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의 웃음소리.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분수대의 물줄기가 만들어 내는 시원한 소리. 무수히 많은 소리가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느껴졌다.
뜬금없이 아트반 크리프라니.
의식하지 못한 새 숨을 죽인 리세트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보았다. 한동안 꿈을 꾸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이름이, 지금 요한의 입에서 나올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곧 자각했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와 힘이 일깨워 주었다.
아트반 크리프.
그 이름을 한 번 더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나서야 리세트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침묵하는 시간은 길어졌고 손을 쥔 악력은 점차 약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리세트가 놓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요한이 서서히 힘을 풀어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리세트를 담던 파란 눈동자에 노을빛이 맺혔다. 그러니 따듯해 보여야 하는데 본래의 차가운 빛이 더욱 도드라졌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얼굴로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멀어졌다.
“나는…….”
리세트가 막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를 훔쳐 달아났다.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높아졌고 분수대의 물줄기는 더욱 높게 하늘로 뻗어 나갔다.
무성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서서히 멎어 갈 즈음 요한의 시선이 제자리로, 리세트에게 돌아왔다. 더 이상 바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 집으로 가자, 리세트.”
다시 리세트를 담은 눈으로 요한은 웃고 있었다. 조금 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 ❖ ❖
아카데미에서 크게 아팠던 리세트가 몸을 완전히 회복한 후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중간에 말이 끊기거나 웃음소리가 잦아들면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었다. 임신한 아내를 정성껏 에스코트해 마차에 오르는 공작과 그의 곁에서 미소 짓는 공작 부인. 저택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불편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했다.
리세트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요한은 그럴 때마다 말없이 웃어 주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달이 뜬 밤하늘 위로 떠오른 작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하녀들의 손을 빌리는 대신 요한은 직접 리세트의 옷을 벗겼다. 밝은 색감의 옷가지가 하나둘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 옷들보다 품이 훨씬 큰 옷도 곧 그 뒤를 따랐다.
함께 욕조 안으로 들어서자 찰랑거리던 물이 넘쳐흘렀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도 잠시도 끊이질 않던 대화 소리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요한은 제 품에 기대앉게 한 리세트의 눈동자를, 리세트는 잔잔한 수면 속에 감추어 둔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없이 욕조 밖으로 나가 머리를 감겨 주기 시작하자 리세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뽀얀 거품이 수면 위에서 녹아 사라졌다. 리세트를 물 밖으로 이끈 요한은 천천히 몸을 씻겨 나갔다. 목덜미와 어깨를 지나 가슴으로, 그리고 더 밑으로 손길이 내려가자 리세트가 급히 손목을 붙잡았다.
“몸은 내가 할래.”
당황한 듯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거의 다 했어.”
조심스러운 손길이 아주 자그마하게 부푼 배를 지나올 때는 두 사람 다 숨을 죽였다. 리세트는 허벅지 옆에 꼭 붙여 놓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주먹을 쥐었다. 미지근한 물로 거품을 다 지워 낸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를 안아 다시 욕조 안에 앉혔다. 리세트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을 확인한 후 빠르게 제 몸도 씻었다.
리세트를 안아 올리려던 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건넸다.
“이제 나가자.”
요한은 자신의 손에 닿은 리세트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평소처럼 물기가 묻어나는 매끄러운 살결에 입을 맞추지 않고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 주었다. 수건을 달라며 리세트가 자꾸만 손을 뻗어 왔지만 빼앗기지 않았다. 바깥나들이에 온 기력을 소진했는지 리세트는 금방 지쳐 순순히 손을 떨구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한층 더 막막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을 때였다.
“어?”
리세트가 잠옷에 팔만 꿴 채로 침실로 달려 나가더니 금세 다시 돌아왔다. 갑작스레 손 안에서 빠져나간 온기에 헛웃음 짓던 요한은 문가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케이크가 생겼어.”
“케이크?”
친절하게 설명해 줄 마음은 없는지 리세트는 또다시 먼저 침실로 나가 버렸다. 요한은 고개를 저으며 단추를 잠갔다.
“그게 케이크야?”
테이블 앞에 꼭 붙어 선 아내 곁으로 다가간 요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도무지 케이크라고 불러 줄 수 없는 외형을 가진 거대한 덩어리를 리세트는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먹으라고.
놀라운 건 이 케이크 같지 않은 케이크 옆에는 작은 산처럼 쌓인 무언가도 존재했다. 조각낸 초콜릿을 듬뿍 넣은 쿠키의 산이었다. 둘 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지만 케이크의 높이가 쿠키로 쌓아 만든 산을 압도했다.
케이크가 담긴 접시와 쿠키 산의 접시 중앙에는 유리병 하나도 놓여 있었다.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요한은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뻔하지. 포도잼이겠지.
“진짜 맛있겠다.”
그를 돌아본 리세트가 신이 나 폴짝거렸다.
