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남자
몸을 돌려 누워 그와 눈을 마주한 리세트는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연히. 아카데미에 갔을 때 심화 과정 학생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
“아, 그랬구나.”
네가 계속 나와 노바르 로슈만을 감시하고 있으니 알고 있는 거잖아.
무심코 말하려던 리세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에 관한 걸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 듯 보였다. 아마 그랬으면 사람을 붙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나섰겠지. 그렇지, 요한?
리세트는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너를 모르겠어.
요한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 허황된 자신감은 잃은 지 오래였다. 요한을 꿰뚫듯이 바라보는 리세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너를 모르겠어.
아이를 죽이겠다고, 나 모르게 그런 짓을 하겠다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요한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다정한 입맞춤을 건네는 너를, 걱정스럽다는 듯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를, 그 모든 것을.
너는 대체, 나한테 어떤 걸 숨기고 있는 거야? 왜 말을 안 해 주는 거야?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거라면 더더욱 나한테는 숨기면 안 되는 거잖아.
“신기하다. 아직 정식으로 승인받은 건 아니라 아는 사람이 드물 텐데.”
“승인도 떨어지지 않은 연구를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걸 보면 영 쓸모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리세트의 반응을 유심히 살핀 요한은 기가 막힌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리세트가 감시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걸. 도대체 언제부터 눈치챈 걸까. 그걸 알고 있는데도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리세트가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알았다면 나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 원래의 너였더라면.
요한은 생기가 감도는 분홍빛 뺨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때때로 리세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날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리세트는 건강하다. 아픈 곳도 없고,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입덧은 그저 임신 과정의 당연한 절차 중 하나일 뿐이다. 주치의에게 수십 번도 더 확인한 내용이지 않나.
그러니 괜찮다. 괜찮을 거다.
“로티 선생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 같아서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노바르 로슈만이 똑똑하긴 해. 이번에 조금 인정해 주기로 했어.”
“로슈만이 들으면 황송해하겠네.”
긴장감에 살짝 굳어져 있던 리세트의 얼굴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다. 겁먹은 작은 짐승을 달래 주듯 요한은 부드럽게 이완되는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 주었다.
“너도 그 연구에 참여하고 싶어?”
“음…… 잘 모르겠어. 지금은 같이 도와주고 있기는 한데 내가 나중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망설여져.”
“하고 싶으면 해. 한 가지만 확실하면 나는 굳이 네가 하고 싶은 걸 막을 생각은 없어.”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기민하게 알아챈 리세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려 살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 한 가지가 뭔데?”
“네 몸에 해가 되는 짓. 너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요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부드러웠지만 다소 냉정하게 느껴졌다.
“아프면 얘기해. 숨기지 말고.”
다시는 네가 아픈 걸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하지 마.
❖ ❖ ❖
부지런히 준비한 아침 식사는 식당에 방치된 채 식어 가고 있었다. 훈기가 감돌던 주방도 어느덧 잔잔한 온도로 맞추어졌다.
최근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사용인들을 힘들게 한 공작이 지금은 무소식으로 애를 태웠다.
정성을 다해 준비한 식사가 싸늘하게 식어 갈수록 주방장의 낯빛도 우중충해졌다.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얼굴이었다.
참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음식 앞을 서성거리던 하녀들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마님께서 돌아오셨으니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준비한 식사인데 여전히 호출종은 울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망가진 건가 싶어서 잘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종은 아주 멀쩡했다. 아니지. 멀쩡해서 더 큰 문제였다.
“마님은 원래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셨으니 그렇다 치고, 주인님도 아직 안 일어나신 건가?”
한 하녀의 말에서 시작된 소란이 주방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에이, 아니겠지. 이미 일어났는데 마님을 깨우기 미안하니까 기다리고 계시는 게 아닐까?”
그 주된 이유도 메이의 말 한마디에 신빙성을 잃었다.
“그럴 리가. 마님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야 한다고 기어코 깨우시잖아. 주인님이 유일하게 마님 말을 안 들어주시는 게 아침 식사인 걸 몰라?”
“그건 그렇지만…….”
의견을 냈던 그 하녀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주방의 입구를, 그 너머의 홀을 살펴보았다.
“주인님께서 아직도 안 일어나셨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녀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닌지라 메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다려 보자. 곧 부르시겠지.”
하지만 햇빛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까지도 호출종은 울리지 않았고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야 말았다.
마침내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하녀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 ❖ ❖
느지막한 오후를 알리는 햇살의 빛줄기는 선명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곧 붉은 기운이 감도는 아름다운 석양을 보게 될 터였다.
