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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6)화 (46/151)

46화
귀여워라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매일같이 레이나를 주시하고 있던 리세트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질문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레이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질문을 던졌고, 이번에는 상당히 난해하고 어려운 문제라서 리세트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건 좀 설명이 필요한 문제야. 레이나, 남아서 설명을 듣고 가도 괜찮겠니?”

떨리는 마음으로 묻고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처음 있는 일에 아이들 모두가 레이나가 앉은 자리를 힐긋거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교탁 위에 올려놓은 손이 초조하게 꿈지럭거리기를 한참. 마침내 레이나가 조그만 입술을 벙긋거렸다.

“네.”

그 후로 레이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다른 아이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설명을 해 주다 보니 어느새 창밖 너머에서부터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창문을 잠시 바라본 리세트가 수업을 끝마치자 아이들은 두 손을 곱게 포개 배꼽 앞에 모아 인사를 했다. 화답하듯 손을 흔들어 주는 시간은 꽤 길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 지나갔을 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강의실에는 두 사람만 남겨졌다. 리세트는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교탁에서 조금 멀고, 그렇다 해서 문과 가깝지도 않은 정중앙 자리에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까 물어본 거, 다시 한번 같이 봐 볼까?”

“……네.”

레이나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원하는 페이지에 당도했는지 조막만 한 손이 다시 책상 밑에 숨어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레이나는 책을 움켜잡아 등 뒤로 감추어 버렸다.

“왜? 그 책이 아니야?”

윗입술을 꼭 말아 문 아이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런데 레이나가 왜 숨기는 걸까.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더욱 푹 수그렸다. 리세트는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만에야 시선을 드는 아이의 얼굴이 빨간 사과처럼 익어 있었다.

“꼭 제 책으로 봐야 해요?”

“내 책으로 설명해 줄까?”

“네.”

리세트는 밀란 선생님께 전달받은 책을 가지고 다시 레이나에게 돌아왔다.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자 레이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눈높이가 비슷해지니 아이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새빨갛게 물든 순한 얼굴이.

“서, 선생님들은 다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어 주시는데요?”

레이나의 목소리는 겁을 먹은 것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레이나는 뒤에 꼭꼭 숨겨 둔 제 책을 펼쳐 자기 앞에 세워 놓았다. 그 책 뒤에 숨은 채로 레이나는 펜을 쥔 손을 뻗어 리세트가 펼쳐 둔 책 위의 문제를 짚었다.

“이 수식이 조금 이해가 안 돼요. 앞에서 본 내용만 보면 틀린 거 아니에요?”

책 위로 커다란 두 눈만 쏙 빼놓은 아이의 질문은 제법 날카로웠다. 리세트는 종이 한 장을 책 옆에 두고 레이나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올렸다.

“네가 생각한 수식을 그려 볼래?”

레이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힐긋힐긋 제 얼굴을 가린 책을 보는 걸 보아하니 아이가 숨기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긴장을 많이 했는지 레이나의 손이 계속 움찔거려 종이에는 제대로 된 마법식이 그려지지 않았다. 펜을 한번 꽉 움켜쥔 레이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건 그 무렵이었다.

“나중에 물어볼래요! 전 그만 갈게요.”

가방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손에서 결국 책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던 그 책이 바닥에, 하필 리세트가 앉은 자리 옆에 떨어져 있었다.

사색이 된 레이나가 다시 책을 줍는 것과 동시에 리세트는 입술을 뗐다.

“레이나가 궁금해하는 부분이 뭔지 알겠다. 그 책에 적어 놓은 건 어제 배운 수식들을 조합해 본 거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레이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리세트는 당황한 아이의 손을 이끌어 제 옆자리에 앉게 했다.

펜을 든 리세트는 종이에 방금 본 레이나의 수식 몇 가지를 옮겨 적었다. 그러자 아이는 제 책을 골몰하듯 바라보다가, 다시 리세트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이거. 여기요.”

레이나는 쭈뼛거리며 자기가 들고 있던 책을 펼쳐 리세트 앞에 올려놓았다. 고개는 여전히 푹 숙인 채였다.

“이걸, 그려 봤는데요. 그런데, 근데 좀 헷갈려서요.”

리세트는 손을 멈추고 아이의 책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다 틀린 건 아는데요. 그래서 조금…… 어…….”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리세트는 웃으며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틀려도 괜찮아. 지금은 배우는 단계니까. 레이나가 그렸다는 수식, 내가 다 봐도 돼?”

아이는 언제 책을 숨겼냐는 듯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야무지게 펜을 쥔 손은 책 곳곳을 누비며 작은 도형을 그려 냈다.

