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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57)화 (57/151)

57화
알 수 없는 입맛

방울져 흐르는 눈물이 요한의 손등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몰라. 갑자기 막 화가 나. 늦게 일어난 너도 밉고, 아이스크림도 밉고, 상점 문을 닫아 버린 아저씨도 미워. 그런데 바보처럼 울고 있는 내가 제일 싫어.”

급하게 말을 쏟아 낸 리세트는 훌쩍이며 눈가를 닦아 냈다. 잠시 사고가 굳어 버렸던 요한은 거칠게 눈물 자국을 지워 내는 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눈가를 문질러 주자 리세트의 눈매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미안해.”

“…….”

“정말 미안해, 리세트.”

질책의 기색이 선연한 모습에 요한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고심하던 리세트는 고개를 픽 돌리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

단단히 토라진 리세트는 뺨에 닿은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렸다. 조금 전처럼 매정하게 놓는 대신 이번에는 손가락 두 개를 꼭 쥐어 보았다. 왠지 놓고 싶지는 않아서.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이 아닌 걸 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때문에 싸우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런데 못난 마음이 자꾸만 싸움을 부추겼다.

무슨 말이든 하는 순간 요한에게 짜증을 부릴 것 같아 리세트는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아 냈다.

“다른 날 또 먹으러 오자.”

방금까지 짜증과 서운함을 토로하던 마음은 그 말이 들려온 순간 다시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언제?”

기대감이 잔뜩 담긴 목소리와 눈동자가 요한을 미소 짓게 했다.

“내일 올까?”

“내일은 아기방 꾸밀 물건 사러 가기로 했잖아. 광장이랑 그곳 상점가는 너무 멀어.”

“그럼 다른 날.”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를 돌려 세웠다. 일단 리세트의 시야에서 어서 아이스크림 상점을 치워야 할 듯싶었다. 아직도 눈물이 지나온 뺨이 축축한 것을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쓸모없는 놈이 된 기분이었다.

겨우 잠기운 하나 못 이겨서 일을 그르치다니.

“언제든, 네가 오고 싶을 때 오자.”

“약속하는 거야?”

“응. 약속.”

“증거를 남겨야 해. 어서 손 줘. 어서.”

요한이 손을 건네려 했지만 리세트의 움직임이 훨씬 빠르고 날렵했다.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엮은 채로 리세트는 생긋 웃음 지었다. 눈물 젖은 뺨이 예쁘게도 봉긋 부풀었다.

“수석 했으니까, 그 기념으로 네가 사 주는 거로 할래.”

기쁨이 너무 커 리세트는 호기롭게 말했다. 막막했던 시험 날의 기억은 어느새 뇌리에서 까맣게 지워진 채였다.

“아직 시험 결과가 안 나오지 않았나.”

요한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문하자 리세트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허리에 올려놓은 두 손에도 잔뜩 힘이 실렸다.

“이변은 없어. 내가 수석일 테니까. 느낌이 그래.”

“못해도 사 줄게. 뭐든, 전부.”

“보상이 있어야 더 열심히 한단 말이야.”

요한은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는 뺨을 감싸 쥐었다. 한 번, 두 번. 눈물의 자국을 지나오듯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간지럽다며 눈을 찡그리듯 감는 모습이 예뻤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건 다 먹어도 돼.”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말이 무어라고 리세트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지금 말해도 사 줄 건가요, 공작님?”

“말씀만 해 주신다면, 기꺼이.”

“이플로 상점의 아이스크림. 초콜릿 맛으로.”

“그건…….”

밝은 미소와 함께 리세트가 다가왔다. 요한은 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떠난 입술의 감촉을 느끼듯 손으로 만져 보았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그 소중한 감촉을.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

벌써 열 걸음은 멀어진 리세트가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고 있었다. 노을이 흐르는 하늘에 비친 아름다운 빛무리가 리세트의 주변을 감싼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같이 가.”

멀어진 아내를 따라잡은 요한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 ❖ ❖

주방은 오늘도 진지한 토론의 장이 되어 버렸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냄새도 심각한 분위기를 지워 주지는 못했다.

새벽부터 울리던 종소리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지금까지도 조용한 것보다는 나았다.

깨우러 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깨우러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늦잠을 잔 공작께서 뾰로통한 얼굴로 침묵하는 마님을 앞에 두고 얼마나 쩔쩔맸나.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역시 깨우는 편이 나았다. 오늘도 공작 부부는 외출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공작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마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더더욱 마음은 한쪽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주방에 모인 하녀들은 서로를 곁눈질했다.

누가 깨우러 가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녀들의 눈초리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어졌을 때였다.

“배가 고파서 왔어.”

딸랑딸랑, 그 경쾌한 종소리 대신 사람이 찾아 왔다. 마님께서, 아침잠이 많아 적잖게 고생을 하던 그 마님께서 주방 문 앞에 서 계셨다. 두 눈 뜨고 보아도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마님?”

“뭐, 마님?”

누군가 터트린 탄식 같은 부름을 기가 막히게 들은 메이 하핀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메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리세트를 보다가 냉큼 정신을 차리고 앞치마를 둘러맸다.

“어서 음식을 준비해 드리자.”

