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듣지 못한 말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요한이 아트반의 이름을 거론한 그 순간부터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리세트의 머릿속을 차지했던 고민이었다.
이제 말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제대로 할까.
많은 고민이 지나간 끝에 일단은 사과부터 하기로 정했다. 그러다가도 아직 요한을 속이고 있으니 이것 또한 기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고민을 아우른 시간의 끝에서 리세트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요한, 나 좋아하지?”
“사랑해.”
걱정으로 소란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을 만지작거리자 바스락바스락 간지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내가 나중에 좀 큰 잘못을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어?”
이미 잘못은 저질렀고 지금도 이어져 가고 있지만 물어보았다.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알고 있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다시 또 나를 떠나는 것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
요한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리세트를 옥죄듯 끌어안고 있는 손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쓰러져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도 간절하게 전해 주고 싶었던 진심이 툭 튀어나온 건 리세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랑해.”
본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다. 잠에 들기 전에도, 함께 식사를 하고 눈을 맞출 때도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해 본 말이기도 했다.
경직되어 있던 요한의 어깨가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리세트는 장난을 치듯 요한의 가슴 부근에 이마를 문질렀다. 얇은 옷감 사이로 느껴지는 체온이 포근했다.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따스한 품속에서 리세트의 뇌리에 불현듯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민거리가 떠올랐다.
이러다 꽃이 다 뭉개지는 건 아닐까.
너무 좋은 것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슬쩍 꽃다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계속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 시간을 깨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꽃다발만 빼내는 방법을 찾고 있을 때였다.
“못 들었어.”
얌전히 안겨 있던 리세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뺨이며 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예쁜 얼굴이 보였다.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을 장식한 꽃들보다도 요한의 얼굴이 훨씬 붉어져 있었다.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리세트.”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리세트는 특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저 얼굴을 혼자 독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므로.
“사랑해.”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또박또박 제대로 말하려고 했다. 갑자기 요한이 고개를 누르며 품에 가두지만 않았더라도 멀쩡하게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못 들었어.”
사랑해. 다시 한번, 그리고 꽤 여러 번. 요한의 몸에 파묻힌 탓에 목소리가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웃음이 실린 목소리가 웅얼웅얼 이어지는 동안 요한은 리세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들거나 시선을 슬쩍 올려 보려고 하면 어김없이 커다란 손이 다가와 리세트의 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얼굴을 보며 놀리고 싶었지만 리세트는 까르르 웃으며 얌전히 품에 안겨 주었다. 싱그러운 장미꽃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언제쯤 들린다고 얘기하려나. 이 예쁜 거짓말쟁이.
❖ ❖ ❖
리세트는 우그러진 포장지를 조심조심 벗겨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꽃잎이 포장지와 뒤엉켜 잘못하다가는 꽃이 다 망가져 버릴 듯했다.
“포기하세요, 마님. 그 꽃은 회생 불가예요. 욕조에 뿌려 드릴 테니 저한테 주세요.”
화병에 물을 받아 온 메이는 이미 틀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리세트는 하나씩 천천히 꽃의 상태를 살핀 후 선선히 꽃다발을 넘겼다. 제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꽃이 하나도 없었다.
새하얀 티 테이블 위로 풀썩 엎드린 리세트의 고개가 저택을 향해 슬그머니 돌아갔다. 포도주스가 담긴 기다란 유리잔 하나와 향긋한 차의 향기가 올라오는 찻잔, 그리고 다시 저택을 살펴본 눈동자 속에 요한의 모습은 담기지 않았다.
요한이 사라진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다 리세트는 다시 저택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모처럼 낮의 시간에 맞이하는 자유였지만 리세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원래부터 예정된 만남은 아니었는지 요한은 귀족들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화가 많이 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메이가 막 차를 내오던 무렵에 벌어진 일이었다. 리세트는 혼자 남아 주스 잔을 만지다가 조금씩 아껴 마셨다.
“무슨 일인데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주인님이 뭘요?”
혼잣말에 가까운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메이가 꽃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며 반문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아서.”
“매일 그 얼굴이신데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마님이 보지 못하는 모습이 많다는 생각은 안 하시지요? 주인님 얼굴은 원래 저러세요.”
다시 꽃잎을 다듬던 메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님, 대체 방금 주인님의 모습 어디에서 화가 나셨다는 걸 아신 거예요? 마님과 함께 계실 때는 항상 웃고 계시잖아요. 방금도 그랬고요. 분명 마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나 무시무시한 얼굴로 돌아가셨을 텐데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질 않았어.”
“아니었는데요? 아주 활짝 웃고 계시던데.”
“나만 볼 수 있는 게 있어. 그거 가짜 웃음이야.”
별걸 다 아시는군요.
