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약속할게
서류를 보던 요한은 손에 쥐고만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메이 하핀이 리세트를 빼앗아 간 탓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면 리세트와 내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하녀들이 제법 단호한 얼굴로 리세트를 데려가 버렸다. 얼마든지 그들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리세트가 자의로 따라갔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류나 보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단둘이 보낼 시간을 고대하던 요한과 달리 리세트는 아쉬운 기색이 전혀 없는 얼굴로 폴짝폴짝 뛰듯이 하녀들을 따라갔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요한은 결국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그만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갔다. 청량한 바람과 밝은 웃음소리가 그를 맞아 주었다.
만개했던 장미가 하나둘 떨어진 정원의 길 위에 리세트와 하녀들이 모여 있었다.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리세트의 얼굴에는 그 아름다운 꽃을 닮은 싱그러운 웃음이 가득 맺혀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녀들의 웃음소리는 잠시도 끊기지 않았다.
햇살 아래에 서면 금빛으로 물드는 신비로운 은발은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고 고결해 보였다. 잠잠한 시선이 리세트의 배 위에서 멈춘 순간 요한은 탄식 섞인 한숨을 뱉었다. 아기가 자라나는 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몸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너와 다시 만난 후로 천천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그러니 마땅히 기뻐야 하는데 묘한 공허감이 마음을 지배했다.
요즘 리세트는 잘 웃었고 속상하면 울고 투정도 부렸다. 함께 잠이 들고 아침이 오면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대체 왜?
리세트와 그 사이에 결코 좁혀지지 못할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도 초조함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벽 하나가 둘 사이를 갈라놓은 듯했다.
네가 내 곁으로 돌아왔고, 이제 곧 아이도 태어나겠지. 리세트, 네가 그토록 바랐던 아이가.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그러니 지금도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눈동자는 리세트의 아이가 자라나는 배 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마님! 제가 맛있는 걸 잔뜩 챙겨 왔어요!”
한 하녀와 그녀의 뒤를 쫓아온 다른 하녀들은 디저트를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간식을 가져오는 그녀들 뒤로 또 다른 사용인들까지 합세하기 시작했다. 주방장과 정원사를 비롯해 말단 하인들까지 저택의 사용인들은 죄다 나올 태세였다.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두면 끝이 안 날 듯싶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요한은 정원으로, 리세트가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주인님?”
메이 하핀은 마뜩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급히 숨겼다. 사용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길을 터 주었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리세트는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반가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에 요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가자.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 ❖ ❖
정원을 나서 저택으로 들어올 때까지 요한은 잠시도 리세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좋아할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어쩌면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 뒤에 숨긴 기대감과 불안함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보여 줄 게 뭐야?”
리세트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한 번 꾹 힘을 주며 질문을 건넸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두 눈이 요한의 긴장감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보면 알아. 직접 봐.”
“그게 제일 못된 짓이야.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말 안 해 주는 거.”
리세트는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원에서 로비를 지나 이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오는 곳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드나든 곳이니 당연히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겠지. 하지만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원하는 곳에 당도한 것인지 요한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여기야? 원래 빈방 아니었어?”
“이제는 아니야.”
깨끗한 방 안으로 들어온 순간 리세트는 말을 잊은 채 가만히 멈추어 섰다.
당연히 무언가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한 곳이니까.
그런데 이 방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가 방 한곳에 정돈된 모습으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걸 보니 선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리세트의 눈길이 머무르고 있는 건 상자로 만든 거대한 산이 아니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침대. 마치 갓난아기가 쓸 법한 작고 앙증맞은 침대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설마…… 아니겠지.
들썩이는 마음을 눌러 보아도 기대감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태어날 아이가 쓸 방.”
❖ ❖ ❖
로드니는 편지를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주인께서 꼭 보셔야 할 편지를 분류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그는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구나.
행복감이 차오른 눈에 안타깝다는 감정이 번진 건 누군가의 편지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런.”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트반 크리프. 그 이름과 후작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봉투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공작이 최근 그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잘 알기에 로드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 편지를 품에 챙겨 넣었다.
공작은 발견하는 순간 버리라고 명했지만 차마 냉정하게 곧바로 명을 이행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크리프 후작의 편지는 주방의 불씨가 되어 활활 타오를 것이다. 활용 못 할 쓰레기가 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겠지.
