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8)화 (48/151)

48화
틀린 답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시험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간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던 공작저의 분위기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는 일러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지만 작은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우리 마님께서 돌아오실 날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사용인 휴게실 테이블에 놓인 달력을 본 한 하녀가 감격에 찬 얼굴로 오늘의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처음에는 크기가 작았던 동그란 도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어느새 눈을 뭉쳐 굴리는 것처럼 불어나 있었다.

하녀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달력의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아카데미의 시험 날. 업무를 보듯 딱딱하게 써 놓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기쁨과 환희였다. 하녀들에게 아카데미의 시험이란 마님의 귀환이나 다름없었으니.

“시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설렘이 듬뿍 담긴 하녀들의 목소리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번졌다.

보고서를 들고 계단을 오르던 수행인은 떠들썩한 웃음소리 덕에 경직된 표정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에 가까워져 가자 다시 찾아오는 긴장감에 어깨가 굳어 버렸다.

문을 두 번 정도 두드렸지만 집무실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제야 그는 오늘 낮에 공작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오늘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신다고 하셨지.

다시 계단을 올라간 그는 햇빛이 비쳐 드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의 기척이나 말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는 3층은 한낮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평온 그 자체인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노크를 한 후 서재로 들어섰을 때 서류를 보고 있던 공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묵례를 한 수행인은 곧바로 보고서를 건넸다.

“그만 나가 봐.”

“알겠습니다, 주인님.”

수행인이 물러가자 요한은 쥐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직 보고서는 채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수행인이 가져온 그 상태 그대로였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서재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델피니움 가문의 역사서에 관심을 보이던 리세트는 이제 완전히 시험공부에 빠져들어 역사서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있었다. 눈길도 주지 않는 듯했다. 오늘 올라온 보고서도 마찬가지겠지.

다 비슷비슷한 책이라 그새 관심이 식은 걸까.

요한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성격에 포기라…….

애초에 그렇게 식을 관심이었으면 리세트는 처음부터 그에게 묻고 궁금증을 해결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굳이 책을 찾아다녔지. 그의 곁을 떠나서, 아픈 기억이 많이 남았을 아카데미로.

가문의 역사서는 공작저의 서재에도 무수히 많았다. 델피니움가에 우호적인 책들 가운데서도 갖은 찬사로 시작해 찬탄으로 끝나는 엄선된 책들이 책장의 한 구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장을 살피던 시선은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천장으로 향했다.

리세트가 잠시 마음을 주었던 남자. 델피니움 가문의 역사. 아카데미.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그 세 단서를 엮어 다시 조립해 보기도 했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처음으로 리세트가 가문의 역사서를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의 저녁,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안겨 주던 순간을. 그 책을 받아 드는 당황한 얼굴을. 그러다 곧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을 흘려 보내던 입술을.

요한은 등받이에 몸을 조금 더 기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급변했다.

무엇이 궁금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도저히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할 것 같아 흔들렸고,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게 그의 곁에 묶어 두고 싶은 마음은 리세트의 얼굴을 보면 하얗게 지워졌다.

그 남자가 속삭였으려나. 끔찍한 소문을 달고 사는 남편을 버리라고, 자신에게 오라고. 그렇게 얘기했을까.

다시 보고서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리세트가 곁에 없어 불안했다. 리세트를 붙잡아 둘 수 없다면 그가 찾아가 옆을 지키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어 문제였다. 그러니 지금, 이 지옥 속에 발을 붙이고 서류 따위나 살피고 있는 것이겠지.

보고서에서 낯선 이름을 보면 요한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로 해당 단락을 읽게 되었다. 그 이름이 남자의 것이라면 더욱 날을 세워 보곤 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짙어질수록 미칠 듯한 불안감도 함께 찾아왔다.

이건 감시가 아니라 보호다. 리세트가 또다시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요한은 매일 보고서를 받아 보며 일과를 시작했다. 오늘이라고 다른 건 없었다.