메이가 보았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잘나기는 한 얼굴이었다. 마님과 있을 때는 웃고, 마님이 없을 때는 그저 메마른 표정. 가짜 웃음이 있으면 진짜 웃음도 있다는 건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슬아슬하게 부부의 애정 행각에 당하지 않은 꽃잎을 톡 뜯어내던 메이는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은 임신을 하신 상태이니 임무에 차출되지는 않으시겠지요?”
“임무라니?”
의아한 듯한 목소리에 메이는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 나리들이 저택을 방문하는 걸 보아 꽤 심각한 사안이라 짐작했다. 그러니 당연히 마님께서도 알고 계실 줄 알았고.
급한 일이라면 마님께서도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저러한 걱정을 한 탓에 참지 못하고 물은 대가가 메이를 덮쳐 왔다.
“자세히 말해 봐, 메이.”
메이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세트를 보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귀족들이 아직까지 마님께 별말 하지 않았던 이유를. 주인님의 철저한 함구가 뒷받침되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별건 아니구요.”
하하하, 일부러 호탕하게 웃어 보았지만 리세트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지는 일에 일조할 뿐이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말해 줘. 부탁이야.”
손까지 꼭 잡아 오는 리세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메이는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씩 얘기해 주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그렇지만 확실하게 들은 건 있어요. 저택으로 찾아온 귀족 분들이 주인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엄청 노력하고 계신 것 같아요. 주인님은 안 가겠다 하시고, 그분들은 주인님을 이번 임무에 책임자로 보내고 싶어 하세요.”
❖ ❖ ❖
흘러가는 단 일 초의 시간도 아까운데 생산성 하나 없는 대화에 시간을 허비해야 하다니.
“델피니움 공, 제발 한 번만 더 들어 보시게!”
눈물이 통하질 않으니 겁박을,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 이제는 회유책을 제시했다. 이번 파견 임무를 잘해 내면 2년의 시간을 주겠다고. 기가 막힌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얼간이들을 뒤로한 채 요한은 정원으로 향했다.
꽃 내음이 코에 스미자 사나웠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꽃에 둘러싸인 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포크로 푹 찔러 케이크를 괴롭히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리세트에게 다가가던 요한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토록 고대하던 케이크일 텐데 리세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도 맛이 없어?”
요한은 리세트가 들고 있던 포크를 가져가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았다. 달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 건포도가 씹히지 않으니 리세트도 만족할 줄 알았는데. 덜 달아서 그런 건가.
“맛있어.”
힘없이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요한은 리세트 옆에 앉았다.
“더 달았으면 좋겠어?”
“아니야. 충분히 달아.”
“그런데 왜 안 먹었어.”
직접 포크로 떠 주었더니 리세트는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말 그대로 음식을 씹기 위해 의무적으로 씹어 삼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도저히 맛있는 걸 먹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바쁘면 일하러 가도 돼.”
“안 바빠.”
방금까지도 속을 긁어 댔던 머저리들의 얼굴이 시무룩한 아내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보기 거북한 잔상을 치워 내듯 눈매를 찡그린 요한은 설득력 없어 보이는 변명을 그만 멈추었다.
“지난번 임무가 마지막이야.”
“어떤 임무?”
“몬스터들의 유해 작업을 위해 떠났던 임무.”
리세트가 사라지기 바로 직전에 책임자로 간 마지막 임무였다. 그 후에 리세트를 찾기 위해 제국 영토를 순회하느라 크고 작은 임무를 도맡아 했지만 요한은 굳이 그런 일까지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하는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 1년간 임무를 위해 떠날 일은 없어. 이미 오래전에 승인받은 일이고,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해도 가지 않을 거야.”
“1년이라니. 그게 가능해? 어떻게?”
“내가 그만큼 시간과 돈을 벌어다 주었으니까.”
요한은 비워진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옮겨 담았다. 작게 잘라 입가에 대 주었는데 이번에는 리세트의 입술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많이 위험한 일이었어?”
이 순간, 이토록 걱정하는 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를 살피는 리세트가 좋았다. 요한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리세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지만 요한은 굳이 걱정을 덜어 주지는 않았다. 조금만, 이대로 두고 싶었다.
“1년 확실한 거지? 정말이지?”
조그맣게 미소를 그려 내던 리세트의 얼굴이 또다시 심각해졌다.
“그런데 왜 하필 1년이야?”
네가 아이를 낳고 몸을 회복하기까지 대략적으로 잡은 시간. 그걸 알려 주는 대신 요한은 쪽, 보드라운 뺨에 가벼운 소리를 남겼다.
“그냥. 쉬고 싶어서.”
리세트는 입술을 열어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꼭꼭 씹어 먹던 입술에 서서히 미소가 차올랐다.
“우와, 진짜 맛있다. 너도 먹어 봐.”
아이처럼 방긋 웃는 얼굴에 요한은 그만 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