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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9)화 (49/151)

49화
단 하나의 이유

황궁의 중앙 회의장은 침묵에 잠긴 채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가도 다시금 굳게 다물기를 한참. 결국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가 나섰다.

“델피니움 공,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황제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요한을 직시했다. 그러자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요한에게 쏠렸다.

원망, 혹은 기대. 그들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었지만 요한은 무감한 얼굴로 턱 끝을 까딱여 보였다. 건방진 태도였지만 그것을 지적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델피니움 공작이 나타난 것만 해도 기적이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확한 이유를 말해 보게.”

“그 이유라는 걸, 어제도 그제도 심지어 몇 달 전에도 얘기해 드렸습니다.”

높낮이 하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는 얼마쯤의 귀찮음과 숨기지 못한 짜증이 묻어났다. 황제를 응시하는 시선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귀족들은 깊은 탄식을 삼켜 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요한 델피니움 공작은 제 몫을 할 나이가 되자마자 전장에 나서야만 했다. 그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 갓 성인식을 치른 나라의 재원 모두가 전장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 델피니움을 완벽하게 대체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약간의 희생을 보더라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요한 델피니움은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살았다.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자랄 나이를 지날 때도 공작은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카데미의 실습이라는 명목을 빌려 상급 몬스터들이 있는 곳으로 차출된 게 한두 번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호해 줄 부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다행히 어린 공작은 순순히 회의 결과를 따랐다. 일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어른이라는 이름을 빌려 그들이 어린 공작에게 주입한 긍지 높은 가치였다.

델피니움 공작 가문은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제국을 지켜 낸 무기이자 보물이었고, 어린 나이지만 공작위를 승계한 가주로서 요한 델피니움 공작은 그 이름에 걸맞게 마땅히 전장에 나가 싸워야만 한다고, 제국을 지켜 내야만 한다며 몰아세웠다.

실상을 따져 보면 몰아세운다는 말도 우스웠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린 공작은 단 한 번도 반기를 들고 나선 적이 없어 지금의 상황이 더욱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지게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은 그 생각을 부정할 마음이 없었다. 도가 지나쳤다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미 맛본 승리의 쾌락을 포기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지금껏 어떠한 불만도 표출한 적 없는 공작이 강경하게 버티는 이유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찼다. 겨우 아내의 곁에 있겠다는, 그런 사소한 이유 하나로 일을 이토록 복잡하게 만들다니!

그들의 머릿속에서 올해 초 공작이 단단히 못을 박듯 이야기한 약속 따위는 휘발된 지 오래였다. 몬스터의 유해 작업을 끝마친 뒤에는 1년간 어떠한 임무도 수행하지 않겠다는 그 말을, 귀찮은 일까지 떠맡아 준 공작을 향해 박수를 보내던 날들의 기억을 전부 지웠다.

그들 눈에는 장성한 공작도 아직 핏덩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 잘 생각해 보시게.”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 중 하나가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공 한 사람의 결정이 제국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어. 서부 지역으로 파견된 인원들의 보고서가 그저 기우에 그친다면 좋겠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몬스터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피해가 막심하네. 간신히 복구되어 가던 마을은 또다시 황폐해지고 원성은 높아지겠지. 그게 공작이 바라는 일인가?”

말을 끝마치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저 하나가 제국의 미래를 바꾸다니. 너무 과분한 말씀이군요.”

요한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펴 나갔다. 그들과 보낸 유년 시절이 그 얼굴들 위로 하나씩 떠올랐다.

‘선대 델피니움 공작이 살아 있었다면 아주 자랑스러워하겠군.’

12살. 몬스터들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채로 귀환한 날 들은 말이었다.

‘조금 더 진군할 수는 없겠나? 내가 누구보다 공의 실력을 잘 아네. 아직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남아 있지 않은가. 조금만 힘을 내 주게.’

13살. 동기생들과 실습하러 가다 붙잡혀 끌려온 곳에서, 작전을 이해하지 못한 머저리 때문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을 때 들은 말이었다.

‘이대로 뒤를 치는 것보다 돌아가는 게 낫겠지? 공이 먼저 길을 열어 주는 건 힘든가?’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을 눈앞에 두고 죽으러 가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말을 들은 건 14살 무렵이었다.

제국을 위해 헌신해라. 죽는다면 그 또한 영광이리라. 귀족의 도리를 다하라. 가족을 잃은 순간부터 지금껏 들어온 소리였다.

그런 인생이었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지겹도록 들은 그 말 따위, 요한에게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들 뜻에 따른 건 오직 하나, 리세트 하리펜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은 리세트가 나고 자란 곳이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지. 리세트는 아직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종종 찾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니까. 그 애가 부모님 꿈을 꾸고 눈을 뜨는 날이면 그곳으로 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니까.