“여기서는 왜 원형을 써요? 어제 밀란 선생님께서는 이 수식에는 반드시 마름모를 써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여기, 이건 왜 그런 거예요? 이것도요! 이 문제도 이상한 것 같아요.”

리세트는 하나씩 천천히 아이의 질문을 해결해 주었고 레이나는 신이 나서 앞 장에 적어 놓은 수식까지 보여 주었다. 별무늬, 하트 무늬, 세모 무늬. 각양각색으로 제 나름대로 문제에 앙증맞게 표시를 해 놓은 흔적이 보였다.

동그라미가 많이 그려진 페이지를 넘어올 때는 레이나가 슬쩍 제 자랑도 곁들였다.

“이 단원은 모르는 게 없어요. 너무 쉬웠거든요!”

우렁찬 목소리와 씰룩이는 입술이 귀여웠다. 삼십 분간 레이나의 수많은 질문을 해결해 준 리세트는 만족감에 찬 얼굴을 한 아이를 보고 웃었다.

궁금증을 완전히 풀어낸 아이는 속이 시원하다는 말로 리세트의 웃음소리가 더욱 높아지게 만들었다.

함께 마주 보며 웃던 레이나의 리본 한쪽이 풀려 있었다. 리세트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리본을 풀어내고 다시 반듯하게 묶어 주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레이나는 아까처럼 벌떡 일어나 가방을 멨다.

“감사합니다. 조금, 많이요!”

아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 리세트는 천천히 교탁으로 걸어갔다.

펜과 연구 일지를 챙기는 순간에도 아이와 함께 끄적여 내려갔던 낙서 같은 문양이 가득한 종이를 살피게 되었다.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워 리세트는 그 종이도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문이 벌컥 열린 건 리세트가 막 잉크병의 뚜껑을 닫았을 때였다.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레이나가 강의실로 발 한쪽을 성큼 뻗었다.

“내, 내일 또 보자구요, 선배님!”

“그래, 레이나.”

활짝 웃어 준 리세트는 장난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우리, 삼 일 뒤에나 보는데?”

“그럼 삼 일 뒤에 봐요!”

민망한지 버럭 외친 아이는 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수업 시간만 하더라도 높게 올려 묶여 있던 머리채가 중간 부분에서 느슨하게 팔랑팔랑, 다소 방정맞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리세트는 도서관 건물로 들어섰다. 이제는 다시 긴장감을 찾아야 할 때였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빠르게 한 번 훑어보았다.

굳게 닫힌 사서실의 문. 열람실에 홀로 앉아 있는 노바르 로슈만. 그 외에는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도서관이었다.

요한의 감시자는 아마도 건물 밖에서 염탐하는 듯했다. 그림자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으니 리세트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리세트는 어제 보았던 델피니움 가문의 역사서가 있는 책장으로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장을 펼쳐 들고 주의 깊게 집중해 빠르게 읽어 나갔다.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역사서는 가문의 역사가 깊은 만큼이나 자료의 양도 방대했다. 웬만한 책들이 칭송하는 내용으로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가끔 저자의 의견이 들어간 부분도 있어 리세트는 그것을 유심히 살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처음에는 델피니움가의 마력 계승을 두고 꺼림칙한 일이라며 비난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어 세인들처럼 찬사를 보냈다. 아무리 파헤쳐도 실마리 하나 잡히지 않아 포기한 듯 보였다.

한 번 파헤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끝까지 노력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리세트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눈길로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완벽한 마력. 신의 가호. 제국의 위대한 유산이자 살아 숨 쉬는 기적.

이 책도 결국 그런 정리로 끝을 맺었다. 초중반부에 델피니움가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책들과 별다른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발견한 듯해 며칠 동안 기뻐하던 리세트는 허탈한 한숨을 삼켜 내며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열람실로 들어온 리세트의 기척을 느낀 노바르는 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리세트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책을 꺼냈다.

“아이들 질문이 좀 많아서요.”

노바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공책을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감시자라는 존재를 의식해 이런 사소한 동작도 꽤나 어설펐는데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애초에 이런 얼굴을 자주 하는 터라 남들이 봤을 때는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거다.

공책에 새롭게 적힌 내용을 살피던 리세트는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슬쩍 눈동자만 굴려 좌우를 확인했다. 하지만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굳이 평소와 다른 특이점을 찾는다면 앞에 앉은 남자에게서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

고개를 들자 가늘게 뜬 그의 눈매가 보였다.

리세트는 질문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지극히 태연한 그 얼굴을 보는 노바르는 지금 안고 있는 궁금증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세트의 마력을 되돌릴 방법에만 몰두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종류의 고민거리도 생겨났다.

요한 델피니움에게 굳이 숨기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바르는 진지한 눈빛으로 리세트의 눈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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