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랑이란
의문과 함께 묘한 불쾌감이 찾아왔다.
내가 이겼어. 그렇게 얘기하는 눈이라 그런 듯했다. 물론 리세트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상쾌한 웃음을 남긴 노바르 로슈만이 먼저 나간 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학생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제 강의실에는 일곱 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그시 이를 꽉 깨문 리세트는 맹렬한 기세로 답안지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전부 고치고, 꼼꼼하게 문제를 다시 살펴보았다. 마침내 펜을 내려놓고 소리 없는 긴 한숨을 흘리는 순간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험의 끝과 방학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소리였다.
“리세트, 드디어 답안지를 제출할 마음이 생겼니?”
혼자 남아 있던 것도 몰랐던 리세트는 허둥지둥 답안지를 제출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시험이 끝나면 노바르 로슈만과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터라 조급해졌다.
“짧은 학기였지만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리세트.”
강의실을 나가려던 리세트가 몸을 돌려 세웠다.
“우리 방학 학기에도 만나야지.”
“선생님도 나오실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와아, 정말요?”
환하게 웃는 제자의 얼굴을 보며 케서린 로티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세트의 방학 학기 등록 신청서를 보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저 얼굴을 본 순간 작은 후회도 남지 않았다. 포기한 연구가 조금 아쉬웠지만 뭐, 그런 건 언제든 다시 해도 좋지.
아무래도 찝찝하니까.
셀번 밀란의 말, 갑자기 쓰러진 너. 우연이라면 좋을 테지만 글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강의실에서 만나자.”
리세트에게 다가간 그녀는 조금 마른 듯한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수고했어.”
❖ ❖ ❖
“선배님!”
카페로 향하던 길목에서 누군가 리세트를 불러 세웠다.
“레이나?”
무언가 손에 쥐고 온 아이가 리세트 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동글동글한 보랏빛 사탕이 담긴 투명한 주머니였다.
“선물이에요. 그동안 고마웠으니까,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는 선물!”
리세트는 방긋 웃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다음 학기에 봐요. 꼭이요!”
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레이나가 달려 나갔다. 리세트는 아이의 뒷등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고마워! 우리 다음 학기에 또 보자!”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용케 들었는지 레이나는 다시 몸을 돌려 손을 흔들어 주었다. 리세트는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카페가 보일 무렵까지도 리세트는 조금 멍한 상태였다. 입 안에서 녹고 있는 사탕의 맛이 달았다. 포도 맛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선배님은 포도를 좋아하나 보다. 쉬는 시간에 포도만 먹고 있어요.’
실습 시간이 끝난 후 질문이 더 있다며 강의실에 남았던 레이나가 넌지시 물었던 말이 혀끝에 감도는 맛과 함께 떠올랐다.
시험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이 났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이만하면 행복한 학기의 마무리라고, 리세트는 웃으며 결론지었다. 카페에 들어와 노바르 로슈만을 마주할 때도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공책이 확실히 효과가 있어요.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 보는 게 좋겠죠?”
리세트가 말한 공책은 릴프랑 약초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와 지정한 일종의 암호로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다른 과목을 준비하는 것도 수월하니까요.”
다른 과목은 릴프랑 약초의 또 다른 효능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정체된 마력 개화에 가장 큰 효험을 보이는 릴프랑 약초는 마력 폭주 현상도 어느 정도 막아 주는 역할도 하니 먹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제가 드린 공책은 잘 챙기신 겁니까?”
“당연하죠.”
노바르 로슈만은 릴프랑 약초를 달인 물을 작은 유리병에 나누어 담아 주었다. 어젯밤 리세트는 옷 사이사이에 그 유리병을 숨겼다.
이제 리세트는 전처럼 그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밉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옛날에 가졌던 깊은 분노는 많이 해갈된 상태였다.
“방학 학기가 시작되면 보겠네요. 한 학기 동안 많은 도움을 줘서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놀랐는지 노바르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찡그린 눈으로,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은 그 강렬한 눈이 익숙했던 리세트는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경이 웃는 모습은 참 적응이 안 되네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옛날에는 쭉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잖아요.”
“쭉 찢어진 눈…….”
“이렇게요.”
눈꼬리를 비스듬히 당겨 올린 리세트가 어서 보라는 듯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제가 언제 부인을 그렇게 쳐다봤습니까?”
“이렇게 보셨거든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친하게 지내는 다른 동기생들한테 물어보세요. 로슈만 경이 나를 싫어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다시 생각해 보니 속상해져 리세트는 힐끔 그를 쏘아보았다.
“진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얼마나 좋아요.”
“…….”
“그때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어요?”
그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슬퍼 보여 리세트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싫어한 적, 없습니다.”
들려오는 말도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리세트가 막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리세트, 이제 집으로 가자.”