그래서였다. 리세트의 추억과 사랑이 잠든 곳이 망가지는 게 싫어서.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추억할 무언가도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지켜 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말하는 곳은 리세트의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내를 남겨 두고 갈 이유가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 후계자를 잃었으니 상심이 크겠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면 되겠나?”

꽤 단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곳곳에서 헉하고 숨을 죽이는 소리가 곧 그 뒤를 따랐다.

애걸하는 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 요한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지겨운 대치 상황이 길어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인내심 같은 거, 바닥난 지 오래였으니.

“제국을 위해 헌신해라. 죽는다면 그 또한 영광이리라. 귀족의 도리를 다하라.”

한 마디 한 마디를 더해 갈수록 요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걸 어떻게 잊겠나. 귀족이면 응당 지켜야 할 가치이지 않나. 혹시 공작이 잊은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잘 기억하고 있군.”

“역시,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요한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제 공의 차례입니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남자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토벌전 때도, 후방 지역을 정찰할 때도, 이번 유해 작업 때도 빠지신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닙니까? 위급할 때를 대비해 마력을 비축해 두셨군요.”

요한은 제 앞에 놓인 위임장을 밀어 주었다. 그러고서 시선을 들어 파랗게 질린 몰골들을 찬찬히 훑어 나갔다. 시선을 받은 몇몇 쓸모없는 놈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드는 걸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일은 잘 마무리된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유유히 걸음을 옮기던 요한은 공석 중 하나를 잠시 보았다. 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귀찮은 놈의 부재가 문득 짜증스러워졌다. 꼭 필요할 때만 없지.

비어 있는 자리 위로 떠오르는 아트반 크리프의 얼굴을 지우듯이 요한은 회의실의 문을 주저 없이 밀었다. 아, 중요한 인사를 잊을 뻔했다.

“무사 귀환을 기원하겠습니다.”

그가 전장으로 떠날 때마다 듣던 성의 없는 인사였다.

❖ ❖ ❖

리세트는 신중한 눈길로 나란히 늘어선 케이크를 살펴보았다. 전부 맛있어 보였지만 다 살 수는 없었다.

평소였으면 다른 곳에 시선도 주지 않고 초콜릿케이크를 골랐을 텐데. 포도를 꾸준하게 먹기 시작한 뒤로 입맛이 변했는지 지금은 동그랗게 조각된 과일이 듬뿍 얹어진 생크림케이크만 눈에 띄었다.

제 몫을 고른 리세트는 다른 하나를 더 고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바로 선택할 수 있었다.

점원을 부르려던 리세트의 손이 움찔거린 건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던 케이크 하나가 눈에 밟힌 탓이었다. 그 케이크만 먹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서. 고개를 붕붕 저어 요한의 얼굴을 지워 낸 리세트는 점원에게 눈짓하며 서로 멀찍이 떨어진 케이크 두 개를 가리켰다.

“이거랑 저거, 두 조각 주세요.”

점원은 알맞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라 쟁반 위에 올렸다.

“저…… 잠깐만요!”

포장지를 가지러 가던 점원을 불러 세운 리세트는 결국 신경 쓰이는 케이크 한 조각까지 포장해 달라고 했다.

카페에서 나온 리세트는 조금 무거워진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손에 든 상자로 온 신경이 몰린 듯했다. 모양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조심조심 걸었다.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무섭구나.”

분명 두 개만 사려고 했는데. 이걸 먹을 사람이 지금 옆에 없는데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리세트는 또 하나의 습관처럼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높아진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은 오늘도 새하얗고 탐스러웠다.

“아가, 너무 예쁘지? 엄마는 구름이 많은 하늘이 좋아. 너는 어떤 하늘을 좋아하게 될까? 아빠도 구름 많은 하늘을 좋아하거든.”

숲 길목에 당도하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키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금발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트반!”

리세트를 향한 밝은 갈색빛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위로와 걱정이 가득 담긴 눈물이라는 것을 리세트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내가 오늘 수업은 늦게 끝난다고 했잖아.”

리세트는 더욱 밝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코끝이 조금 시큰거리는 듯했지만 바보처럼 울고 싶지는 않으니까.

“요한도 없으니까 안아 봐도 돼?”

아트반은 팔을 넓게 벌리며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는 듯 환하게 웃었지만 눈물을 참는 모습이 더욱 잘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요한은 없는데, 요한의 사람이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을 거야.”

리세트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웃고 있던 아트반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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