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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55)화 (55/151)

55화
두 개의 밤

보송보송한 이불 위에 누운 리세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조금 졸리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입욕제의 달콤한 잔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침실을 수놓은 불빛도 포근하고, 몸에 감도는 온기도 포근했고, 몸을 감싸는 이불은 더욱 포근했다.

잠이 쏟아지기에 너무 좋은 상황이라 리세트는 다시 눈을 반짝 떴다.

“아빠한테 번거로운 일이 생겼나 봐.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인사하고 자고 싶은데…….”

어차피 일이 끝나면 리세트의 침실로 요한이 돌아올 테지만 그래도 인사를 나눈 뒤에 잠들고 싶었다. 부드럽게 다가오는 입맞춤도, 조용하게 속삭여 주는 인사도 너무 좋으니까.

“엄마한테 이런 습관을 들게 하다니. 아빠가 머리를 너무 잘 쓴 것 같아.”

그래서 아빠 없이는 잠이 잘 안 와.

아이에게 말을 걸며 잠기운을 쫓던 중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 아기용품을 사러 간 요한 델피니움이라니. 그 커다란 남자 혼자 작디작은 물건이 천지일 상점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는 않았다. 요한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실없는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너는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이제는 아기에게 말을 거는, 다른 사람이 보면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대화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상의 일부분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까.

“엄마는 곰 인형. 음…… 담요도 예뻤고. 옷이랑 신발도 너무 작고 예뻤어.”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잊었네.

“엄청 많기는 한데 언젠가 다 쓰기는 하겠지?”

차곡차곡 쌓여 있던 손수건이 문득 떠올랐다. 상점 주인의 현란한 말솜씨에 놀아난 결과물이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이 직접 산 소중한 물건이니까.

우리 아기를 위해. 아가, 너를 위해.

“아빠가 미운 말을 많이 했지만 우리가 특별히 용서해 주기로 할까?”

리세트의 목소리는 이 방의 불빛처럼 따스했다.

“이왕이면 네가 아빠랑 똑같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미안해하겠지?”

곰곰이 생각하던 리세트의 얼굴에 맑은 빛이 스며들었다.

“아니야. 아가, 누구를 닮아도 좋으니까 우리 무사히 만나자.”

배를 가만가만 쓰다듬던 손이 불현듯 멈춘 건 똑똑똑, 작지만 간결하고 일정한 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리세트의 입꼬리에 부드러운 불빛과 웃음이 고였다. 이 소리의 주인이 가져다준 미소였다.

“네, 들어오세요.”

아가, 아빠가 이제 일이 다 끝났나 봐.

❖ ❖ ❖

“정말 지긋지긋해!”

크리프 후작저의 집무실은 오늘도 불이 꺼질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요한 델피니움!”

익숙해진 후작의 절규가 이 밤을 위로하는 음악처럼 터져 나왔다. 후작저의 일상이 된 소리였다.

집사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슬쩍 뒷짐을 졌다. 그는 막 델피니움 공작저에서 온 새로운 일감을 들고 온 참이었다.

아마 지금 이걸 건네면 주인님께서 죽어 나가시겠지? 그래도 잠은 재워 드려야 하니 이건 내일 전해 드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뭐, 내일의 일은 내일의 후작께서 처리하시지 않을까?

잠시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하던 집사를 흠칫 놀라게 한 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한 크리프 후작이었다. 눈 밑은 거뭇하고, 실핏줄이 올라온 밝은 갈색빛의 눈동자는 이미 잠기운에 잠식당한 그 남자.

이리저리 뻗친 금발 때문에 더 안쓰러울 지경인 그 가련한 남자를 향해 집사는 비보를 전해야만 했다. 손에 쥔 편지 꾸러미를 슬그머니 후작의 눈앞에 대령했다.

“그래.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리세트가 공작저로 돌아갔다는데 일이 늘어나면 더 늘어났지, 줄었을 리가 없지!”

솔직히 노년의 집사의 눈에는 어른이 된 두 남자의 이런 싸움이 한심해 보이기만 했다. 유치한 것도 아니고 한심. 한심 그 자체였다.

델피니움 공작저로 쳐들어가지도 못하는 걸 보면 잘못은 이쪽에 있는 것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 않는가. 그에게는 공작보다 후작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공작 부인께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요?”

고심하고 건넨 말에 후작은 으으으, 절망 섞인 탄식을 흘렸다. 양손에는 헝클어진 금발을 꽉 움켜쥔 채였다.

“세 분께서 함께 계실 때는 공작께서도 주인님께 일방적으로 화를 내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집사는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파멸에 이른다면 또 모를까.

“지금은 셋이 만나면 안 돼.”

그가 그들 앞에 나타나면 리세트는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할 텐데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속상하니까!

“설마, 주인님께서 잘못을 저지른 쪽이 공작 부인입니까? 아이고, 어쩌다 그런…….”

“아니야! 나는 피해자라고!”

