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불 사람
잘했다. 수고했다.
형식적인 인사를 끝낸 선생님이 떠나가자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리세트가 달려왔다. 아트반 크리프 쪽으로도 시선이 향했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리세트의 눈길은 금방 요한에게 돌아왔다.
‘잘 다녀왔어, 요한? 다친 곳은 없지?’
세심하게 살펴 가는 눈길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첫 실전 실습이라 긴장도 많이 했을 텐데 피곤하겠다. 바로 기숙사에 갈 거지? 수업 빠져도 되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수업에 목숨을 거는 모범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더욱 좋았다. 리세트가 그토록 사랑하는 공부와 책, 수업보다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방어 계열의 선생님을 흘긋 본 요한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 듯한 눈짓을 보내오는 아트반 크리프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소중한 시간에 굳이 저 녀석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가만히 서 있는 그의 팔을 리세트가 잡아끌었다. 엉성하게 붕대가 묶여 있는,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버린 팔뚝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요한이 갑자기 멈추어 서자 리세트의 발걸음도 우뚝 멈추었다.
리세트가 놀라지 않게 얘기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먼발치서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아트반 크리프가 갑자기 달려와 요한의 계획을 처참하게 망가트렸다.
‘리세트! 얘 좀, 요한을 빨리 치유해 줘. 이대로 놔두면 죽는단 말이야!’
기회를 봐 저놈을 일찍이 처리했어야 했는데.
괜히 구해 주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사색이 된 리세트의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르는 걸 본 순간 기가 막히게도 아트반 크리프를 향한 분노가 흩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요한이 죽는다니?’
‘지금 네가 잡고 있는 그 팔, 거기를 좀 크게 다쳤거든. 독이 꽤 많이 퍼져 있을 거야. 이 멍청이가 글쎄, 이상한 핑계를……!’
더 이상 말이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아 요한은 아트반 크리프의 입을 막아 옆으로 치웠다. 놈이 다시 입을 열기 전, 이탈자를 잡으러 온 선생님이 아트반 크리프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가 주위가 조용해졌다.
허둥지둥 몸 곳곳을 살펴보던 리세트가 재킷의 허리선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그를 나무 뒤로 이끌었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을 요한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재킷을 벗겨 낸 리세트의 손길이 피로 얼룩진 새하얀 셔츠 위를 배회했다.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리세트의 얼굴을 보며 셔츠를 벗었다.
검붉은 피가 스며든 붕대에서 악취가 풍겼다. 손목 바로 위부터 어깨까지 칭칭 감아 놓은 붕대는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이걸 리세트에게 보여 주어도 괜찮은가 걱정이 앞섰다. 리세트에게 피와 상처는 부모님을 떠올리게 할 테니.
그런 걱정이 다 무색하게도 리세트는 곧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법 능숙하게 마력을 운용하는 모습에 요한은 꽤 놀랐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실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리세트는 아직 실전은 고사하고 실습 시간도 가지지 않은 풋내기 마법사이지 않나.
상처는 천천히, 느리지만 꼼꼼하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받아 본 치유 마법과는 결이 달랐다. 이토록 부드러운 감각이 온몸을 휘감듯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했다. 마치 리세트가 꼭 안아 주는 그 작고 따스한 품처럼.
얼마간은 마법에 집중하느라 리세트가 그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한은 곧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알았다. 리세트는 오직 한 곳, 상처가 아물고 있는 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리세트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떨어져 있던 매일 밤, 매시간마다 보고 싶었던 여자가 눈앞에 있었지만 요한은 억지로 시선을 끌어올 수가 없었다.
마침내 상처가 다 아물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리세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너희 조에도 치유 마법사가 있을 것 아니야. 없다고 해도 다른 조에는 있었을 거 아니야. 왜, 이런 상태로 버텼어? 아무도 너를 치유해 주기 싫대? 진짜 못된 사람들이야. 다 나쁜 사람들이야.’
눈을 맞추지는 않으면서 리세트는 쉬지 않고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잠긴 채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선생님들한테 다 이를 거야. 네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은 그 선배들, 실습 점수 다 망쳐 놓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방금까지도 상처가 있던 부위에 툭, 눈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점점 늘어 가는 눈물은 이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이렇게 상처가 벌어질 동안 왜 참았어? 동기생들이 너를 무시하면 선생님들한테라도 갔어야지!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해!’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리세트의 뺨을 감싸 시선을 끌어왔다.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인 리세트가 이제는 소리 높여 울었다. 품에 안아 달래 주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요한에게는 나쁜 습관이 생겨 버렸다.
리세트가 우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다시 만나 친구라는 이름에 묶이게 되었을 때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눈물만은 달랐다.
좋았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그 사람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인 건 변함없는 사실인데도 그랬다.
