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60)화 (60/151)

60화
이제 다 만졌어?

리세트는 배가 사르르 아파 오기 시작해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을 잘 덮고 있었지만 그래도 꼼꼼히 배를 감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부터 내내 속이 편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내고자 이런저런 말을 쉼 없이 하느라 음식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은 덕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다. 식사를 끝마칠 즈음이 되어서야 뒤늦게 비린 맛이 확 끼쳐 들어 곤혹스러웠다.

더 이상 무언가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 끝없는 어색함 속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잘 구운 밀가루 반죽의 냄새. 그러니까 그건 아마도 케이크와 쿠키일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이걸 한번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예상대로 분위기는 꽤 좋게 풀어졌다. 마치 요한이 입가로 가져다주는 쿠키처럼 침실을 채운 공기가 달콤해졌다.

입은 웃고 있지만 슬픔이 엿보였던 눈동자에도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래서였다. 배가 아픈 것도 기억에서 지운 채 쿠키를 열심히 받아먹은 건 그 이유가 전부였다. 요한이 진짜로 미소 짓고 있으니까.

익히 알고 있던 그 얼굴과 미소를 보자 리세트의 아픔은 서서히 옅어졌다. 배가 꽉 찬 느낌이 드는 것 말고는 특별히 불편하거나 토기가 몰려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리세트는 길게 호흡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오랫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리세트.”

잠에서 깨어난 요한의 팔이 조심스럽게 리세트를 끌어당겼다. 그가 깰까 봐 일부러 조금 떨어져 등을 돌리고 있던 리세트의 몸은 어느새 단단한 품속에 갇혀 있었다.

목덜미에 닿는 따스한 체온과 숨결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리세트는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요한의 손을 두드렸다.

“왜?”

“마주 보고 싶어서.”

팔의 힘이 느슨해지자 리세트는 살며시 몸을 돌려 요한을 보았다. 평소보다 나른한 듯한 파란색 눈동자를 보는 건 특별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대부분 요한이 먼저 일어나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천천히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자 요한이 눈을 내리감았다. 머리카락만큼이나 보드라운 속눈썹의 감촉이 손끝에 번졌다.

“이제 다 만졌어?”

눈언저리를 맴돌던 손길이 뺨으로 옮겨 가자 요한이 스르륵 눈을 떴다.

이런 기분이구나. 리세트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간질간질하고, 마음속에 커다란 구름이 떠다니는 듯한 기분.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연인의 눈동자를 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 더 만질까. 왠지 그러고 싶어.”

요한은 다시 눈을 감아 주었다. 리세트는 한동안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감긴 눈 위에 입을 맞추어 보기도 하고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곱게 접힌 눈매와 단정한 눈썹을, 미소를 띤 입술을 만지고 마침내 손을 떼어 냈을 때 요한이 다가왔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에 차츰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요한은 팔꿈치에 힘을 실은 채로 리세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눈동자가 좋았다. 마치 작은 별들을 품은 듯한 고요한 밤하늘 같은 눈. 얼마나 다정하고 예쁜 눈인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들이 요한의 눈을 차갑다고 말하는 게 조금 억울했지만 리세트는 그럼에도 이 눈동자 속에 담긴 다정함을 아는 건 자신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조금, 많이.

“왜 그렇게 봐?”

쇄골에 닿았던 입술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리세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요한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온 숨결이 뜨거웠다.

“예뻐서, 나도 모르게 또 쳐다봤어.”

“나한테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리세트.”

“내 눈에는 예쁜 걸 어떡해.”

촉촉한 감촉이 귓불과 목을 적시고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갔다. 움푹 팬 쇄골 밑까지 요한의 입술이 지나갔을 때 리세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잊고 있던 아픔이 불쑥 찾아온 탓이었다.

리세트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자 요한은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천천히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입술이 지나온 모든 곳을 다시 부드럽게 적셨지만 리세트의 몸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눈을 질끈 감은 리세트의 얼굴이 보였다. 요한은 꾹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네가 싫어하면, 안 해.”

제 몸에서 내려가려는 요한의 손목을 힘껏 움켜쥔 리세트가 스르륵 눈을 떠 그를 보았다.

“좋아. 너무 좋은데…….”

“…….”

“오랜만이잖아. 내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

무슨 고민을 하는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리세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실 배가 조금 아파서 깼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호출종을 향해 손을 뻗는 요한의 팔을 리세트가 잡아챘다. 무엇을 하려나 싶어 가만히 두고 보았더니 리세트의 눈길이 부푼 배를 스쳐 지나왔다. 그 작은 움직임의 뜻을 읽어 내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요한은 리세트가 말을 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의사를 부를 정도는 아니야. 아주 조금 속이 불편한 정도거든. 따듯하면 안 아플 것 같은데 여름이라 이불이 얇잖아. 어, 그러니까…….”

요한은 올라탄 몸 위에서 천천히 내려와 리세트 곁에 몸을 누였다.

그를 향해 돌아누운 리세트를 보며 한쪽 팔을 들어 올리자 그의 아내가 활짝 미소 지으며 품속으로 들어왔다. 팔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어 반듯하게 눕고서도 리세트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잠시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곧 떨쳐 낼 수 있었다.

