아남은 건가.

[아카데미 신입 수석 연구원, 카에덴 델피니움.]

불길은 그 이름이 쓰여 있는 서류의 끝부분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요한이 답장을 보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리세트 델피니움부터 만나러 갈 수밖에. 그 여자가 죽기 전에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말이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가볍게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밟아 나갔다. 목적지는 수도의 아카데미, 리세트 델피니움이 있을 바로 그곳이었다.

❖ ❖ ❖

방학 학기를 신청한 심화 과정의 학생들 모두가 분주하게 달려 나갔다. 그들 틈에는 오늘을 손꼽아 기다린 리세트 델피니움 또한 함께였다.

“이 녀석들! 선배가 된 사람들이 버젓이 뿔난 망아지처럼 이 신성한 교정을 뛰어다니다니!”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한 선생님이 뛰어가는 학생들을 보며 뒷목을 잡았다. 옆에 서 있던 동료 선생은 허허, 호탕하게 웃어 넘겼다.

“왜 그러십니까. 아직도 성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걸 보니 기특하기만 한걸요.”

“기특해? 대체 누가? 설마 저 녀석들을 말하는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지금 저 애들 말고 달리기를 하는 애들은 없는걸요. 졸업을 하고서도 공부에 뜻이 있어 온 애들이니 얼마나 예뻐요.”

“아직 저 나이대 애들을 가르쳐 보지 않아서 단단히 환상을 품은 것 같군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동료의 기대를 깨부수기로 마음먹었다.

“저 녀석들은 낙제생이 되었느냐의 유무가 궁금해 달려가는 겁니다. 자네 말대로 성적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시험을 그딴 식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세상에……. 그 정도란 말이에요?”

“다음 학기에 한번 직접 채점해 보세요. 꼭! 그래야 저 녀석들의 실체를 알게 되겠지. 어중간하게 배운 지식으로 어찌나 고집만 세졌는지 몰라. 수업을 하다 보면 길가에 널린 돌멩이와 말을 주고받는 게 낫겠다 싶다니까.”

일부러 들으라며 크게 외치는 말에도 학생들은 아랑곳 않고 달려갔다. 잘 닦인 바닥 위로 우르르, 마치 경주마가 몰려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비록 동기생들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리세트는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중간에 끼어들면 분명 이리저리 치일 게 뻔해 의도적으로 뒤를 따라갔다. 몸이 무거워져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더위가 한풀 꺾였는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리세트는 손등으로 땀을 훔쳐 내며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공작저를 나서기 전 요한이 직접 단정하게 묶어 준 리본의 한쪽이 풀려 뺨을 찰싹 때렸다. 대강 모양새를 가다듬느라 멈추어 섰던 리세트는 부지런히 동기생들을 뒤따라갔다. 고르게 내뱉던 숨결이 조금 흐트러졌다.

옛날에는 언제나 달리기 1등이었는데.

성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게시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리세트는 가빠진 숨결을 후후 뱉으며 인파를 파고들었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물결 맨 앞으로 비집고 들어간 리세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게시판에 붙은 긴 종이의 가장 위, 찬란한 그 자리를 차지한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좋네. 아주 좋아. 훌륭해!

수석, 리세트 델피니움. 이 이름을 보자 모든 피곤과 짜증, 오늘 본 새로운 선생님의 허무맹랑한 경험담은 금세 잊혀졌다.

“아가, 봤지? 엄마가 수석이야.”

소곤소곤 아기에게 자랑을 하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물씬 밀려들었다. 낙제생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아쉽게도 큰 소리로 알려 주지는 못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어서 요한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수석 했으니까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당당하게 말해야지.

일주일 동안 업무차 저택을 비우는 일도 없었던 요한이니 아마 며칠 동안은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무척이나 바쁠 터였다. 파견 임무가 없는 것이지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을 테고.

그럼 다음 주쯤은 괜찮을까? 추워지기 전에 먹고 싶으니 역시 다음 주가 좋겠다는 생각을 막 했을 때였다.

“축하드립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노바르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리세트는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만 보면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가 1등으로 도착했다고 생각할 법했다. 하지만 리세트는 이곳까지 뛰듯이 걸어오면서도 그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곧 리세트의 머릿속에 잊고 지내던 어떠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노바르 로슈만이 3등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 체력 시험 꼴찌. 그중에서도 달리기 실력이 아주 처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인을 보면 언제나 깜짝 놀라곤 합니다. 임신한 몸으로 수석까지 하실 줄은 몰랐는데 제 오판이군요. 조금 좀스러워 보이지만 내심 이번에는 부인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아쉽네요.”

그는 허탈해 보이는 한숨을 흘리며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치켜세워 주는 말은 언제든 듣기 좋은 법이었다. 리세트는 그런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지만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냥 크게 웃으시지요?”

“그럴까요?”

맑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리세트는 키득거리며 승리를 만끽했다.

“로슈만 경도 차석이네요. 축하드려요.”

이제는 진심으로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미운 정이 들어 버린 걸까. 어쩌면 어렸을 때 친해지고 싶었던 동기라서 그런 것일지도.

괜히 게시판을 한 번 더 쳐다보다가 먼저 손을 내밀자 노바르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안심하지는 마세요. 심화 과정이 끝나기 전에 제가 꼭 한 번은 수석에 이름을 올릴 테니까요.”

“이런. 로슈만 경, 꿈이 너무 크신 것 같아요.”

“점수를 따지고 보면 우리는 15점밖에 차이가 안 납니다.”

“15점이면 많은 거 아닌가.”

“하긴. 인정합니다.”

서로의 성적을 축하해 주고 답안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미리 빌려 둔 실습실로 향했다.

노바르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오던 동기생들은 리세트를 발견하면 그대로 모른 척 지나갔다. 개중에는 굳이 리세트를 무시하며 인사를 해 오는 무리도 있었다.

“역시 노바르, 너는 진짜 대단한 녀석이야.”

“맞아. 이번에는 안타깝게 차석이더라.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네.”

노바르는 한 걸음씩 앞서가기 시작한 리세트를 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올라가고 싶은데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네.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점수 차가 꽤 많이 나거든.”

거슬리는 고아를 치켜세우는 듯한 말에 그들은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런가? 하지만 너는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래. 노바르 네가 우리의 희망이다. 알지?”

노바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동기생들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여 주었다.

“희망은 각자 찾자. 비록 너희 점수는 절망적이겠지만 노력하면 될 거야. 힘내. 다음에는 꼭 낙제생은 벗어나야지.”

“그러면 모르는 문제 좀 가르쳐 줄래? 너한테 배우면 금방 실력이 오를 것 같아.”

“모르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실력이 느는 거야. 잘 해결해 봐.”

“하지만 저 여자는…….”

리세트를 가리키는 동기생의 눈짓을 읽어 낸 노바르는 생긋 웃었다.

“내가 부인께 배우는 입장이라.”

웃으며 건네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라 더욱 그랬다.

공부에 미쳐 있을 뿐이지 노바르는 품위와 절제를 아는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게다가 평소 노바르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은 괜한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고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이상한 기분이 불쑥 치솟았지만 설마 그 노바르 로슈만이 고아의 편을 들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노바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리세트를 발견했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꽤나 만족스러운 듯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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