‘다쳤어? 많이 다친 거야? 괜찮아? 지금은 어때, 아파?’
그의 피가 아닌 몬스터의 피가 묻은 교복 재킷을 들고 갔을 때도.
‘아프겠다. 이런 작은 상처가 오히려 신경 쓰일 때도 많잖아. 어서 고개 좀 숙여 봐. 치유해 줄게.’
나뭇가지에 긁혀 뺨에 생긴 작은 상처에도 리세트는 마음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상처를 본 리세트가 울고, 나중에는 화를 낼 때는 마치 이 세상에 단둘만 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참견하는 걸 좋아하는 아트반 크리프가 곁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 시끄러운 놈의 목소리마저 기꺼이 넘어가 줄 만큼이나 좋았다.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가면 칭찬을 잔뜩 퍼부어 주며 끌어안아 주는 그 작은 품이 미치도록 좋았다.
리세트가 잠결에 뒤척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조금 더 꼭 붙어 오는 리세트의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평온한 밤이 시작되려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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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지나가는 하늘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목까지 꼼꼼히 덮어 놓은 이불이 갑갑해 리세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갈피를 못 잡아 휘적거리는 팔로 이불을 끌어 내리며 눈을 떴다.
조그맣게 밝혀 놓은 불빛 몇 개만 남은 침실은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황금빛과 파란 불꽃이 피워 낸 그림자는 마치 새벽의 하늘을 닮은 듯 보였다.
당연한 듯이 꼭 붙어 있어야 할 품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리세트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천천히 몸을 돌려 누웠다.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반쯤 열어 둔 창문 틈새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리세트는 살며시 시선을 들었다. 옆으로 모아 묶어 둔 커튼이 그 바람을 따라 팔랑거리고 있었다. 요한은 창틀에 앉아 있지도, 책상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침실 안에는 그가 없었다.
무릎에 무언가 닿는 감촉과 곧이어 바스락,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건 리세트가 막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무릎 아래에 깔린 분홍색 종이는 편지였다. 반으로 반듯하게 접은 그 편지를 펼쳐 보는 리세트의 눈동자는 잠기운이 다 날아가 버렸다.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이 편지를 보기 전에 돌아오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남겨 둔다는 말로 편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편지의 말미에 눈길이 다다랐을 때 리세트는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와 펜을 발견한 눈동자에 웃음이 번졌다. 서둘러 일어나 리세트는 이불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이불과 베개를 만지작대며 원하는 모습으로 만든 뒤 침대를 떠났다.
요한이 돌아오기 전까지 빠르게 준비를 마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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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사람들이 보낸 편지는 역시나 영양가 없는 말로 채워져 있었다.
이걸 꼭 읽어야 하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은 꼼꼼히 읽어 두었다. 혹시 그놈들이 허튼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만 서재를 나선 요한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발걸음 소리를 일부러 죽여 인기척을 지웠다. 아직 이른 아침의 시간, 분명 리세트는 잠들어 있을 테니.
밟아 내려가는 계단 위로 고른 숨을 내쉬는 아내의 얼굴과 그 얼굴을 감상할 기회를 앗아 간 놈들의 몰골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 제국의 귀족이라는 자들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몬스터들이 수많은 시간을 걸쳐 진화할 기회를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그자들이었다. 자본이 구시대의 산물과도 같은 계급 질서를 흔들기 시작할 무렵 몬스터 무대가 형성되었고, 소규모 전쟁이 제국 각지에서 발발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몬스터들은 골치 아픈 존재인 동시에 그들이 속한 사회의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 주는 보물과도 같았다. 그 안일한 생각으로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몬스터들을 일부러 풀어 주었고 작금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지.
이제 몬스터들은 투박하고 힘만 센 고대의 생물이 아니었다. 진화를 거듭하는 건 인간뿐이라는 오만한 생각은 몬스터들의 발판이 되었다. 인간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체 조건에 지능까지 생기니 처리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선조들은 이제 후대의 활약에 기대어 자리를 유지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하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들 손에 판세가 놀아난다고 생각해 훈련을 게을리한 탓에 변변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진화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유지라도 했어야지.
제논의 귀족들은 퇴보한 채로 썩어 가고 있었다. 몇몇 가문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 이 제국은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무렵에 요한은 침실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향기와 익숙한 모습이다. 그래서 약간의 차이점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곤히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그 위에 베개까지 쌓아 두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일까.
“거기서 뭐 해?”
대답이 없는 리세트를 향해 요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침대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침대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렸다.
이 이불 누에고치 안에는 사람이 없다. 굳이 누르거나 굴려 보지 않아도 요한은 알 수 있었다. 이불 위에는 베개가, 베개 위에는 편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