제법 윗사람처럼 하녀들을 지휘하던 메이가 돌연히 리세트를 돌아보았다.

“마님께서는 침실로 가 계세요. 얼른 준비해 가져다드릴게요.”

메이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 와중에 공작을 향한 짜증도 살짝 섞이기 시작했다. 종이 고장 나기라도 했나? 그렇다면 본인이 좀 오셔서 알려 주시지. 잠도 많은 분을 굳이 깨워 이곳까지 내려보내다니.

메이의 불퉁하고 황당한 마음을 더욱 황당하게 만든 건 리세트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먹을게.”

“예? 여기요?”

“응. 여기, 식당에서.”

“왜요?”

혹시 싸우셨나. 메이는 물론 주방에 모여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리세트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누가요?”

“누구겠어.”

“설마…… 주인님이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다고요?”

방긋 웃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들은 리세트가 살며시 배를 문지르는 걸 보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듯해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떴다. 개중에는 눈을 벅벅 비비는 사람도 있었다.

“나 배가 많이 고픈데…….”

사용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은 음식을 다시 따듯하게 데우고, 혹시 몰라 준비만 해 놓은 메인 재료를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지글지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님은 저를 따라오세요.”

메이는 리세트를 이끌고 식당으로 나왔다. 두 사람 몫의 테이블을 세팅한 하녀들이 물러가자 리세트는 홀로 넓은 식탁 앞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배는 많이 고팠는데 막상 음식 냄새를 맡으니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리세트가 물을 들이켜고 코를 막자 커다란 유리창이 활짝 열렸다. 청량한 바람이 음식 냄새를 희석해 주었다.

메이는 음식 냄새가 더 퍼지지 않게 주방 문을 굳게 닫았다. 손동작이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역시 침실로 가시는 게 더 좋겠어요. 힘닿는 데까지 잘 막아 보겠지만 여기 계시면 음식 냄새를 피할 수가 없잖아요.”

“자고 있는 사람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아.”

“깨우면 되지요. 마님께서 주인님 침실로 가시는 방법도 있구요.”

“그러기 싫어서.”

미지근한 물을 더 따라 마시는 리세트를 보는 메이의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고집쟁이를 둘러메고서라도 침실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하지만 저 얼굴, 순하지만 고집스러운 미소를 띤 저 얼굴을 메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메이의 친구는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집불통!

리세트가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 마음이 더 불편하게 오그라들었다. 입덧을 하느라 속도 울렁거릴 텐데 리세트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 요한 델피니움, 이 저택의 주인 때문일 테지.

저 성격상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폐를 끼치기 싫을 테고. 더욱이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이니 억지로 깨우는 게 미안하겠지.

그냥 좀 깨우지!

메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세트는 태연한 얼굴로 손장난을 치며 놀았다. 화병에 담긴 꽃을 한 송이 뽑아 들어 탐스러운 꽃잎을 매만지고 향을 맡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미처 그 모습을 살피지 못한 메이의 귓가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리세트의 손길이었다.

“너 또 속으로 욕을 하고 있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리세트가 웃으며 물었다.

“……아닌데요? 세상에 어느 몰상식한 하녀가 주인을 욕하겠어요.”

“거짓말하면 혼난다. 그리고 난 주체를 말하지는 않았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메이의 어깨가 빳빳이 굳어 버렸다.

“조금 했어요, 조금.”

리세트는 메이의 귓가에 꽂아 준 분홍색 장미꽃이 더 잘 보이게 만져 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메이는 슬금슬금 따라와 그녀 곁에 섰다. 곧 식탁이 풍성하게 채워졌지만 리세트의 손길은 고기를 조금 뒤적이다 디저트 쪽으로 향했다.

“포도에 초콜릿을 바르면 어떨까, 메이?”

“그건 좀…… 괴식 같아요. 아무래도 딸기가 일반적이지요.”

“그런가?”

“주방장님께 물어보시지 그래요?”

“아까 물어봤는데 더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리세트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입술이 근질거렸지만 메이는 참견하려 들지는 않았다. 일단 무엇이든 잘 먹는 게 좋겠지.

착잡한 눈길은 부지런한 리세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포도잼을 바른 쿠키. 설탕에 조린 포도가 올라간 타르트. 이번에는 아무런 것도 바르지 않고 조리하지 않은 그냥 포도.

포도. 포도. 포도. 하여튼 포도로 만든 것만 집어 먹었다. 그러다 속이 편해지면 고기를 조금 잘라 먹고 또다시 포도를 먹고. 리세트의 식사는 괴상한 순서를 따랐다. 디저트와 식사를 혼재해 먹다니. 맛이 있을까?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메이는 문득 이틀 전, 이곳에서 홀로 식사를 하던 공작을 떠올렸다. 응접실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다른 귀족들 같은 건 철저히 무시한 듯 여유롭게 식사하던 그 남자를. 웬일로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게 신기해 기억에 남은 일이었다.

귀족들이 찾아와 무어라 했더라.

메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발 좀 도와 달라고 하였지.

갑작스럽게 떠오른 그 일을 마님께 말해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거칠게 문이 열렸다.

“리세트.”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공작이 다급히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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