어느새 요한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 ❖ ❖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은 이상한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생각보다는 시험을 잘 본 것 같아. 다행히 모르는 문제가 없었어.”
“그래? 좋겠네.”
“응! 노바르 로슈만이 제일 먼저 나가기는 했는데 왠지 내가 더 잘 본 것 같아. 느낌이 그래. 원래 빨리 나가는 애들이 사실 별거 없잖아.”
“그건 그렇지.”
“이제 내가 수석이고, 내 밑이 노바르 로슈만이야. 맨 위에 네 이름이 사라진 것만 빼면 다 그대로지?”
간신히 주인을 따라온 수행인은 공작 부부를 살피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한쪽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고, 다른 한쪽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심기가 불편한 쪽은 공작이었다.
“옛날에는 로슈만의 머리카락을 하나라도 더 뽑지 못해 안달이더니, 많이 친해진 것 같네.”
“같은 조라 그런가? 옛날 생각만 하면 조금 얄밉긴 한데, 지금은 착해졌어.”
“로슈만이 너에게 도움이 되긴 해? 너보다 멍청한 녀석이, 굳이 너에게 필요한가.”
“내 편이 하나라도 있는 게 좋잖아.”
“……네 편?”
수행인은 바짝 허리를 세워 앉았다. 마님께서 부디 부정해 주시길.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 같은 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응. 노바르 로슈만이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줘.”
마님. 거기서 그런 대답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수행인은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들릴까 싶어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움이 필요해? 나도 아카데미로 갈까?”
결국 헛기침을 요란스럽게 한 수행인은 흠칫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정한 눈빛과 서늘한 눈빛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마님.”
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를 뒤로한 채 공작은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네 생각은 어때.”
“뭐가?”
“내가 아카데미로 가는 것 말이야.”
“네가 와 봤자 도움은 안 되잖아. 우리는 다른 계열인걸.”
똑똑한 우리 마님께서는 눈치가 없으시구나.
공작이 바라는 답은 당연히 하나일 것이다.
응.
그 쉬운 대답을 내다 버린 마님께서는 참 해맑게도 웃고 계셨다.
아무리 시간을 쪼개 쓴다 한들 공작은 절대 아카데미로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내에게 네가 필요하다는 그 대답을 듣고 싶어 저러는 것일 텐데……. 속으로 한숨을 쉬던 그의 뇌리에 아찔한 생각이 스쳤다.
아니지. 주인님께서는 기어코 어떤 수를 찾아내 아카데미로 갈지도 모른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내는 일이 없는 분 아닌가.
“아아, 나는 필요 없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로슈만이 지금은 나보다 더 필요하다는 거고?”
리세트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공부할 때나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나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 따지자면 너지.”
한시름 놓은 수행인이 막 웃음을 되찾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만약에 필요하다고 해도, 네가 아카데미로 올 수는 없는 거잖아.”
“네가 필요하다면 가.”
“거짓말.”
“내가 못 할 것 같아?”
무슨 짓이든 감행하고야 말겠다는 공작의 눈빛에 수행인은 다시 바짝 긴장했다.
“아카데미 말고, 이렇게 보는 게 더 좋아. 네가 학기에 등록해도 우리는 수업 시간도 다르고 강의실도 멀리 떨어져 있잖아. 더 서운할 것 같아.”
다소 차갑게 굳어 있던 가면 같은 공작의 얼굴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게 보였다. 수행인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대답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편히 쉬어.”
“나도 그럴 생각이야. 그래야 다시 갔을 때 열심히 하지.”
“그전에는 나랑 시간을 보내고.”
“너랑? 안 바빠?”
“응. 안 바빠.”
공작은 최근 미친 듯한 속도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 그 시간 동안 옆에서 그를 지켜본 수행인은 기가 질려 진저리 쳤다.
그래, 바쁘시지 않겠지.
중요한 일은 전부 밤을 새워 처리하고, 다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 뒤 크리프 후작에게 넘겼으니.
사랑. 그것이 무어라고 공작은 시간상 결코 불가능한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회의 일정을 전부 앞당겨 시간을 모조리 비워 버렸으니까.
오늘부터 일주일. 공작이 만든 그 휴식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려 나갔는지 모른다. 물론 제일 갈린 건 공작 본인이겠지만.
“리세트,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음……. 아직 생각 안 해 봤어. 너는?”
“나는 어디든 좋아.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광장으로 갈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어.”
“차갑잖아.”
“많이 먹지는 않을게.”
감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무표정한 공작이 아내 앞에서는 잘 웃고 떠들고 유치한 질투심도 드러냈다.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목격할 때마다 그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공작 부인은 환하게 미소 지었고, 공작의 얼굴에는 그 미소를 닮은 표정이 만들어졌다.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구나.
수행인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햇살 아래에서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는 저택이 보였다.
드디어 마님께서 공작저로 귀환하실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