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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62)화 (62/151)

62화
편지가 데려다준 곳

리세트는 없지만 리세트의 마음을 담은 편지가 그를 맞아 주었다. 편지는 다정한 인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요한?

나는 덕분에 잘 잤어.

배는 하나도 안 아프고 몸도 아주 가벼워. 게다가 아직도 배가 따듯해서 기분이 정말 좋아. 이것도 다 네 덕분이야. 나 때문에 잠을 못 잤을까 봐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고마워.

네가 오면 같이 가려고 했는데 곧 해가 뜰 것 같아. 아기방에서 해가 뜨는 걸 한 번은 확인하고 싶어서 나 먼저 가 있을게.

내가 보고 싶으면 그곳으로 와.]

갈 곳 잃은 발걸음에 목적지를 정해 준 편지를 곱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침대에서 멀어지던 요한은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이불을 문득 돌아보았다.

저건 왜 만든 거지? 저 위에 곱게 포개어 놓은 베개는 또 뭐고.

무슨 이유로 저런 걸 만들었는지 유추해 보다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쾌하고 밝은 웃음소리였다. 이불을 원래대로 풀까 하다가 요한은 이만 몸을 돌렸다.

제 몸집을 잘 아는지 크기까지 똑같은 이불 고치를 만들고 사라진 리세트를 한번 그 옆에 눕혀 보고 싶었다. 아마 부정하겠지. 자신은 그것보다는 크다며 열변을 토할 터였다. 어쩌면 평소와 달리 울거나 화를 낼 수도.

감정 기복이 부쩍 심해진 아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요한은 하녀들에게 침대는 치우지 말라는 지시를 남기고 리세트를 찾으러 갔다.

❖ ❖ ❖

창문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내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상자에도, 자그마한 침대 위에도 그 빛이 내려앉았다. 느릿하게 방 안을 살핀 요한의 눈길은 다시 한번 천천히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 움직였다.

햇살에 물든 방 안 어디에서도 리세트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어렸을 때 자주 하던 숨바꼭질을 재연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커튼까지 흔들어 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커튼을 한곳에 치우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텅 비어 있던 침대 위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요한은 침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설마 또 이불로 만든 고치인가 싶었다. 침대가 작으니 저렇게 작게 뭉쳐 둘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겼다. 가까이 갈수록 사물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손을 잡은 것처럼 꼭 붙어 있는 작은 곰 인형 두 개. 그리고 그 곰 인형들의 보송보송한 손 사이에 편지가.

요한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가져갔다. 그 움직임 때문에 멀어진 두 인형을 다시 꼭 붙여 주고 편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배가 고파 주방으로 간다는, 오래 기다린 건 아니니 천천히 오라는 편지였다.

요한은 이 편지도 다시 반듯하게 접어 재킷 주머니 안에 넣었다.

벌써 두 개. 리세트의 편지를 따라가면 또 다른 편지를 받아 보게 되었다. 침실에서 이곳으로, 그리고 이제는 주방으로. 리세트가 남긴 다정한 자취를 요한은 차분히 따라갔다.

리세트는 왜 편지를 남겼을까.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반추해 보았다. 걱정과 염려이려나. 그 속에는 애정 또한 있겠지. 침실에서 리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편지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면 지금 이 기다림이 훨씬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이나.

식당으로 들어선 요한은 이변이 없는 한 이번에는 리세트를 보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띈 건 비어 있는 접시와 유리잔이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면 리세트뿐이고, 더군다나 빈 접시에는 갈색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다.

보나마나 쿠키겠지. 보랏빛 액체가 조금 남아 있는 유리잔은 포도주스가 담겨 있었을 테고. 어찌 되었든 식사를 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요한은 잔을 들어 올려 한번 가볍게 돌려 보았다. 냄새를 맡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와인이 아닌 주스, 리세트가 지겹도록 마시는 그 포도주스가 틀림없었다. 최근에는 물보다도 포도주스를 더 찾곤 했으니.

또 다른 편지를 찾아 식탁 위를 배회하던 요한의 눈길이 옮겨 간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주방장이 침울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섬세하고 정갈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그 손은 드물게 칼이 아닌 종이를 쥐고 있었다.

편지를 전해 줄 사람까지 나올 줄이야.

요한은 주방장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피식거리며 편지를 읽어 가고 있을 때 아직도 떠나가지 않은 주방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님께서 케이크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던가요? 맛이 많이 없었던 건지 걱정이 되어서요.”

깔끔하게 비워진 쿠키 접시를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행복에 겨워 춤을 추기 직전이었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멎게 한 건 연이어 들어오는 거대한 접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바로 그 케이크였다.

요새 들어 마님께서 단맛에 길들여지신 것 같아 건포도를 아낌없이 넣었다. 일반 포도보다 몇 배로 달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는데.

“다음번에는 일반 포도로만 만들어.”

힘이 빠진 듯한 주방장의 모습에 요한은 적절한 충고를 해 주었다.

“일반 포도요?”

“건조한 거 말고. 아무래도 그 식감과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런!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주인님. 다음번에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번 맛을 보았는데 초콜릿과 포도의 궁합이 썩 나쁘지 않았으니 최고의 맛을 재현해 보이겠습니다.”

