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50)화 (50/151)

50화
새로운 감시자

“무슨 소리야?”

“네 남편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아파서 끙끙 앓은 친구 한 번 안아 봤다고 나한테 해코지하면 안 된다는 소리.”

허락의 의미로 리세트가 가까이 다가가 팔을 벌리자 아트반은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그날…… 너 쓰러졌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몸은 또 왜 이렇게 마른 거야. 요한이 너 밉다고 굶기기라도 해? 다시 우리 집으로 도망 올래?”

기억보다도 더 마른 듯한 몸에 마음이 아팠다. 여전히 작기만 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몸속에 아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게 아트반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맞아. 방학 때는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좋겠어. 요한 걔는 사람을 좀 지치게 할 때가 있잖아. 너는 아기가 커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할 텐데 걔가 그걸 지켜볼 수나 있겠어? 아닐걸. 벌써 미래가 훤히 보인다. 그 집, 당분간 발걸음을 끊어야겠어. 아, 어차피 가지도 못하는구나. 그럼 네가 우리 집으로 오면 되겠네. 어때?”

진심처럼 들리는 말에 리세트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으니 아트반이 내심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원이랑 저택은 다 복구했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어떤 방아쇠가 되었는지 아트반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아, 네가 말해 준 덕분에 깜빡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네.”

“뭔데?”

“네 남편 돈 뜯을 구실. 복구 비용을 내놓든지, 이제는 그만 괴롭히든지.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해야겠어.”

“요한이, 너를 괴롭혀?”

“별건 아니고. 쪼잔하고 사소하게. 하여튼 지겨워 죽겠어.”

가벼운 포옹을 마무리한 두 사람은 아트반이 미리 마련해 둔 자리에 앉았다.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모포 위로 맑은 햇살과 웃음소리, 걱정이 가득 담긴 말들이 내려앉았다.

“바로 너를 보러 오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늦은 이유는 네 남편, 그리고 찾아오지 못한 것도 네 남편 눈치가 살벌해서 피했다는 말을 아트반은 꿀꺽 삼켜 냈다. 아무래도 너무 구차한 변명 같아 보이니.

“미안해하지 마. 안 그래도 되니까.”

“아니야. 너한테도 미안하고, 아가한테도 미안해. 이 정도면 임시 아빠 자격 박탈이네.”

“아기가 이번에는 특별히 용서해 준대.”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조용히 말하는 리세트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정말? 너무 고마워.”

“이제 케이크 먹자. 공부하느라 머리를 너무 굴렸는지 배가 고파.”

리세트가 골라 온 케이크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사이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트반은 일부러 요한이 좋아하는 케이크부터 해치웠다. 나름의 복수였다.

“방학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 공작저에 있을 거야. 돌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 일 때문에 요한이 많이 걱정하더라고.”

리세트는 방학 계획을 세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어렸을 때의 그 친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트반은 괜스레 반가워졌다.

“네가 언제 다 커서 엄마가 된 걸까.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조그만 꼬맹이였는데.”

추억에 흠뻑 젖어 들어 아트반은 대범해졌다.

“아기가 지금의 너를 닮아야 할 텐데 걱정이야.”

“굳이 지금인 이유가 뭐야?”

“어렸을 때의 네가 좀 많이 대단했어야지. 아기한테 주먹 다루는 법 가르쳐 주고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리세트는 생긋 웃으며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그 시절 그대로야? 나랑 요한은 이제 곧 엄마 아빠가 되는데.”

“……너나 요한이나 이럴 때는 똑같이 짜증 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있겠어?”

불퉁하게 중얼거리던 아트반은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마음이 놓인다. 리세트, 제발 부탁인데 승부욕 좀 줄이자. 적어도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리세트는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한 탓에 쓰러진 것으로 마무리된 그날의 소동을 기억해 냈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트반이 들으라는 듯 푹 한숨을 쉬었다.

“제발 아프지만 마. 알겠지?”

“응.”

“지금은 괜찮은 거, 정말 확실한 거지?”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 밝게 웃는 얼굴 때문에 덜컥 불안감이 차올랐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라 아트반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넌지시 물어보아도 리세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하나도 없어. 지금은 너무 멀쩡한걸. 아팠던 게 다 거짓말 같아.”

“네가 아픈 이유에 아기도 연관된 건 아니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야. 못난 엄마 만나서 아프기나 하고. 아기가 너무 고생만 하는 것 같아.”

아트반은 의문으로 가득 찬 눈으로 리세트를 살폈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

“당연히 그래야지.”

정말 아이와 어떠한 연관도 없는 거 맞아? 나한테도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야?

묻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아트반은 꾹꾹 참아 냈다.

만약 또다시 리세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요한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면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나의 소중한 친구 리세트, 너를 잃을까 두려워서.

