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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64)화 (64/151)

64화
악몽

달콤한 디저트로 배를 가득 채운 후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한은 이불 고치 옆에 리세트를 누여 보며 장난을 치고, 그러다 베개로 흠씬 맞아 등을 순순히 내어 주기도 했다.

어찌나 손속에 자비가 없었는지 모른다. 리세트가 베개 안에 슬쩍 책을 넣는 걸 보고 급하게 빼앗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

낮잠을 잘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잠이 들어 버린 듯했다.

깊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지속되어 요한은 금세 깨달았다. 지금 이곳은 꿈이라는 걸. 이미 겪은 일이니 알아차리기도 쉬웠다.

하필이면 이런 꿈이라니.

요한이 보고 있는 광경은 전장의 한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다.

리세트가 맡은 진영의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대열을 이탈했다. 그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앞을 막아선 것들을 모조리 도륙하며 달려갔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끔찍한 일이었다. 리세트가 죽었을까.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꿈으로 되살아났다.

피비린내와 괴물들의 울음소리, 얼굴로 쏟아지는 뜨거운 피와 살점, 후방을 지원하며 달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과 거칠게 내뱉어지는 숨결마저도 기억 속의 한 부분이 고스란히 재현된 것만 같았다.

리세트가 무사하다는 걸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처음으로 입어 본 전투복이 아주 멋진 것 같다며 애써 환하게 웃던 리세트의 얼굴을 떠올리는 제 모습도 마찬가지. 전부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가지 마력을 지닌 리세트의 로브에는 각 계열의 문양을 겹쳐 놓은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모를 수가 없었다. 달려가는 그에게로 불어온 바람이 가져다주었던 그 로브를 잡아챘던 순간의 기억까지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는 꿈이었다.

이 모든 감각이 이처럼 현실감 있게 일어나다니.

악몽에서 깨어날 방법이 없었다. 요한의 의지를 배반하고 몸이 제멋대로, 기억을 따라 움직였다.

아니. 스스로 제어할 수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아무리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더라도 리세트가 무사한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꿈이든 현실이든 요한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요한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 뒤에 벌어지는 일은 머지않아 지나간다. 절벽이 무너져 내렸지만 리세트는 무사히 대피한 상태이고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제 일을 잘해 냈다. 팀원들을 모두 구하고 방어선을 다시 구축해 후방을 지원하고. 놀라울 정도로 활약했다.

일련의 기억을 되살리듯 요한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리세트의 로브를, 찢겨져 피가 묻은 그 로브를 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결혼식을 올린다. 행복하게 잘 살아가겠지. 잠시 어긋나겠지만 나는 다시 너를 찾아낼 테고. 계속, 앞으로 함께 살아가는 나날들이 펼쳐진다.

그러니 두렵지 않아.

주저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요한은 하늘까지 뒤덮을 정도로 치솟은 흙먼지를 헤쳐 나갔다. 점점 거세지던 심장 박동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이제 이것만 벗어나면 앞을 가리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곧 리세트를 보게 될 터였다.

전투복은 넝마가 되어 찢겨져 있겠지. 리세트는 주저앉아 다친 몸을 스스로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말끔하게 치유한 뒤에야 달려오는 너를, 나는 힘껏 끌어안겠지.

마침내 시린 겨울 하늘의 빛이 눈가에 맺혔을 때였다.

꿈의 기억이 끊겼다. 당장 달려가서 리세트를 안아야 하는데 요한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추어 섰다.

이상하다.

모든 게 기억 속 그대로 펼쳐지던 꿈의 내용이 바뀌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리세트가 맞는데. 그래야 하는데…….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시체와 몬스터들의 사체에 둘러싸인 리세트가 보였다. 쓰러져 있는, 피로 뒤덮인 그 여자를 향해 요한은 비틀거리며 뛰어갔다.

“리세트!”

꿈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던 몸이 그제야 뜻대로 움직였다.

“리세트, 일어나. 어서!”

싸늘하게 식어 버린 몸이 품속에서 맥없이 허물어졌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처럼. 요한은 피가 새어 나오는 상처를 더듬다 로브를 찢어 동여맸다. 지혈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부상당한 인원이 있다. 누구든 좋아. 빨리, 제발 빨리 이리 와!”

외치듯 누군가를 찾아 헤맸지만 요한의 목소리는 동굴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메아리쳐 울리기만 했다.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도 지천에 깔려 있던 죽은 자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처를 힘주어 눌렀지만 요한의 손 틈새로 뜨거운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리세트!”

그 외침과 동시에 요한이 바라보던 풍경이 바뀌었다. 낯익은 침실의 천장. 포근한 이불. 옆 사람의 온기. 고개를 돌려 리세트의 모습을 확인한 요한의 입술 새로 거칠어진 숨이 터져 나왔다.

