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불행한 행복
요한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세트의 뺨을 감쌌다. 실재하는 온기가 느껴지자 거세게 날뛰던 호흡과 심장 박동이 본래의 속도를 되찾아 갔다.
“왜 너 혼자 여기 있어.”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조용히 나왔어.”
“깨우지 그랬어.”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는걸.”
“앞으로는 그냥 깨워.”
“알겠어.”
뺨을 놓아주자 리세트는 타르트를 앙,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연달아 쿠키를 오도독 씹어 먹는 입술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맞은편으로 가는 대신 요한은 리세트의 옆 의자를 빼 앉았다.
음식다운 음식이 잘 차려져 있었지만 리세트의 앞접시에는 도저히 식사로 취급할 수 없는 것들만 가득 담겨 있었다.
리세트의 포도 사랑은 집으로 돌아와도 여전히 건재했다. 하녀들이 가져다주는 온갖 음식들도 리세트의 시선을 잡아채지는 못한 모양이지.
주방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는 주방장의 낯빛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그의 뒤에 선 하녀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방금까지 리세트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메이 하핀 역시도.
요한은 물 한 잔을 비워 낸 후 포크를 쥐었다. 깨작거린 흔적이 얼핏 보이는 고깃덩어리를 접시로 옮겨 가 작게 잘랐다. 그것을 입가에 대 주자 리세트는 숨을 흡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도 못 먹겠어?”
“응. 그래도 아까 몇 입 먹기는 했어.”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아내를 본 요한은 미련 없이 식사를 물렸다.
“요한, 너는 안 먹어?”
“……먹을게.”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분명 괜한 걱정만 할 테지. 입맛은 전혀 돌지 않았지만 요한은 리세트를 먹이기 위해 작게 잘랐던 고기를 마저 먹었다. 그제야 시선을 거둔 리세트는 팔을 뻗어 디저트 접시를 앞으로 끌어왔다.
저 많은 양을, 한꺼번에 먹다니.
요한은 리세트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타르트의 개수를 세어 보다 그만두었다. 열심히 먹을 것을 모아 두는 작은 동물을 보면 꼭 이런 기분이려나. 걱정되는데 마냥 귀엽고, 귀여운데 걱정스러웠다.
“요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물거리는 입술에 머물렀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상기된 두 뺨에 닿았다. 볼록 튀어나온 뺨이 결국 그를 웃게 했다. 키득거리는 요한을 보던 리세트는 새롭게 집어 든 타르트를 꼭 쥔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한은 리세트가 소중히 쥐고 있는 그 타르트를 굳이 한 입 베어 먹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했다.
“더 먹을래?”
자기와 같은 포도 예찬론자를 더 만들 작정인지 리세트는 냉큼 쿠키를 쥐어 그의 입가에 대 주었다. 요한은 이번에도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하려던 말은?”
“무슨 말?”
“방금. 나한테 하려던 말.”
“아, 그거.”
미소 짓고 있던 리세트의 눈초리가 예리해졌다.
“뭐야.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었어?”
“응.”
선선히 흘러나온 대답에 리세트는 쿠키를 든 손을 홱 치워 버렸다. 하지만 요한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그는 단단히 쥔 리세트의 손목을 제 앞으로 끌어와 남은 쿠키를 입으로 물어 갔다.
쳇. 단단히 토라진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 분홍빛 입술에 디저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요한은 툴툴대는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포도랑 초콜릿 말이야. 둘 다 맛있는 거잖아.”
“지금 네 기준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겠지.”
“그래, 맞아. 역시 너는 알아주는구나.”
삐쭉 튀어나와 있던 입술이 이제는 미소를 그렸다. 제 편을 만나 신이 난 아이처럼 리세트의 눈이 반짝거렸다.
“맛있는 걸 같이 먹으면 더 맛있잖아. 생크림케이크에 포도는 종종 넣는데, 왜 초콜릿케이크에는 포도를 안 넣는 걸까? 맛있는 거에 맛있는 걸 더하는 작업인데 맛이 없을 리 없잖아.”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아내가 귀여워 요한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소 황당했으나 동의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너도 맛있을 것 같지? 그렇지?”
간절하게 동의를 구하는 걸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의견을 묵살당한 모양이었다. 뜨끔한 얼굴로 문 앞을 서성거리는 주방장이나 메이 하핀이 그들 중 하나일 테고. 그렇다면 요한은 아내의 유일한 편이 되어 줄 의향이 있었다.
“괜찮을 것 같네. 먹고 싶어?”
“응!”
요한의 눈짓을 받은 주방장은 부산스레 앞치마를 정돈하며 다가왔다.
“오늘 저녁에 해 드릴까요?”
주방장의 뇌리에는 조금 전 리세트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초콜릿케이크에는 왜 포도가 안 들어갈까요? 생크림케이크에는 많이 들어가잖아요. 엄청 맛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제가 알거든요. 맛있지 않을까요?’
따로 해 달라는 말을 하셨다면 기꺼이 해 드렸을 텐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셔서 단순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요즘 마님의 관심사에 단연코 포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니.
그래서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해 드렸다. 제논에서는 보편적인 디저트는 아니라고, 차마 그런 걸 추천한 사람의 입맛을 질타하지 못하고 에둘러 다른 것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말을 올렸다.
