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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7)화 (47/151)

47화
나를 끝까지 속이지 마

부부 사이에도 비밀이야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죽을 뻔한 사람처럼 쓰러지고 마력은 이상 징후를 보이고, 심지어 임신한 상태이지 않은가. 이런 와중에도 남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는 리세트가 신경 쓰였다.

부단히 노력한 끝에 간신히 접어 두었던 의심이 다시 깊어진 건 엊그제, 리세트가 혼자 몰래 무언가를 읽는 모습을 발견한 뒤였다.

처음에는 기말시험에 관한 좋은 책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읽다가 제자리에 돌려놓은 책의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그 책을 몰래 빌려 리세트의 눈앞에 보란 듯이 꺼내 놓고 싶어서.

하지만 리세트와 헤어진 후 다시 도서관을 찾은 그를 반겨 준 건 델피니움 가문의 역사서였다.

무언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해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기말시험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에게는 몸 상태를 숨기고, 남편 가문에 관한 책을 읽는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이렇게 몰래?

리세트에게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게 어디 한둘인가? 요한 델피니움도 이상했다.

감시자를 붙였다니. 심지어 그걸 리세트는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니!

의처증인가 싶었지만 노바르가 익히 알고 있는 요한 델피니움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공작 본인이 직접 따라다니면 모를까, 감시 목적으로 사람을 붙이는 건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왜요?”

리세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노바르의 상념이 깨어졌다.

“부인, 혹시…….”

심각한 목소리로 꺼낸 말은 맥없이 끝났다.

“제 비밀도 알려 드렸으니 부인께서도 한 가지 말씀해 주셔야죠.”

“뭐를요?”

“비밀이요.”

“그러니까요. 어떤 비밀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쪽은 눈치를 과하게 보는 탓에 하고 싶은 질문을 빙빙 돌리고 있었고, 다른 쪽은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다가는 끝이 안 나겠다는 판단이 선 노바르는 결연한 얼굴로 리세트를 보았다.

“공작께 이 일을 비밀로 하는 이유가 뭔가요?”

“경께서는 거래의 기본 규칙을 모르고 계신 것 같아요.”

뜬금없이 거래를 운운하는 리세트의 눈빛은 예리한 날이 선 듯 날카로웠다.

“거래라는 건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아야 성립되는 거잖아요. 경의 비밀은 이미 드러나 버렸으니 경은 거래의 패를 잃어버린 셈이죠. 그런데 제가, 굳이 제 비밀을 알려 드려야 할까요?”

리세트는 포도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너무도 천진해 보여 노바르는 대꾸할 말도 잊은 채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나름대로 리세트와 가까이 지낸 시간이 쌓인 덕에 노바르는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의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할 때 평소보다 속도가 빨라지고 미소를 활짝 지으면 이 상황을 그만 넘기고 싶다는 뜻. 그것은 리세트의 현재 모습이기도 했다. 제시할 수 있는 패가 아주 없는 건 아니게 되었다. 노바르는 곧장 자신이 가진 패를 꺼내 놓았다.

“당황하셨네요, 부인.”

제대로 수가 먹혀들었는지 공책을 쥔 리세트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역사서 이야기까지 꺼낼까 하다 노바르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궁지에 몰린 상대를 더한 위기 속으로 몰아가다가는 조력자 자격도 박탈당할 수 있다. 그가 필요할 테니 지금 당장 내치지는 않겠지만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면 언제든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처지였다.

조력자에서 믿을 만한 동료로 거듭나야 하니 물러서야지.

“비밀로 하시는 이유, 아주 작은 힌트라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충 단어만 던져 주셔도 제가 알아서 추측해 볼게요.”

웬만하면 모른 척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야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 이유는 제 앞에 앉아 주스 병을 만지작거리는 여자의 상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거라면 지금처럼 공작에게 비밀로 하기 힘들었다.

머리 하나가 부족한 판에, 명석한 두뇌 하나를 더 끼워 넣으면 훨씬 일이 수월해질 터였다. 공작의 감시를 피하느라 눈치를 보는 일까지 없어질 테니 그야말로 장애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을 뿐이에요.”

“만약 우리가 열심히 연구를 해도 끝내 부인의 몸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방금까지 강경하게 나오던 리세트가 조금 머뭇거렸다.

“당연히 말해야죠. 다시 몸이 아프거나 마력의 흐름이 여기서 조금 더 뒤틀리기만 해도 말할 거예요. 그전까지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보려고요.”

❖ ❖ ❖

요한은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문을 여러 번 두드려도 조용하더니.

리세트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손에 꼭 쥔 펜을 보아하니 잠이 들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지. 불을 밝힌 걸 보면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기숙사로 돌아온 듯했다.

공부할 때는 꼭 머리를 묶는 습관은 여전한 듯 그의 아내는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있었다.

“불편하지 않아?”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리세트의 머리 끈을 매만졌다.

“풀어 줄까?”

