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직까지 포기를 하지 못한 머저리들이 꼭두새벽부터 공작저에 들이닥쳤다.
일찍 일어나 리세트의 아침 식사를 챙겨 주고 돌아온 요한을 맞아 준 건 그 머저리들의 애원과 눈물이었다. 이미 다 돌려보낸 후였지만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하지만 곧 사나웠던 마음이 가라앉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제 11시입니다, 주인님.”
로드니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고했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세트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시계와 달력을 몇 번이고 확인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다. 굳이 다시 한번 시선을 들어 시계를 본 요한은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쥐었다. 서류를 내려다보는 눈길도 찻잔의 온도가 번진 듯 안온해졌다.
종이를 넘기는 동작은 물이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고 펜을 쥐어 들어 글씨를 써 내려가는 손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모든 움직임에 나른한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시험과 수석. 그것에 목숨을 걸기로 작정한 것인지 요즘은 리세트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눈을 뜬 모습을 보는 게 힘든 것이지만.
요한은 며칠째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잠든 리세트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교복을 입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들켰을 때는 허둥지둥 놀라서 금세 달아나더니, 이제는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로 먼저 잠에 빠져 있었다. 잠든 머리맡에는 책 한 권이 꼭 놓여 있었다. 요한이 누워야 할 자리에는 여러 권의 책이 쌓여 있곤 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후 침대에 눕는 모양이지.
요한은 침대에 한가득 쌓인 책을 책상 위로 옮긴 뒤에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리세트는 마치 어떠한 이상도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지 그런 수고로운 짓을 계속 반복했다.
뭐, 그것도 오늘로서 끝이겠지만.
리세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숙사를 살펴볼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굳이, 네가 필사적으로 숨기는 걸 그처럼 치졸한 방법으로 알아내야 할까.
이 저주스러운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무언가를 조사 중일 거라고, 요한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지금은 사랑해 마지않는 시험이 한창이니 잠시 멈춘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리세트의 몸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니 이대로 조금 더 기다려 주는 것으로 스스로 타협을 보았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리세트에게 붙여 놓은 수행인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감시가 아닌 보호, 정말 그렇게 얘기할 수 있나.
자조 섞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던 요한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그 같은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매일 속을 끓이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이나 쉬웠다.
언젠가 리세트가 말해 주겠지.
그 남자를 수색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굳이. 그래,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리세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고, 리세트는 언제나 아카데미 안에 있었다.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도, 리세트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은밀한 움직임도 없었다. 단지 하나 거슬리는 건 아트반 크리프가 종종 만나러 온다는 것 정도. 그 정도쯤이야 용서해 줄 의향이 없지는 않았다. 노바르 로슈만은 논외. 생각하는 시간조차 아까웠으므로.
아직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명령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손에 잡히지 않을 사람을 이대로 계속 찾다 보면, 그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로. 다시는.
요한은 가벼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리세트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준비는 완벽합니다, 주인님.”
리세트의 침실로 들어서자 환한 얼굴을 한 하녀가 그를 맞이했다. 메이 하핀. 리세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신이 난 그 하녀였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이곳에 들어서는 족족 이 하녀를 마주쳤다.
설마 잠도 여기서 자나.
요한은 은근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 하녀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어때요? 완벽하지요?”
메이 하핀의 말대로 리세트의 침실은 깨끗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 눈이 부실 정도로.
리세트가 떠나기 전과 비교해 달라진 건 침구뿐이었다. 가구의 배치도, 작은 물건 하나도, 이 방에 놓여 있던 컵 하나까지도 전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요한은 햇빛의 냄새가 묻어나는 이불을 한번 쓸어 본 뒤 몸을 돌렸다.
문 앞에 선 그가 말없이 복도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자 메이 하핀이 달려와 자랑하듯 얘기했다.
“말씀하신 대로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확인하러 가실 거지요?”
요한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곧고 바른 자세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흔들리던 손에 점차 힘이 실렸다. 그 경직된 손으로 요한은 직접 어느 방의 문을 열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산 모든 물건을 예쁘게 포장한 상자가 방 한편에 가득 쌓여 있었다. 상자와 작은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황량하기만 한 그 방을 마지막으로 요한은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아카데미로 갈 거야.”
다가온 수행인에게 통보를 남긴 요한은 유유히 계단을 내려갔다. 황망하게 그를 바라보던 수행인은 뒤늦게 계단으로 달려왔다.