버럭 집사의 말을 자른 아트반 크리프는 오늘의 일감이자 거짓말의 대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상당히 두툼한 걸 보니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치졸한 요한 델피니움!”

아기만 태어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네 앞에서 꼭, 아빠 소리를 먼저 듣고야 말겠어!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아트반은 오늘도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다소 거칠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깊은 밤을 타고 쭉 이어졌다.

❖ ❖ ❖

한 몸이 된 듯 꼭 끌어안은 연인에게 달빛이 내려앉았다.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고 있지.”

요한은 졸음이 몰려온 눈가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손끝에 닿는 가는 속눈썹이 보드라웠다.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라며.”

“그래도 약속한 것보다 오래 걸렸잖아.”

“안 졸려서 괜찮아.”

요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리세트는 조금 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사락사락, 부드럽게 감돌았다.

“너무 바쁜 공께서 일주일씩이나 시간을 내 주시다니. 고마워요.”

장난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번에는 꽤 애를 썼으니 부인께서도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언제는 안 그랬나요?”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번져 왔다.

한 번. 다시 또, 한 번.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관능적인 열기는 없는, 담백하고 애정이 충만한 그런 가벼운 키스였다.

요한은 아늑한 불빛이 번진 초록빛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설핏 잠기운이 묻어나지만 또렷한 총기가 느껴지는 그 눈을 깊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그렇게 바라보았다.

지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싶은 건, 생각해 봤어?”

불현듯 스친 고민을 지우기 위해 요한은 질문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이 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광장으로 놀러 가기. 같이 아기방 꾸미기.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워 있기.”

“더 없어?”

“아! 깜빡했다. 광장에서 아이스크림 먹기. 초콜릿 맛으로.”

“오늘 낮에도 얘기했던 거잖아.”

“혹시 잊어버렸을까 봐.”

“안 잊어.”

단호한 대답이 괜히 듣기 좋아 리세트는 넓은 품에 꼭 붙었다.

요한은 뺨을 간질이는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카데미에서 리세트와 재회했을 때, 저 애는 어쩌면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은빛 머리카락은 여전히 그날의 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퇴색되지 않은 추억의 색채였다.

안녕. 다시 만나서 반가워.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던 그 입으로 리세트는 결코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꺼내 놓았다.

“중간에 바쁜 일 생기면 꼭 얘기해 줘.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처럼 애꿎은 집사만 괴롭히지 말고.”

“싫어.”

미간을 찡그린 요한은 단호하게 답했다.

일정을 비우려고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데.

아트반 크리프를 굴리고 있다는 걸 알면 리세트는 절대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아직까지 리세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이번에는 아트반 크리프가 죄를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는 모양이지. 그래도 여전히 짜증 나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럼 이렇게 하자. 마지막 날에는 나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고, 너는 내 옆에서 업무를 보는 거야. 어때?”

“뭐, 책?”

요한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미리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거야. 왠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오늘도 하늘이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일어나 책과 싸운 리세트가 떠올라 요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 시험은 끝났잖아. 리세트의 부탁이라 매몰차게 거절하기는 힘들었지만 침착하게 설득하려 노력했다.

“온종일은 안 돼. 대신 저녁 식사를 끝마친 후에는 원하는 걸 해.”

“그럼 저녁까지 침대에 누워서 뭐 해. 마지막 날은 좀 쉬고 싶었는데 다른 걸 해야 하나?”

“침대에 누워서 뭘 하겠어.”

품에 안긴 작은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한 반응에 요한은 피식 웃음 지었다.

“요한 너, 아기도 듣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리세트,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편히 쉬고 싶다는 너의 의견을 존중해서 실컷 낮잠을 자려고 한 것뿐인데.”

요한은 마치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호색한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빤히 리세트를 응시했다. 그 기막힌 얼굴에 잠시 화가 솟구쳤지만 리세트는 허, 탄식하며 맞닿은 이마에 힘을 실어 밀었다.

“낮잠, 좋네!”

등을 돌리고 누운 리세트의 뒷등으로 요한은 바짝 몸을 붙였다. 전보다도 더 야윈 몸의 선이 더욱 잘 느껴져 기분이 가라앉았다.

리세트가 입덧으로 고생하고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나날이 살이 빠져 가는 것도. 하지만 그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은 이 불안감을 잠재워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아 델피니움. 사랑하는, 너무도 아꼈던 동생이 불현듯 떠올랐다.

동생을 품고 있던 어머니가 얼마나 수척해진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는지, 그 몸이 얼마나 야위어 갔는지 리세트의 몸을 깊이 안은 순간 생생하게 기억났다.

노바르 로슈만. 릴프랑 약초. 그리고 너, 리세트 델피니움.

요한은 달갑지 않은 궁금증을 그만 떨쳐 내기로 했다. 지금, 그의 품속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이불을 끌어당기는 소중한 연인이 이 궁금증을 해결해 줄 테니까.

“궁금한 게 있어, 리세트.”

“갑자기? 뭔데?”

“노바르 로슈만이 릴프랑 약초로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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