요한은 살며시 끈을 당겨 매듭을 풀어 주었다. 포근한 빛에 물든 머리카락은 금빛 햇살을 머금은 물결처럼 굽이쳤다. 그 감촉을 즐기듯 아프지 않게 당겨 보고 입을 맞추어도 리세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아서 침대에 누여 주는 순간에도 리세트는 곤한 잠에 빠져 눈썹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너무나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멀쩡한 침대는 버려두고, 왜 저런 곳에서 잠을 자는 거야?”

요한은 피식 웃으며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간지러운 듯 오물거리는 입술 위에 다시 한번, 부드러운 인사처럼.

어질러진 책상 앞으로 다가간 요한은 밑줄이 잔뜩 그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정말 공부에 미치기라도 한 것인지 공책과 두꺼운 마법 서적, 각종 자료에는 빼곡하게 필기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함께 시험공부를 하던 기억들이 문득 떠올라 책장을 넘겨 보았다.

다른 계열이라 리세트가 공부하는 책에 적힌 내용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아는 내용이 있을까 싶어 요한은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동글동글 말랑해 보이는 리세트의 필체와는 사뭇 다른, 각진 필체가 눈에 띈 건 그 순간이었다.

매일 붙어서 공부를 한다더니. 노바르 로슈만이려나.

“요한?”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불편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런 급변하는 제 마음이 우스운데, 그것이 또 싫지만은 않았다.

“일어났어?”

리세트가 눈가를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어?”

“방금.”

“깨우지…….”

몽롱한 얼굴로 뺨을 문지르던 리세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떡 일어나 책상 앞을 막아서는 동작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답지 않게 민첩했다.

리세트의 눈은 책상 곳곳을 누볐다. 다행히 책상에 펼쳐 놓은 책들은 시험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어디에서도 노바르 로슈만과의 연구 일지가 발견되지 않아 막 안심한 찰나였다.

“왜 그래, 리세트?”

작은 등을 빤히 내려다보던 요한이 리세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꼭…….”

흥미로운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요한은 생긋 미소 지었다.

“무언가 숨기는 것 같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이실까?”

요한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그림자가 가려 주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무나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 장난스럽게 찡그리는 콧잔등을 살펴 내려간 요한은 리세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이마를 맞댄 채로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쪽, 뺨에 키스했다.

책상과 그의 몸 사이에 갇힌 리세트를 안아 들어 책상 위에 앉혀 주었다. 시선의 높이가 비슷하게 맞추어지자 리세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한번 베어 물고 싶은, 선명하고 예쁜 분홍빛으로.

방학 학기에도 기숙사를 계속 쓰겠다고 했지.

집으로 모든 짐을 옮기자고, 독립된 서재를 하나 더 만들어 준다고 해도 리세트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글쎄. 왜 그랬을까.

잠결에도 급하게 달려오던 리세트가 떠올라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내 눈을 피해 무언가를 숨기려면 이곳이 최적의 장소이긴 하겠지. 내가 언제까지 너에게 속아 주어야 할까.

결코 달갑지는 않은 의문을 되새기던 요한은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고민의 흔적을 지워 냈다. 책상 위를 조급하게 흘끔거리는 리세트의 시선이 하도 불안해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너에게 비밀이 생겼구나. 우리에게도 그런 게 생기는 날이 오는구나.

요한은 자조 섞인 한숨을 삼켜 냈다. 우습지 않은가. 제 비밀은 하나도 얘기해 주지 못하면서 리세트에게만 그것을 강요하고, 그러다 또 실망하길 반복하는 모습이 한심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내 얼굴이 웃겨?”

무언가 묻은 줄 알고 손끝으로 뺨을 더듬어 나가는 리세트를 보니 또다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가 이렇게 예쁘니까, 결국 너에게 져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지. 이것도 정말 중증이긴 했다. 어쩌면 아트반 크리프의 말처럼 이미 미쳐 버린 것일지도.

“뭐야. 비켜!”

“싫어.”

왈칵 주름이 지는 콧잔등을 살짝 깨물자 리세트는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밀며 슬금슬금 뒤로 몸을 물렸다. 그래 보아야 아직도 책상 위, 그의 팔 안에 갇힌 상태였지만.

“거울 보러 갈 거야. 비켜!”

“안 봐도 돼.”

“왜 웃었어?”

“네가 너무 예뻐서.”

별 허튼수작을 다 보겠다는 듯 리세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도 어여뻐 보여 요한은 짧게 진저리 쳤다.

“역시 나는 미친 걸까.”

“정말 오늘 왜 그러는 건데.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왜 저래?”

“너야말로 왜 그래. 예뻐, 사랑해. 평소에도 자주 해 준 말이잖아.”

“그건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해.”

이상하긴 해도 걱정은 되는지 리세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 걱정을 받는 것도 좋았다. 이 맑은 눈동자에 담긴 건 오롯이 자신뿐이니. 요한은 오늘도 기꺼이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오래 기다려 줄 생각은 없지만 리세트의 하루는 그저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어떠한 이상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 괜찮겠지.

사랑하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요한은 간절히 빌었다.

리세트, 제발.

나를 끝까지 속이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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