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마지막
리세트가 곁에 없었던 시간은 지독할 정도로 더디게 흘렀는데, 간절히 붙잡아 두고 싶은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졌다.
미소 짓는 리세트,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리세트, 다시 찾은 이플로 상점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또 길에서 엉엉 울어 버린 리세트. 소중한 나의 아내, 리세트 델피니움. 일주일간 누린 달콤한 평온은 그 사랑스러운 여자의 기억을 남긴 채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에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겠다던 그의 아내는 오전에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커튼을 친 요한은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눈을 맞추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오늘 낮에는 아기를 위해 산 물건들이 저택으로 옮겨졌다. 하인들을 시켜 정리하자던 요한의 의견은 리세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상점에서 본 물건들이 제대로 다 도착했는지, 어느 곳이 망가지거나 손상된 부분은 없는지 리세트는 꼼꼼하게 살피고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종종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저녁도 못 먹고 잠들어 버린 것이겠지.
요한은 조금 어두워 보이는 듯한 눈 밑을 손끝으로 매만져 보았다.
잠이 많아진 리세트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증상이야 임신 과정의 일부분이니 특별히 이상할 건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자는 것치고 눈 밑에 드리운 그림자는 옅어지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오히려 더욱 짙어진 듯했다. 몸도 조금 더 야윈 것 같고.
침대에 몸을 누인 요한은 가냘프기만 한 어깨를 감싸듯 매만졌다.
“벌써 내일이네.”
무어라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리세트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이스크림 못 먹고 아카데미로 가도 괜찮겠어?”
요한은 한쪽 팔로 턱을 괴어 누운 채로 리세트의 입술을 문질렀다.
“꿈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
이번에는 배시시 웃는다.
“꿈속에서까지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먹게 해 줄걸.”
리세트는 잠들었고 그러니 자신의 말을 들을 리 없겠지만 요한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계속 말을 붙였다.
“그래도 이제는 집에서 다닐 테니까 시간은 많잖아. 네가 바쁘지 않은 날에 꼭 같이 먹으러 가자. 나는 언제든 좋아.”
사과의 키스를 건네며 요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품에 안고 있던 아내를 놓아주는 손길에서 진득한 미련이 묻어났다.
리세트와 함께 고른 아기의 물건의 일부가 막 저택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한 시간째였다. 워낙 많은 양을 구입한 탓에 주인이 혼동해 몇몇 물건들을 이제야 보낸 것이었다.
리세트가 깨어나면 함께 보려고 했지만 미리 확인해 두는 편이 나을 듯했다. 아무래도 또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편하게 쉬었으면 싶었다.
“조금만 더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요한은 그만 침실을 떠났다.
소리 없이 열린 문이 스르르 닫히고 침실을 밝힌 파란 불빛은 조금 더 늘어났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지만 마치 강풍에 휩쓸리듯 갑작스럽게 촛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따듯한 파란빛이 일렁거리던 침실에 어느 순간 하나둘 불빛이 사라졌다.
❖ ❖ ❖
사용인들이 미리 밝혀 놓은 촛불의 그림자만 남은 공간에서 리세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속눈썹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가물가물한 눈을 끔뻑거리며 리세트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의 온기가, 단단하고 넓은 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늘 등 뒤에 닿아 있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리세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요한?”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는 건 지금 이 침실에는 리세트 홀로 남았다는 뜻이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앉은 리세트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어디선가 요한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살펴야 했다.
불꽃을 틔워 놓은 촛대와 빈 책상 앞, 꼼꼼하게 닫아 둔 커튼까지 훑어본 후에야 리세트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푹신한 신발에 발을 꿰고 일어섰다.
진종일 열심히 움직여 몸이 조금 무거운 듯했는데 지금은 아주 가벼웠다. 아무런 걱정 없이 잠을 푹 잔 덕분인 것 같았다. 가슴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리세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러 약초가 담긴 유리병을 살피던 눈길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노바르 로슈만이 준 릴프랑 약초로 만든 약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예전부터 특이한 약초를 모아 약으로 만들어 둔 덕에 그가 준 약병을 수월하게 숨길 수 있었다. 한 번은 약병을 찾다 요한에게 들켰는데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요한이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 줄 알았지만 주변에서 그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끌어내 줘서 생각 외로 약 시간을 놓치지는 않았다.
리세트는 틈틈이 시간이 생길 때마다 최대한 규칙적으로 약을 먹었다. 그가 당부한 대로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제시간에 복용했으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요한이 자리를 비우면 저도 어찌할 수 없는 서운함이 불쑥 튀어나오다가도 릴프랑 약초만 생각하면 정말 잘된 일이라며 안도하곤 했다.
눈을 질끈 내리감은 리세트는 양손으로 꽉 움켜쥔 유리병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목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역시나 좋지 않았지만 잘 참고 삼켜 냈다. 조금 쓰라린 속을 달래려 물을 마시자 알싸한 맛이 남아 있던 혀가 빳빳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떫고, 쓰고, 시고. 세상의 온갖 맛없는 것은 죄다 모아 놓은 듯한 맛이었다. 이런 맛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정말 최악이야.”