함부로 만지기 겁나 요한은 오래도록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에 떨림이 일었다. 널뛰고 있는 호흡을 간신히 진정시킨 요한은 리세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현실이다. 지금 이 모습, 이 장소, 이 온기가.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의 뺨을 쓸어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힘주어 말아 쥔 채로 다시 거두어들였다.

마음은 빠르게 본래의 궤도를 찾아갔다. 괜찮다. 그저 나쁜 꿈을 꾼 것뿐이니.

그사이 리세트가 몸을 뒤척여 이불 밖으로 빠져나갔다. 요한은 등을 돌린 채로 잠이 든 리세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불을 다시 덮어 주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배가 조금 차가운 것 같아. 아주 조금인데, 네가 만져 주면 금방 따듯해지거든.’

요즘 리세트가 자기 전에 넌지시 하는 말이 떠올라 요한은 봉긋한 모양새가 나오는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의 떨림이 차츰 가시고 있었다. 어느새 요한은 제법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리세트의 배를 어루만졌다.

겨우 이런 행위로, 우습게도 불안감이 지워졌다. 무엇보다 아이의 존재가 현실감을 일깨워 주어 그런 듯했다. 늪 같은 꿈에서 완전히 벗어난 요한은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리세트의 배를 감쌌다.

“아가.”

처음으로 불러 보았다.

“너도 지금은 엄마처럼 잠들어 있을까.”

어째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음이었지만 요한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리세트의 아이에게 말을 건네주었다.

“네가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겠어.”

❖ ❖ ❖

욕실로 들어선 요한의 품에는 리세트가 폭 안겨 있었다. 버둥거리는 가녀린 몸을 더욱 힘주어 안은 채 요한은 그대로 욕조에 들어왔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리세트, 계속 도망갈 거야?”

“누가? 내가?”

“그래, 너.”

물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리세트는 슬금슬금 배를 감싸 안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 리세트는 도망가고 요한은 따라와 붙잡고. 숨바꼭질 같은 놀이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난 리세트는 제 몸을 구석구석 만지고 있는 요한을 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바로 후회하고 말았지만.

아무리 부부라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썩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종종 그러기도 했으니 이상할 건 전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만져 볼까 하던 마음이 바뀐 건 요한의 손길이 지나오는 모든 곳이 얼마 전까지 흉터가 있던 부분이라는 걸 알았을 때였다.

아니겠지.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해 한동안 가만히 있었지만 리세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요한이 만지는 부분은 전부 지난번 쓰러졌을 때 생긴 상처가 있던 곳이 맞았다. 탁한 보랏빛 멍 자국과 손톱자국이 덮여 있던 새하얀 몸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지금도 요한은 상처가 있던 부위를 가만가만 짚어 나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목 언저리를 스쳐 갈 때 리세트가 강하게 손목을 붙잡았다.

“상처 없어.”

“알아.”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곳만 만져 봐?

“혹시 모르잖아. 하나라도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요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없어. 내가 다 지웠어.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봤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

“그래도.”

쇄골과 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한참이나 매만지던 손길이 가는 손목으로 내려갔다.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손목을 주무르듯 만지던 손으로 요한은 천천히 리세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어 힘을 실어 잡았다.

리세트는 자유로운 손으로 붙잡힌 손에 얽혀 있는 요한의 손등을 슥슥 문질렀다.

요한은 고개를 내려 어깨에 툭 기댔다. 당연히 느껴져야 할 무게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요한은 그저 가만히, 이마를 댄 채로 힘을 싣지 않고 머물렀다.

“흉 하나도 없지? 봐, 내 실력 녹슬지 않았지?”

젠체하며 턱을 까닥여 보았지만 요한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리세트를 품에 당겨 안았다.

“꿈을 꿨어. 악몽이었는데…… 네가 죽었어.”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리세트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잠시 입술을 여닫다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죽이다니. 엄청 강한 사람인가 봐. 누구였어? 설마 노바르 로슈만은 아니지?”

아쉽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노력한 듯했다.

웃음은커녕 요한은 조금도 말을 받아 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농담으로 말을 돌리려던 리세트는 마음을 바꾸어 몸을 돌려 앉았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 요한의 눈시울에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

“이 바보를 어쩌면 좋지.”

핀잔하듯 탄식한 리세트는 요한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며 힘껏 안아 주었다. 물에 젖은 매끄러운 몸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내 몸은 내가 치유할 수 있잖아. 마력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우리 둘 중 누군가 죽는 꿈을 꾼다면 무서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요한. 너는 나와 다르게 스스로 상처를 낫게 할 수 없잖아.”

리세트는 안심하라는 듯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마. 나야말로 네가 임무에 나갈 때마다 얼마나 마음 졸이는데.”

어린아이를 위로하듯 넓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악몽이 잘못했네. 아주 질이 나쁜 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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