요한은 얼마간 더 책상 위를,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보고서와 그 옆에 자리한 서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침내 결심이 선 순간 손이 나갔다. 보고서를 지나 서류로, 오늘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담긴 그것으로.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파란빛의 마력이 짧게 타오르다 한순간 사라졌다. 황제의 최종 승인만 남은 서류를 든 요한은 천천히 일어섰다.

문을 닫기 전, 그는 다시 한번 책상을 살폈다. 새까만 재가 흩어져 있는 책상 위로 환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바로 황궁으로 가지.”

요한은 계단 앞에서 대기하던 수행인에게 서류를 넘겼다. 이제 그의 손에는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요한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서재에서 멀어질수록 가벼워졌다. 빈손만큼이나 너절한 마음의 무게 또한 가벼워져 갔다.

후회는 없었다.

❖ ❖ ❖

수업이 끝난 직후 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나는 건 학부생 때나 심화 과정을 밟을 때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리세트는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도 더 종소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강의실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졌을 즈음 리세트는 옆자리를 보았다.

“로슈만 경,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당연하죠.”

책을 챙겨 드는 노바르 로슈만은 지나치게 결연한 얼굴로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성적인 눈빛이었다.

“이번에는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하는 성공은 리세트가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야속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두 사람의 첫 번째 연구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곧 시험, 그리고 방학. 공작저로 돌아가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 방학 학기가 곧바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자유롭지는 못할 터였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리세트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여러 실패를 거듭한 끝에 두 사람은 하나의 가설을 새로 정립했다.

모종의 이유로 마력이 약해진 탓에 이런 일이 생겨난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약해진 마력만 되돌리면 되는 거 아닌가?

몸속 깊숙이 웅크리듯 숨어 있는 마력을 완전히 개화시키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개화를 도와주는 효능이 있는 약초들이 이미 많이 발견되어 유통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린아이의 마력이 개화되지 않았을 경우에나 최후의 방법으로 쓰는 것이라 리세트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두 사람은 그 미약한 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시적으로 리세트의 마력이 약해진 거라면, 그 약초들을 통해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노바르 로슈만이 움직이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함께 가는 것이었지만 요한의 감시자가 통 자리를 비우지 않아 그리되었다. 언제까지고 기회만 엿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유롭지 못한 리세트를 대신해 그가 직접 그 약초를 사러 가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노바르 로슈만은 엉뚱한 말을 던졌다.

“그럼 시험지에 하나만 틀린 답을 적어 주실래요?”

괴상한 부탁을 하는 얼굴이 침착하기만 해 리세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를 마주하면서도 간만에 평온했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역시 부인은 변함없으시군요.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으면 실망할 뻔했습니다. 저도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거든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부인께서는 아직 수업이 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어서 가 보세요. 저도 이제 출발해야겠어요.”

“방금 그 말, 농담이었어요?”

“당연하죠. 저는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해요?”

“재미없었어요?”

도대체 어느 대목이 재미가 있느냐는 말을 리세트는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황당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큰 건 사실이니 착한 거짓말 한 번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뭐…… 나름 재미는 있었던 것 같아요. 조심히 다녀오고, 내일 봐요. 정말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잠시 리세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러니까 꼭, 친구가 된 것 같네요. 그때는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요.”

그쪽이 나를 엄청 싫어했잖아?

톡 쏘아붙이려던 리세트는 마주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없는 말을 남긴 그가 먼저 강의실을 떠났고, 리세트는 다음 수업을 위해 치유 계열의 강의실로 향했다.

수업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리세트는 어려운 내용을 받아 적고 중요한 부분에 따로 밑줄을 긋고 작은 별 모양도 그려 놓았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하다 보니 금세 종이 울렸다.

언제 들어도 참 맑고 고운 소리라고 생각하며 리세트는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벗어났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리세트는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를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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