“정말 주치의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어?”

토닥여 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리세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평온해졌지만 요한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신기해. 하나도 안 아파.”

“혹시라도 아프면 말해. 참지 말고.”

“알겠어. 그런데 요한, 나 정말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 이러니까 꼭 너의 마력이 치유 계열 같아.”

잠기운이 번지기 시작한 눈과 달리 목소리는 명랑했다. 요한은 피식거리며 리세트의 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순간에도 리세트의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는 날카로웠지만 리세트는 그런 걸 인지하지 못할 만큼 노곤해져 있었다.

“네 손 굉장히 따듯하고 부드러워.”

“나도 그래. 네가 내 몸에 난 상처들을 치유해 줄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어.”

“들어서 알고 있기는 한데, 또 얘기해 주니까 더 좋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리세트가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치유해 주는 건데 아프면 안 되잖아. 이런 기분이면 일부러 조금 다쳐도 괜찮을 것 같아. 너무 좋다.”

사르르 웃으며 하는 말이 제법 깜찍하고 황당했다. 잠기운이 몰려와 의식의 흐름대로 얘기하는 것일 테지. 요한은 재잘대는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가만히 귀 기울였다.

“그래도 너는 일부러 다치고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나한테 너를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있어 좋지만 이왕이면 그 힘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다치면 마음이 너무 아파, 요한.”

다정한 말들이 더 들려오길 바랐지만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말소리는 천천히 잦아들었다.

❖ ❖ ❖

요한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의 뺨에 입 맞추었다. 혹시. 그 간절한 바람을 담아 오래도록 지켜보았지만 리세트는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픔이 옅어졌으니 잠이 들었겠지. 안도감 못지않게 아쉬운 마음도 컸다.

어렸을 때는 다치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마력을 다룰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세트는 그가 동기생들과 함께 실습을 나간다고 알고 있었지만 요한은 그 어린 나이에도 격전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어른들은 교묘하게 조를 맞추어 그곳으로 요한을 보냈다. 실습생과 학부생들을 적절히 묶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들의 속내는 훤히 보였다.

요한을 제외한 동기생들 전원은 언제나 아카데미 근처에서 본래의 실습 시간에 맞게 수업을 받았다. 동기생들 중 유일하게 홀로 떨어진 요한은 늘 아카데미를 벗어나 수도의 외곽으로,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으로 내던져졌다.

첫날에는 제법 깊은 상처가 팔뚝에 남았다. 리세트가 발견하면 틀림없이 선생님에게 찾아가겠지. 너무 위험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냐며 따져 물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요한은 늘 의무실을 찾아가 치유 마법을 받았다. 다쳤다는 사실을 다른 어른들, 특히나 그를 격전지로 내몬 어른들한테 들키기는 싫어 아카데미로 귀환할 때까지 버텼다.

일련의 습관처럼 자리 잡은 그 공식을 깬 건 정식으로 팀을 이루어 실전 훈련 실습을 나간 날, 아트반 크리프와 한 조가 되어 숲으로 향한 그날이었다.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나 자신의 모습에 취한 멍청한 놈 하나가 일을 그르쳤다. 아트반 크리프의 마법진 안에서 벗어난 놈 때문에 전열이 흐트러져 방어 마법진이 파훼되었다. 요한은 날렵하게 피했지만 하필이면 아트반 크리프가 멍청한 팀원을 구하겠다고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아트반 크리프와 머저리를 구해 내느라 허벅지와 팔뚝에 깊게 베인 상처가 남았다. 손톱에 독을 묻히고 다니는 고블린형 몬스터에게 다친 상처라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을 찾아가려던 요한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리세트 하리펜, 그 혼자서만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 들려왔을 때였다.

‘빨리 따라 와, 요한. 어서 치료하러 가자! 리세트가 보면 엄청 걱정하겠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아트반 크리프가 거슬렸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세트가 이 상처를 보면 뭐라고 할까. 걱정해 줄까. 당연히 걱정하겠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의미한 가정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보지 못해 상상에만 그쳤으니까.

한 번쯤은. 리세트가 얼마나 걱정할지 잘 알면서도 걱정 어린 눈빛과 손길을 받아 보고 싶었다.

작은 상처도 전부 치료해 준다고 했으니까.

요한은 아트반 크리프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까지 치유 마법을 받지 않았다. 옆에서 하도 시끄럽게 종알거려 대충 핑계를 둘러댔다. 누군가 몸에 손대는 게 싫다 말하자 시끄러운 놈이 더욱 목청 높여 말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러다 죽어, 이 멍청아!’

웬만한 독은 어렸을 때 경험해 내성이 있다는 말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켜보다 못한 아트반 크리프가 엉성하게 붕대를 감는 바람에 상처 부위가 지나치게 넓어 보였지만 요한은 붕대를 풀거나 잘라 내지 않았다. 교복으로 상처를 숨겨 철저히 은닉했다.

거대한 숲을 지나 수도로, 그리고 마침내 아카데미의 문을 넘었다.

후문 근처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는 작은 여자, 그가 사랑하는 리세트 하리펜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