“지금, 당장이요? 하지만…….”
“회의 안건은 그대로 크리프 후작에게 넘겨. 수행은 없어도 돼.”
집무실로 급하게 달려가는 수행인의 발걸음 소리가 투명한 햇살 아래에 녹아들었다. 하녀들의 웃음소리.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정원을 누비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 신경을 긁어 대기만 하던 소음들이 지금은 마치 음악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이 저택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리세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드디어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는 오늘.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오후의 시작이었다.
❖ ❖ ❖
시험은 휘몰아치듯 찾아와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가 적막한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지친 얼굴의 학생들은 다 죽어 가는 눈으로 공책을 끈질기게 보고 있었다. 전투적인 그들 사이에서 홀로 평온한 리세트는 단연 돋보였다.
강의실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아 있던 리세트는 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끔뻑거리는 눈에는 희미한 잠기운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졸음은 쏟아지고, 노바르 로슈만이 구해 온 릴프랑 약초로 여러 실험을 거듭하는 터라 피로가 상당히 누적됐다.
리세트에게 예전처럼 공부에 쏟아부을 시간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요한이 오는 시간에 맞추어 시험 범위 내용을 공부할 뿐,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기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 수업 시간 외에는 시험 범위를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이대로 학기를 마치는 건 조금 아쉬워 계획을 세워 보았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요한이 없는 시간에는 아기를 위해서, 요한과 함께하는 시간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것으로 정해 두었다. 앞선 계획은 완벽하게 수행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요한이 곁에 있을 때는 공부나 그 외의 것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얼굴. 하필이면 리세트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남편의 얼굴이 장애물이었다.
요한이 나쁜 마음을 품고 리세트를 방해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눈으로 리세트를 보고, 그 입술로 이름을 속삭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놀았다. 가만히, 오래오래.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리세트도 그 장난스러운 손길을 따라 하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지.
혼자 있을 때는 연구 일지를 보며 애를 태우고 아기에게 별일 아니라며 안심시키기 바빴는데. 요한이 곁에 있으면 불안감은 옅어지다 못해 자취를 감추었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던 고민거리도 한순간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요한이 오는 시간만 되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한이 있으면 그랬다. 릴프랑 약초 덕분인지는 몰라도 마력의 흐름이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어 무거웠던 마음이 나날이 가벼워지는 것도 한몫했다.
모든 게 잘될 것 같았다.
마력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요한에게 다 말해 주자.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는데, 전부 잘 해결되었다고. 네가 고민하던 문제가 나의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냐고 물어봐야지. 이제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방법을 찾았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아트반의 아이가 아니라, 요한 너의 아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사르르 미소 짓던 리세트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 건 강의실의 문이 막 열린 순간이었다. 그제야 현실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다들 준비는 잘했겠지?”
교탁 앞으로 걸어간 로티 선생님의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시험 대비를 철저하게 했던 어린 날에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리세트를 휩쓸었다.
예전에는 긴장이라는 걸 해 본 적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두려워했던 것도 같지만 어느 정도 공부량이 쌓인 후에는 지식의 수준이 일정 궤도에 올라 더는 시험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점수를 확인하고 싶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감정이 너무도 생경했다.
이게 뭘까.
편안한데 불편하고, 불편한 동시에 편안한 이 감정은 도대체 무어라 정의해야 할까.
리세트는 시험지를 받고 나서야 그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번 시험은 처참하게 망칠 것이라는 직감. 그리고 그러한 예감에서 비롯된 약간의 불안과 초조함이 혼재된 이상한 감정이었다.
나흘간 몰아쳤던 시험 범위 내용이 머릿속을 유영하는 기분이라 이마가 지끈거렸다. 이마뿐인가. 눈썹 뼈 부근도, 관골에도 지끈거림이 옮겨 갔다. 머릿속에서는 지진이라도 난 듯했다.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을 어떻게든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야 했다.
부릅뜬 눈으로 리세트는 답안지를 유심히 살폈다.
이만하면 완벽한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더 좋은 답이 있을 것 같아 망설여졌다. 이대로 제출하면 분명 아쉬움이 남을 테니 다시 처음부터 살펴보기로 했을 때였다. 앞자리에서 시험을 보던 노바르 로슈만이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레 뒤를 돌아 리세트를 흘깃 내려다보더니 생긋 미소 짓기까지 했다.
……저것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