마님과 크리프 후작을 동시에 떠올린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우리 마님께서 유산을 하셨다고 했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이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라 심란해졌다.
“주인님께서 무언가 착각하신 건 아닌가.”
중얼거리던 로드니는 바닥으로 떨어진 편지 하나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 이름이, 왜?”
편지를 단단히 봉하고 있는 실링의 문양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바로 델피니움, 이 가문의 문양이었으니까.
카에덴 델피니움. 멍하니 그 이름을 바라보던 로드니의 이맛살이 점점 찌푸려졌다.
부디, 주인님께서 이 편지를 보고 노여워하지 않으시길.
그는 공작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문제의 편지를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 ❖ ❖
요한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 주었다.
작디작은 옷과 알록달록한 손수건을 본 리세트는 멍한 얼굴로 요한이 건네는 물건을 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감싸는 듯했다.
“많이 작지? 나도 처음에 봤을 때는 너무 신기했어.”
요한은 말이 없는 리세트를 응시하다 다시 차례대로 물건을 꺼냈다.
“이건 신발. 이것도 너무 작더라. 작지 않은 게 없었어.”
이번에도 리세트는 말없이 신발을 받아 들었다.
“신기하지 않아?”
눈을 내리뜬 채로 꾹꾹 눌러 보기만 할 뿐 리세트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입술을 닫은 요한은 조금 머뭇거리며 리세트의 손을 감쌌다. 신발과 손수건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머물렀다.
“마음에 안 들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안심한 요한은 마지막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나란히 누워 있는 작은 곰 인형들이 있었다. 처음 본 순간 둘 다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귀여운 인형이었다.
“침대 위에 놓으면 예쁠 것 같았어.”
“…….”
“자, 여기.”
리세트의 품에 안긴 인형들은 더욱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그 인형을 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다소 불편하게 구겨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언제 산 거야?”
“오래되지는 않았어.”
리세트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려 부단히 노력했다. 밑으로 기울어지려는 입꼬리는 당겨 올려 보고, 자꾸만 찡그려지는 눈매는 애써 활짝 펴 보며.
요한, 너는 어떤 마음으로 이걸 사 모은 거야?
“왜 너 혼자 갔어. 나랑 같이 가지.”
“그냥. 나도 모르게.”
“그런 이상한 대답이라니. 네가 직접 가서 산 건데 모르면 어떡해.”
하지만 사실이니까. 어째서 그곳을, 아기들의 물건을 파는 그 상점을 지나치지 못했는지 요한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변덕을 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리세트가 아닌 그 무엇도 그의 계획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 순간에는 일정이나 회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냥 가 보고 싶었다. 그대로 지나치면 왠지 계속 생각하고 후회할 것 같아서.
“인형도 마음에 들어?”
“응. 고마워. 너무 예뻐. 정말…… 예쁘다.”
상자를 닫고 다시 리세트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의 코앞으로 인형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까만 코가 반질반질 예쁘게도 빛나는 하얀 곰 인형이.
“이걸, 왜?”
“모르겠어. 그냥 묻지 말고 받아 주면 안 될까요, 델피니움 공작 각하?”
옅은 웃음이 묻어나는 얼굴로 요한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갈색 곰 인형을 품에 안은 리세트와 눈을 맞추자 그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부인께서 주시는 것이니 특별히 받도록 하지요.”
“네에. 감사합니다.”
사이좋게 곰 인형을 하나씩 안은 두 사람 사이로 포근한 빛이 내려앉았다. 리세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그 너머의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 나도 너랑 아기용품 사러 가고 싶었단 말이야.”
임신을 처음 확인받았을 때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내 숨겨 온 그 마음을 살며시 드러내 보이자 한겨울처럼 코끝이 시큰거렸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같이 가 주려고?”
“당연하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요한, 너는 우리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혹시 아이가 듣고 슬퍼할까 봐 리세트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들추지는 않았다. 대신 환하게, 더 큰 미소를 지으며 요한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와 인형의 부드러운 감촉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음에는 나랑 꼭 같이 가. 약속해 줘.”
“그래. 약속할게.”
꼭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리세트는 활짝 웃어 보였고, 요한은 입을 맞추어 왔다.
평화로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