한눈에 보아도 황홀하고, 잠에서 막 깨어난 순간 보아도 아름다운 하늘인 건 확실하지만 리세트의 눈에는 그저 그런 자연 경관일 뿐이었다. 아마도 속상한 마음이 두 눈을 가려 버린 듯했다.
광장 초입에 우두커니 서 있던 리세트는 제 옆에 꼭 붙어 선 잠꾸러기의 허리를 꾸욱, 주먹 쥔 손으로 눌렀다.
꾸욱, 꾹. 쿡쿡. 손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팔꿈치까지 번져 갔다. 리세트는 최선을 다해 요한의 허리를 괴롭혔다.
요한은 가만히 리세트의 투정을 받아들였다. 공작저에서 광장까지, 입술을 꼭 붙이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리세트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요한이 막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고 하신 분께서 늦잠을 주무시는 바람에 아이스크림을 못 먹고 말았네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기억은 하시지요? 아이스크림, 오늘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요.”
“…….”
“늦잠을 자면 혼자 가서 먹고 오시겠다며 은근히 협박하신 분이 누구셨더라.”
“…….”
“잠을 너-무 오래 주무셔서 말하는 방법도 잊었나요?”
도저히 말을 이을 수 없는 분위기라 요한은 도로 입술을 다물었다.
“너무 먹고 싶었는데…….”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를 툭툭 걷어찬 리세트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어깨는 이미 한껏 바닥으로 기울어져 맥이 완전히 빠져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 문을 안 닫았을지도 모르잖아. 어서 가 보자.”
“설마요. 그 상점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문을 닫는걸요. 잘 아시는 분께서 왜 그런 걸 물으실까?”
시무룩하게 내려가는 눈꼬리를 본 요한은 멋쩍어져 목덜미를 매만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는 광장 안의 분위기는 한차례의 떠들썩한 오후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석하게도 리세트와 약속한 시간은 한참 지나 버렸다는 뜻이었다.
“오래 주무셨으니 저녁에는 잠이 안 오시겠어요.”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리세트의 눈초리가 못마땅하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렇게 자고, 밤에 또 잘 수 있겠어?”
“아마도.”
“부지런한 델피니움 공께서 언제 이렇게 잠이 많아지신 걸까.”
“오늘만 그런 거야.”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하필 오늘일까?”
변명의 여지가 없어 요한은 따로 할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잠이 쏟아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리세트가 계속 어깨를 흔들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딱 인지만 하는 수준이었다. 의식은 있는데 몸은 반응하지 않는, 이상하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뺨을 꼬집는 손아귀의 힘이 점점 매서워졌을 때야 간신히 눈을 떴다. 결코 아침이라 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느덧 서편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해와 오후로 물든 하늘의 빛, 잔뜩 화가 난 아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쌓인 잠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리세트.”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시겠다?”
네가 곁에 없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아. 너를 품에 안고 자도 불안한 마음이 잦아들지 않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었어.
어쩌면 리세트의 말처럼 겁쟁이가 되어 버린 지도 모르겠다. 이제 혼자 잠드는 게 무서운 건 리세트가 아니라 요한 자신인 듯했다.
“아아……. 아이스크림.”
홱 고개를 돌린 리세트의 시선이 슬금슬금 내려가 자신의 손에 닿았다. 지은 죄를 뉘우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요한은 리세트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리세트는 매정하게 그 손을 쳐 낸 뒤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 아주 미약한 희망이 차올랐다.
상점의 문이 닫히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아저씨가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할 수도 있으니까. 원래 변덕이 심한 분이잖아. 아직도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너무 먹고 싶다.
간절해지는 바람을 타고 발걸음도 점차 빨라졌다.
먹고 싶어.
전처럼 마음껏 뛸 수는 없지만 리세트는 최선을 다해 두 다리를 움직였다.
너무 먹고 싶어. 아이스크림.
스스로 이성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달콤하고 살짝 쌉싸름한 초콜릿 맛이 혀끝을 간질이는 듯했다.
리세트는 초콜릿 맛을, 요한은 바닐라 맛을 주로 먹었다. 달고 차가운, 여름에는 꼭 먹어야 했던 추억의 맛이 걸음을 재촉했다.
처음 아이스크림을 맛본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쉽고,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도 너무 슬펐던 것 같다. 기억 속 깊이 남은 추억의 한 부분이 어서 상점으로 오라고 손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아가, 네가 먹고 싶은 거지?
은근히 책임을 전가하던 리세트의 걸음이 서서히 멈추어 섰다.
“아이스크림…….”
속상한 마음이 너무도 잘 배어나는 목소리였다. 요한은 리세트의 뒤로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까만 커튼이 쳐진 상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안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리세트의 어깨가 움찔 떨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새도 없이 커지는 떨림과 함께 커다란 눈에 점차 물기가 고여 갔다.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