이 끔찍한 맛을 조그만 어린애들도 참고 견딘다 하니 리세트도 꾹 참아 냈다. 아기를 위해서. 그 생각을 하면 이런 작은 고통쯤이야 하찮게 여겨졌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 말 한 마디면 못 할 것이 없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이 펴질 무렵에 손바닥 가득 마력을 모았다.
전보다는 훨씬 본래 흐름에 가까워진 것 같은데 아직 완전히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 외에는 마력의 빛깔이나 농도는 예전으로 돌아왔다.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요한에게 말해 줄 날도 머지않았겠지.
거짓말을 한 걸 밝힐 생각만 하면 뱃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리세트는 밝은 목소리로 아기에게 말을 걸며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 냈다.
“엄마가 이 맛없는 걸 열심히 먹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맛없고 괴로워도 조금만 참아. 알겠지? 나중에 속이 좀 편해지면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챙겨 먹을게.”
리세트는 황금빛이 일렁거리는 촛불들 사이에서 익숙한 빛 하나를 발견했다. 요한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선명하고 예쁜 파란색의 촛불이었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아빠한테 바쁜 일이 생긴 걸까? 평소에는 더 많이 불을 밝혀 주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세트는 오랫동안 그 불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약도 다 먹었으니까 아빠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너도 그렇지?”
요한이 쉬고 싶다 말한 게 문득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고도 조금도 쉬지 못했으니 많이 지쳤겠구나. 가주가 짊어진 무게감을 감히 헤아려 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그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는 삶이란 어떤 기분일까.
그동안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긴 시간 휴가를 주시는 것이겠지. 큰일은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이 기회에 요한을 쉬게 하는 게 이롭겠다는 판단을 하셨을 수도.
요한에게 과하게 의지하는 귀족들의 얼굴이 불쑥 하나씩 기억났다. 리세트는 떠오르는 그 얼굴들을 일렁이는 불빛 속으로 밀어 넣어 없애 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네를 믿네. 기운을 북돋아 주듯 요한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요한을 가장 위험한 구역으로 보냈다.
전투 계열의 특성상 요한이 선봉에 서야 한다는 건 리세트도 잘 알고 있어 처음에는 참았다. 하지만 참아 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에도 요한은 언제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장 위험한 격전지로 보내졌다.
리세트는 토벌 전쟁 때의 일을 세세하게 떠올리다 고개를 털어 냈다.
아기는 어떤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게 될까. 누구를 닮았을까. 지금은 자고 있으려나.
일부러 다른 생각들을 끌어오며 리세트는 부드럽게 배를 감싸 안았다. 요한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주제를 혼자 생각해 보는 사이에 문이 열렸다.
“어디 다녀온 거야?”
“아이 물건이 다 도착했다고 해서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요한은 성큼 걸어가 리세트 곁에 섰다.
“깨어나기 전에 오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자고 있지.”
네가 곁에 없어서 깼나 봐.
간지러운 그 말을 삼키며 리세트는 살며시 요한의 어깨에 기대어 섰다. 응석을 부리듯 뺨을 문지르자 요한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선사하는 온기가 좋았다.
“휴식의 마지막 밤이니까 하늘 구경하고 싶어. 나랑 같이 갈래, 요한?”
요한은 채근하듯 제 손을 잡고 흔드는 리세트를 안아 들어 창가로 향했다.
“기꺼이.”
거창하게 마지막 밤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리세트가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둘이서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으니. 앞으로도 이런 날이 계속 이어지겠지. 영원히,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역시 공작저에서 보는 하늘이 제일 예쁜 것 같아.”
“오늘은 보름달이네.”
“보름달이라 하늘이 더 예쁜가 봐. 너는 어때, 요한?”
“뭐가?”
“아카데미에서 보는 거랑 공작저에서 보는 거. 어느 쪽 밤하늘이 더 예뻐?”
너와 함께 보는 하늘. 그렇게 답하면 리세트는 분명 수작 부리는 사람을 보듯이 눈을 찌푸리겠지.
도대체 너는, 어째서 그 말을 믿지 않는 걸까. 나에게는 전부 똑같은 하늘일 뿐인데. 네가 있어야만 다른 하늘이 되는 건데. 왜 듣기 좋은 거짓말만 하느냐며 혀를 찰까.
“집에서 보는 거.”
“그래?”
별들이 반짝이는 어두운 하늘을 담던 눈길이 그를 향했다.
달빛이 스며든 얼굴이 문득 차가워 보여 요한은 리세트의 뺨을 감쌌다. 온기를 나누어 주듯 조심스럽게 입 맞추었다. 희미한 열감이 묻어나는 이마에, 웃음을 담고 있는 입술에, 어느덧 붉어진 두 뺨에 차례대로.
평온한 마지막 밤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