“마님께서 드시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 해 드릴 걸 그랬습니다.”
요한은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사람처럼 결연해 보이는 주방장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주방장은 어떻게 그런 특별한 조합을 생각했느냐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리세트는 쑥스러운 듯 뺨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다행히도 간신의 기질은 없는지 메이 하핀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주방장이 틀림없이 맛있을 거라며 장담하고 나가자 리세트의 눈동자는 다시 그를 담았다.
요한은 갈색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문질러 닦아 준 손으로 하나 남은 쿠키를 집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리세트. 너 줄 거야.”
금세 표정을 바꾼 리세트가 아아, 소리 내 입을 벌리는 모습을 보던 요한은 슬쩍 쿠키를 보았다. 당연히 주려고 했던 마음을 바꾸어 크게 한 입 부숴 먹자 리세트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마치 불한당을 보는 듯했다.
요한은 무어라 쏘아붙일 기세인 작은 입 속으로 남은 쿠키 조각을 넣어 주었다.
❖ ❖ ❖
모든 것이 작은 세상 속으로 들어온 리세트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추었다. 요한은 나란히 서며 충분히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아기방을 꾸미기로 해 그들은 온통 작은 것 천지인 세상으로 들어와 있었다.
“너무 작다. 정말 다 작아.”
리세트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라 요한은 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러자 리세트는 웃으며 그를 보았다.
“저쪽으로 가 보자.”
요한은 리세트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녔다. 이미 웬만한 용품을 다 사 놓았다는 걸 알지만 리세트는 개의치 않고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고르고 다시 또 보았다. 충동적으로 고르지 말자고 다짐했던 지난날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거 봐, 요한. 너무 예쁘지?”
그가 눈짓하자 수행인은 정중하게 리세트가 고른 물건을 받아 들었다. 침구 근처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리던 리세트는 잠옷이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어느 한 곳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한 번 눈길이 닿으면 도통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게 보드라운 옷감을 만지던 리세트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파란색 잠옷.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그 빛깔이 요한의 눈동자와 가장 흡사한 색이라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리세트는 아기들의 잠옷보다는 조금 큰 듯한 그 옷을 품에 안았다. 우리 아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이 옷과 똑같다면. 뻗어 가는 상상의 가지를 싹둑 자른 건 요한의 목소리였다.
“그건 바로 못 입힐 것 같은데.”
타당한 말이라는 걸 잘 알지만 리세트는 고집을 부려 보았다.
“언젠가 이만큼 클 테니까, 미리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때 가서 사면 돼. 더 예쁜 걸 발견할 수도 있잖아.”
“내 눈에는 이게 제일 예뻐 보여. 이것보다 예쁜 건 없단 말이야.”
요한은 잠옷을 꼭 끌어안은 팔을 보다 수행인에게 눈짓했다. 리세트는 그가 다가오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들고 갈래.”
리세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잠옷과 인형이 진열된 곳을 나서서 이번에는 양말과 신발이 늘어선 곳으로 향했다. 그동안 본 것들 중에 이곳에 있는 게 가장 작고 앙증맞았다.
“이게 어떻게 양말일 수 있어?”
리세트는 떼어 놓고 오기 바빴던 남편을 향해 어서 와 보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은 샛노란 양말 한 짝을 꼭 쥔 채였다.
“이렇게 작은데!”
감탄스러운 경악을 터트린 리세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은 조용한 눈짓으로 수행인을 불렀다.
“저것도.”
그는 충직하게 맡은 바를 해냈다. 작디작은 물건들을 족족 받아 든 그의 두 손은 뿌듯한 마음만큼이나 무거워져 있었다.
두 분께서 행복하시다면야.
이 많은 옷을 다 입어 보기도 전에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라는, 미리 준비해 놓은 충고는 곱게 접었다.
❖ ❖ ❖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한가롭게 공원을 걸었다. 수행인과 하녀를 대동하지 않은 채로, 오롯이 단둘이서만.
리세트의 손에 들린 작은 봉투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토록 고집을 부려 산 잠옷이었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가 오늘은 장밋빛의 하늘을 그려 냈다. 리세트는 하늘을, 그리고 요한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높아질수록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얽혀 있는 손가락은 더욱 꼭 붙었다. 리세트는 괜히 부끄러워져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근처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 평화로운 광경에 리세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런 시간을 갖는 건 처음이지?”
이 평화를 위해 희생해 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고작 1년 남짓 전장에서 살았지만 마치 10년은 족히 넘는 시간을 지나온 듯했다. 멈추어 서 있는 것도 몰랐던 리세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일이 있었지.”
마음을 콕 찌르는 말에 리세트는 당황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했다. 왠지 요한을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결혼식. 임신. 도망. 일련의 사건들이 차례대로 떠올라 난감해졌다.
언제나 리세트에게만 향해 있던 요한의 눈동자도 지금은 그녀를 담지 않았다. 분수대를, 정확히 그 주변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아빠의 목에 매달린 아이와 그들 곁에서 커다란 막대 사탕을 들고 따라가는 여자. 아이의 엄마겠지. 단란한 가족의 모습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가슴에 깊게 박혔다.
“아…….”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신음이 들려와 요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리세트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아트반 크리프와 오고 싶지는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