어색했던 게 다 거짓인 양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당장 포크를 쥘 것 같은 손을 잡아 내린 후 리세트의 몸을 돌려 세웠다. 단추를 잠가 주자 그제야 자신의 잠옷을 살핀 리세트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잖아.”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요한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 끝을 까딱이며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거기서 좀 달콤한 냄새가 풍겨 오더라고.”
“그래서?”
“마음이 조금 급해졌나 봐. 조금.”
단추를 잠가 주는 그 잠시도 못 견디겠는지 리세트의 눈길이 흘끔흘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기가 막히는데 웃기기도 해 요한은 빠르게 손을 떼 주었다. 의자를 빼 주자 리세트는 냉큼 앉아 포크를 쥐었다.
“잘라 먹지 않아도 되겠어?”
“다 먹을 수 있어.”
“그걸, 이 시간에?”
“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요한은 잠시 입을 다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걱정스러워 건네는 말이어도 지금의 리세트는 그 뜻을 곡해할 수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걸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몸소 느낀 교훈을 요한은 결코 잊지 않았다.
“아니야. 어서 먹어.”
리세트는 포크를 푹 찔러 넣어 케이크 한 덩어리를 접시에 덜었다. 네 단으로 이루어진 케이크의 맨 윗부분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포도가 접시 위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지자 리세트는 우선 그것부터 먹었다.
요한은 맞은편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9시. 이르다면 이르고 늦었다면 늦은 애매한 밤의 시간에 그의 아내는 케이크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도겠지만.
리세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케이크를 크게 잘라 한입 가득 넣었다. 오물오물 잘만 움직이던 입술 끝이 돌연 침울하게 내려갔다. 이러다 거의 턱까지 내려가는 건 아닌가 싶게.
너무 맛있어서 감동을 받은 건가.
한 입, 또 한 입. 처음에는 빨랐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요한은 곧 견해를 정정해야 했다.
맛이 없네.
케이크를 씹을수록 리세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쁨. 그 후에는 애매한 미소를,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다 지금은 손에 든 포크로 휘적휘적 접시 바닥을 긁고 있었다. 더 먹고 싶지는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일부러 알은체하지 않은 요한은 거대한 초콜릿 쿠키 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쿠키 하나를 집어 접시에 놓았다. 아까부터 은근히 눈길을 끌던 유리병을 열자 포도잼 특유의 시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스쳤다. 조금 따듯한 잼을 적당히 조각낸 쿠키에 펴 바르는 동안 리세트의 시선은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요한은 이번에도 그 눈길을 보지 못한 척 태연하게 잼을 바른 쿠키를 내려놓았다.
“그건…… 왜 안 먹어?”
리세트는 요한의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애물단지 같은 포크를 쥔 손을 내려 테이블 위에 얹었다.
“리세트, 너는 왜 안 먹어.”
“나? 먹고 있는데?”
뜨끔한 속마음을 들킬까 싶어 리세트는 급히 케이크를 한 입 더 푹 펐다. 처음 뜬 양에 비하면 반의반도 채 되지 않는 양이었다.
“네가 생각한 만큼 맛있어?”
“어…… 응!”
“정말?”
속마음을 꿰뚫듯이 쳐다보는 시선에 리세트는 보란 듯이 목청을 높였다.
“특이하게 맛있어.”
“맛있으면 맛있는 거고, 맛이 없으면 없는 거지.”
“맛이 없는 건 절대 아니고, 하여튼 특이한 맛이야. 너는 몰라도 돼.”
맛있을 줄 알았지.
리세트는 제 손에 들린 포크를, 그 포크 위에 매달린 케이크를 탐구하듯 보았다.
어떻게 이런 맛일 수 있지?
첫입은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질긴 무언가가 씹혔는데 굉장히 이상한 식감과 맛이었다. 새까만 알갱이가 케이크에 콕콕 박혀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맛을 앗아 간 주범인 듯했다.
요한은 케이크가 입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리세트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 갔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동작이었다.
“잠깐만!”
요한이 그 맛없는 걸 먹으려 하자 리세트가 다급하게 일어나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막으려는 리세트의 움직임보다 요한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찰나의 순간 엇갈린 손 때문에 요한의 입 속으로 케이크가 들어가 버렸다.
“네 말이 맞네. 특이하게 맛있네.”
케이크 대신 요한은 리세트의 입에 쿠키 조각을 쏙 넣어 주었다. 적당히 잼을 발라 놓은 그 쿠키였다.
“와아, 이건 진짜 맛있다.”
“그래?”
요한은 리세트의 속도에 맞추어 쿠키에 잼을 발라 주었다. 온전히 리세트의 손에 맡기면 틀림없이 잼으로 범벅이 될 테니.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듯 쿠키를 반으로 부수어 잼을 발라 주자 리세트는 이제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열심히 받아먹었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얼굴을 지나 문제의 케이크를, 그리고 다시 아내를 본 요한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케이크가 맛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냈다. 건조된 과일은 리세트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지. 주방장에게 보완할 점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요한은 정성껏 잼을 발랐다.
아트반 크리프. 그 이름을 빌려 무심코 꺼냈던 불안감을 지울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