아트반은 남은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입 안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상하지만 너무나 평화로운 오후였다.

“시험 잘 봐.”

더 캐묻는 대신 아트반은 그나마 리세트가 좋아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

“당연하지! 기대해. 이제는 내가 수석이야.”

“알겠어. 빈집 털이범.”

“뭐라고?”

“요한이 있었다면 너는 차석이었을 테니까.”

부정할 수 없는 말이 리세트의 말문을 턱 막히게 했다. 당황스러워 눈만 깜빡이던 것도 잠시, 리세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자기는 낙제생이었던 주제에!”

버럭 외치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쾌청한 하늘이 유독 눈부신, 아름다운 늦여름 날 오후의 한때였다.

❖ ❖ ❖

미리 연락해 둔 약초 상점으로 들어선 노바르는 잎이 가장 파릇파릇하고 줄기가 두꺼운 것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다. 진열대에 놓인 약초를 하나씩 살펴보는 눈빛은 시험공부를 할 때만큼이나 진중했다.

“릴프랑 약초는 여기 있는 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손님.”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핀 끝에 노바르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곱게 포갠 그의 두 손에는 릴프랑 약초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얼굴처럼 규칙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약초를 보는 주인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이걸…… 전부, 다 사시겠다는 겁니까?”

노바르는 대답 대신 은화 세 닢을 건넸다.

허허,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던 주인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꼼꼼하게 약초를 포장했다. 참 이상한 손님이 아닌가.

들어올 때도 주위를 지나치게 살피는 듯 보였는데 지금도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나갔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저 약초를 가져가는 걸 보면 마법사, 그러니 귀족일 텐데.

“살펴 가십시오.”

이미 떠나간 손님에게도 정중히 인사한 주인은 금세 다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누군가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따로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방금 나간 그 남자. 어떤 약초를 사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사례를 거론하는 걸 보면 필시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잠시 망설이던 주인의 손 앞으로 금화 다섯 닢이 내밀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잡았다.

“릴프랑 약초였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꽤 많은 것을 산 모양이던데요.”

미심쩍다는 듯이 남자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인은 그가 다시 금화를 빼앗아 갈까 황급히 덧붙였다.

“저도 이해는 안 되지만, 분명 릴프랑 약초였습니다. 전부 다, 그것으로만 사 가셨어요.”

❖ ❖ ❖

오늘은 참 장사가 잘되는 날이라고, 주인은 문득 생각했다.

물론 약초값을 제대로 지불한 건 한 사람뿐이고, 다른 한 남자는 그 손님이 산 약초를 캐물으며 돈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누군가 다시 첫 번째 손님에 관한 것을 물었다.

“회색 머리. 두 손 무겁게 무언가 들고 나갔던 그 남자 산 약초가 무엇이지?”

이마를 가린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서늘했다. 싸늘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으려나. 어찌 되었든 정말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

그래서 더욱 그의 표정이 신기해 보였다. 모든 것이 서늘한데, 그 눈에 담긴 감정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너무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이라 주인은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거, 너무 일이 커지는 거 아닌가?

그의 고민을 읽은 것인지 정체불명의 손님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 이게, 이게 무슨!”

그 커다란 손바닥을 무심코 바라본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친 사람이 아닌가? 만지기만 해도 독성이 온몸에 퍼지는 약초를 저 손님은 태평하게 만지고 있었다.

“나는 이걸 만져도 죽지 않겠지만, 그쪽은 아마…… 한 시간 안에 죽겠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까 나간 그 회색 머리의 남자가 무엇을 사 갔지?”

“릴, 릴프…….”

너무 무서워 혀가 굳은 그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본 남자가 생긋 웃어 보였다. 가늘게 접힌 눈매도, 미소를 머금은 입술도 퍽 보기 좋았으나 그런 걸 살필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 웃고 있는 저 눈 속에 숨겨진 눈동자가 너무나도 서늘해 오금이 저렸다.

“릴프랑?”

“네! 네, 그렇습니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준 남자는 그만 상점을 나갔다. 짤그랑, 종소리가 이 만남의 끝을 알리듯 경쾌하게 번져 나갔다.

길을 잘 걸어가던 남자는 갑자기 멈추어 서 기다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며칠간 잠을 못 자 뻐근했던 눈에 활기가 돌았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릴프랑 약초를 사들이고 있단 말이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조카는 그런 아내를 감시하고 있고. 시간도 없을 텐데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들이실까.

“정말 재미있는 여자야. 만날 날이 벌써 기대되는걸.”

유쾌하게 웃은 남자의 목소리는 상점가를 지나 더 멀리, 아카데미까지 뻗어 나갔다.

“아, 오랜만이네.”

거침없는 발걸음은 정문을 훌쩍 넘어 연구실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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