열의를 불태우는 주방장의 노고를 치하하듯 요한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 주며 편지를 마저 읽었다.

“언제 식당을 나갔지?”

“주인님께서 들어오시기 거의 직전에 나가셨습니다.”

초콜릿. 포도. 마님. 영감을 받았는지 주방장은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편지를 챙겨 넣으며 발걸음을 돌렸던 요한은 잠시 뒤를 돌아 그에게 눈짓했다.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다.

“조금만 덜 달게 만들어.”

“마님께서는 더 달아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거기서 더?”

그렇지 않아도 내심 마님의 건강을 염려하던 주방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눈감아 주신다면 조금 덜 달게 만들어 볼까요? 마님께서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교묘하게 설탕을 조절해 보겠습니다.”

이 일을 제 사명처럼 여기는 주방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한은 기꺼이 공범이 되어 주겠다는 눈짓으로 동의를 표한 뒤 식당을 나섰다.

침실에서부터 이어진 발걸음은 아기의 방과 식당을 지나 마침내 정원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하늘하늘 불어온 바람결에 달콤한 향기가 실려 왔다. 그 바람을 타고 은빛 머리 타래가 춤을 추듯 살랑거렸다.

“리세트.”

이른 아침부터 깜찍한 일을 벌인 아내가 뒷짐을 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늦여름에 피어난 장미로 가꾼 정원에 리세트가 있었다. 이제 막 꽃망울을 틔운 분홍색 장미꽃으로 이루어진 화단을, 그리고 다시 아내를 두 눈 가득 담아 본 요한은 천천히 다가갔다.

등 뒤에 무언가를 숨겨 놓은 듯한 모양새였지만 굳이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으니.

“안녕, 리세트.”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네주자 리세트는 골똘히 그를 보다 미소 지어 주었다.

“안녕, 요한.”

인사와 함께 선물이 불쑥 내밀어졌다. 분홍색 장미로 만든 꽃다발을 든 리세트의 뺨이 마치 이 꽃을 닮은 듯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너는 항상 주기만 했잖아.”

잠시 말을 멈추었던 리세트는 흘깃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나는 받기만 하고.”

“너는 그래도 돼.”

꽃다발을 쥐고 있는 두 손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에 요한은 피식 웃으며 조금 더 다가갔다. 이제 한 뼘. 조금만 더 가면 리세트의 발끝에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남겨 둔 채로 멈추어 섰다.

“이 집도,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전부 다 요한, 네가 준 거잖아.”

네가 얼마나 많은 걸 나에게 주고 있는지 모르는구나.

전해 주고 싶은 많은 말들이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리세트의 말이 더 이어질 것 같아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이대로 가만히 듣고 싶었다.

“나는 기껏해야 아이스크림이나 먹을 것만 사 주고.”

말을 하다 보니 민망해져 리세트는 조금 창피했다. 그동안 받은 게 너무 많았다. 받기만 한 게 문제였다.

“네가 해 준 게 왜 없어.”

“없잖아.”

“생일 선물, 매년 챙겼잖아.”

“내가 살 수 있는 물건 중에서는 제일 좋은 걸 골랐지만, 사실 너한테는 필요도 없는 물건이잖아. 더 좋은 걸 너는 많이 갖고 있으니까.”

만년필. 예복에 달 금장 단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푸른 빛깔의 원석.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 액운도 다 피해 간다는 은반지. 꽃과 케이크. 하나하나 의미가 깃들어 있던 선물이었다.

좋은 글을 쓰라고, 그 옷을 입을 때는 행복만 따라오라고,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오라고,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그 마음을 모으고 모아 선물해 준 소중한 물건들이었지만 요한이 준 선물에 비하면 작고 초라해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갑작스럽게 준비한 이 꽃다발 역시 정원에서 구했으니 깊게 따지고 보면 요한의 것이나 다름없지만 리세트는 애써 양심을 미뤄 두었다.

꽃 한 송이 없는 삭막한 정원이 이토록 아름답게 탈바꿈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약속했던 날, 정원을 꽃으로 꾸며도 되느냐고 물었던 리세트의 말 덕분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소유권을 주장해도 괜찮지 않을까.

“너도 알지? 나 전쟁 영웅이 되었잖아.”

말을 한 마디씩 더해 갈수록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리세트는 준비한 말을 차분하게 꺼냈다.

“그러니까, 갖고 싶은 거 말해 봐.”

“전쟁 영웅이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요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포상금 많이 받았잖아. 정말 좋은 걸 사 주고 싶었는데 고민만 하다 보니 지금까지 못 사 줬어. 너무 늦어 미안해.”

말이 없어진 요한을 향해 리세트는 살며시 미소를 띠며 장난스레 채근했다.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게 아니에요, 공작님. 준다고 할 때 어서 받아 가세요. 제가 조금 더 속물이 되면 값비싼 선물을 안 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요한은 어떠한 말도 내어놓지 않았다. 리세트는 더 보채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위 공작 가문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선물은 무엇일까.

포상금에 맞는 적절한 선물을 찾느라 요한이 깊게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저 심각한 얼굴은 그 때문이라고 리세트가 막 생각할 무렵이었다.

“너.”

한참 만에야 입술을 뗀 요한이 마지막 간격을 좁혀 리세트를 끌어안았다.

“난 너만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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