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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54)화 (54/151)

54화
편지

“주인님, 잠시 집무실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꼭 확인해 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공작 부인의 침실로 들어선 로드니는 경직된 미소를 띤 얼굴로 사정을 고했다.

“무슨 일이지?”

“……저, 이곳에서 설명하기에 적절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웬만하면 기다리려 했다. 주인님께서 마님과 잠시 떨어지는 시간이 생긴다면 그때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그런데 도통 그럴 기미가 안 보이지 않는가.

일주일 동안은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거라 단언하더니, 주인님은 정말 마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낮부터 밤까지, 저녁 식사를 끝마친 지금까지도.

못마땅한 듯 공작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그 모습도 곧 깨어지고야 말았다.

“어서 다녀와.”

아쉬움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마님의 목소리에 공작의 눈썹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금방 올게.”

“알겠어. 어서 가.”

“조금만 기다려.”

잠시 떨어지는, 기껏해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이별의 시간일 텐데 공작은 아내의 이마와 뺨에 작별의 키스를 남겼다. 이별이랄 것까지 있나. 넓게 보면 한 공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지?”

침실을 나서자마자 공작을 둘러싼 부드러운 분위기는 모조리 지워졌다. 로드니는 이번에도 애매한 답변을 전했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요한은 집사가 지었던 모호한 그 미소의 원인을 마주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편지였지만, 그 편지를 쓰고 이곳으로 보냈을 남자의 이름이 문제였다.

요한은 의자에 앉으며 거친 손길로 봉투를 찢었다. 옆에서 편지용 나이프를 꺼내 들던 로드니는 다시 그의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카에덴 델피니움. 이 이름이 가져다주는 건 불쾌함과 짜증뿐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 남자의 입에서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리세트 델피니움. 소중한 아내의 이름이 편지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리세트 델피니움. 어때? 이 이름을 먼저 본 순간 내 편지가 장렬하게 찢어지진 않을 듯싶은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아이를 갖게 한 걸 보면 사랑은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남들은 다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하고. 참 이상한 일이지. 사랑하는 부인에게 자신의 아이를 주다니. 델피니움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아.

이제야 후계에 대한 욕심이 생기셨나? 뭐, 사내라면 어쩔 수 없는 욕망이긴 하지. 그 욕망을 델피니움 공작께서 이겨 내지 못하신 게 신기할 따름이야.

그래서 궁금해졌어.

사랑이야?

아니면,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제 피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갖고 싶었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공께서 내게 전해 줄 편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

사랑하는 아내와 무사히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내가 필요할 거야. 이제 곧, 아이도 출산하게 될 테니 말이야. 내 연구는 거의 완벽에 다다랐으니 걱정하지 마.

공께서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공작 부인일 테지.

혼자 릴프랑 약초까지 구해다 쓸 정도면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긴 걸 아는 단계인 것 같던데, 저대로 방치해도 괜찮나?

그럼 모쪼록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 주길 바라.

소중한 조카를 위해, 카에덴 델피니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전부 쓰레기 같은 내용만 담긴 편지는 우악스러운 손아귀 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화르르 타오른 파란 불길이 편지를 집어삼켰다. 새카만 재가 투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릴프랑 약초를 거론하는 걸 보면 이 정신 나간 작자가 리세트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 노바르 로슈만에게 붙여 놓은 감시자가 마지막 날에 올린 보고서에도 그 약초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리세트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도 감시를 붙이다니.

요한은 릴프랑 약초에 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리세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의심은 금세 접었다. 노바르 로슈만이 진행하는 연구 과제에 그 약초가 필수적인 재료라는 걸 확인했다.

만일 리세트가 저 약초로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그건 필시 수업과 관련된 일일 터였다.

훌륭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가 마력을 개화시키지 못해 헤매는 어린아이나 쓸 법한 약초를 사용할 일이 없지 않은가. 마력의 폭주 또한 리세트와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가 그의 아이인 줄 알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놈이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한의 아이가 아니니까.

마음을 흔들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요한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내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처럼 기쁠 일인가. 잠시 든 사소한 의문은 그대로 흘려보냈다.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사람을 더 붙여. 눈치가 빠르고 자기 몸 하나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킬 수 있는 자로. 이왕이면 전투 계열의 마법사가 좋겠지.”

“알겠습니다, 주인님.”

재가 된 편지를 짧게 살핀 요한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러운 일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리세트에게로. 소중한 그의 연인에게로.

❖ ❖ ❖

하녀들은 우울함에 빠져 있었다. 메이 하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마님을 공작에게 홀랑 빼앗겨 버린 것이 그 감정의 원인이었다.

사용인 휴게실에는 푸념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다 마님과는 제대로 말도 못 해 보고 방학 학기가 시작되겠어.”

“생각보다 입덧이 안 심하시고 몸도 덜 힘드시면 다음 정규 학기도 계속 다니시지 않을까?”

“마님께서 힘드시지 않은 건 좋은 일이긴 한데, 그럼 우리는…….”

“주인님께서도 참 너무하시지. 장장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못 본 마님을 그렇게 쏙 낚아채 가시다니.”

마님을 위해 준비한 디저트. 마님을 위해 준비한 입욕제. 마님과 아기님께 도움이 될 좋은 약들. 그 약을 위해 주치의와 약초 상점의 주인을 닦달하고 꼼꼼하게 확인한 시간이 머릿속을 스르륵 스쳐 갔다.

며칠 밤을 새워 공들인 환영 인사를 공작이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너희는 이대로 포기할 거야?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우렁찬 메이의 외침에도 하녀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만 포기하는 것이 심신에 이로웠다.

너무 아쉽지만 방법이 있나. 마님의 옆을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님인 것을.

“메이, 네가 주인님을 이길 수 있겠어?”

“그, 그건……!”

모든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말에 메이가 막 불끈 쥔 주먹에서 힘을 풀 때였다.

“지금 주인님께서 집사님과 함께 집무실로 가셨대!”

반가운 소식을 전한 하인은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히다 흠칫 멈추어 섰다.

“자, 누가 갈래?”

“빨리! 시간이 없어!”

허둥대는 하녀들을 뒤로한 채 메이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메이 하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하녀들의 외침도 메이의 발걸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저 가는 사람이 차지하는 거 아니겠어?”

❖ ❖ ❖

요한이 떠나간 뒤에도 리세트는 아기의 방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가, 아빠가 너를 위해서 준비한 거래. 마음에 들어?”

신발에 손가락 세 개를 집어넣어 본 리세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정도는 무리 없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듯했다. 대체 얼마나 작으면 이럴까.

“너무 신기하다. 너는 정말 이렇게 작게 태어나는 거야?”

리세트는 조금 둥근 태가 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돌아다녔다.

아이를 위해 요한이 준비한, 소중하고 예쁜 곳. 물건을 다 들여놓지는 않아 조금 황량하지만 햇살이 가득 들어올 때는 그리 싸늘해 보이지는 않았다. 차가운 색감을 지녔지만 따듯한 요한의 눈동자처럼.

“아빠가 너를 위해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기쁘다. 그렇지?”

리세트는 조금 다리가 아파 침대가에 잠시 멈추어 섰다. 폭신해 보이는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도 처음에는 이렇게 작았을까? 상상이 잘 안 돼.”

아기에게 다시 말을 건네던 무렵에 메이가 나타났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과하게 긴장한 듯한 얼굴이 보였다.

“마님, 시간이 없어요. 어서 가야 해요!”

리세트는 품에 안고 있던 곰 인형을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것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으로 판단한 성질 급한 하녀는 리세트를 이끌어 욕실로 향했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일주일간 차지하고 계실 테니 지금이 함께 있을 마지막 기회라며, 방학 학기가 이대로 시작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다며 메이가 불만을 토로했다.

“주인님은 매일 기숙사에도 가시면서 참 양심이 없으세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욕실 안에는 뭉근한 수증기가 퍼져 있었다. 욕실 안에서 서성거리던 하녀 두 명을 발견한 메이의 눈동자가 불만스럽다는 듯 번뜩였다.

“메이, 우리가 준비한 걸 마님께 다 선보이려면 시간이 없어.”

“다른 애들은 얌전히 결과에 승복해서 우리만 온 거야. 어서 시작하자.”

“결과라니?”

리세트가 궁금해하자 하녀들은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다.

“태교에 좋은 내용은 아니에요, 마님.”

순순히 궁금증을 접은 리세트는 하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저희가 약초 상점에서 마님과 아기님께 좋은 약재를 많이 지어 왔어요.”

“주치의 선생님께 이미 확인도 다 받았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귀한 약초와 영양가 있는 식재료, 그리고 요한 델피니움.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이야기의 끝에서 하녀들은 훌쩍거리며 울음을 참아 냈다.

“마님께서 쓰러졌다고 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제는 괜찮으신 거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이제는 정말 아프지 않아.”

그 상황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한 그녀들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참혹한 광경을 모두 지켜본 메이는 리세트의 손목과 가슴, 쇄골과 이어지는 목 부근을 찬찬히 살폈다.

리세트는 그녀가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눈치챘다.

아마, 상처겠지. 얼마 전까지 흉터로 남아 있던 그 상처는 며칠 전에 지웠다. 조금 겁이 났지만 역시 몸이 자신의 마력은 받아들이는 것을 무사히 확인한 날이었다.

가슴을 가린 젖은 머리채를 등 뒤로 넘기며 리세트는 메이의 볼을 콕 눌렀다.

“봐, 이제 다 괜찮지?”

결국 메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너무 다행이에요, 마님.”

아이처럼 우는 메이를 다른 하녀들이 부둥켜안았다. 많이 걱정했는지 그녀들도 끝내 눈물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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