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신경 쓰여서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 주는 아이들 덕분에 실습 시간은 예정보다 이르게 끝이 났다. 자습 시간을 준 리세트는 교탁 앞에서 책장을 펼쳐 보았다.
어젯밤에 실패한 마법식이 담긴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을 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선배님 얼굴이 기분 좋아 보이는데 엄청 피곤해 보여요.”
아이들의 눈은 정확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과 끝나 갈 무렵, 리세트는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듣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리세트의 하루는 어느 때보다도 빈틈없이 빽빽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탓이었다.
아기와 변화된 마력의 상관관계.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조사. 실습 준비. 기말시험 준비.
크게 구획을 나누면 네 종류 정도로 축약할 수 있었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실습 준비나 기말시험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카데미로 온 목적 자체가 아기를 위해 델피니움 가문을 조사하고 요한의 눈을 피할 장소를 물색했을 뿐이니.
다만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해 주시는 밀란 선생님과 로티 선생님이 신경 쓰이고, 예전부터 집착해 온 성적표가 눈앞에 아른아른 맴도는 게 문제였다. 이 아이들은 또 어떻고.
그래서 리세트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나름의 타협안이었다. 낯선 마법식을 전개하는 데 마력이 많이 소모되어 기력이 쇠약해지지만 않았더라면 가뿐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벌써 기말시험이라니. 너무너무 우울해요.”
리세트가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들의 대화 주제는 기말시험으로 흘러가 있었다. 자습 시간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듯 강의실은 쉬는 시간이나 다를 바 없이 시끄러웠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시험만 기다리는 거지요? 선배님처럼요.”
맑은 눈망울을 빛낸 아이가 던진 말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리세트는 단번에 자신에게 쏠린 시선 속에서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기다림 반, 두려움 반. 시험이 다가오면 리세트의 마음속에서는 그 두 가지의 감정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곤 했다.
치열하게 공부한 결과를 드디어 받아 본다는 기대감과 혹시나 하는 두려움.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딱히 대답이 궁금하지 않았는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바빴다.
아이들을 살피던 리세트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보완해야 할 부분을 잊기 전에 빠르게 기입하고 다시 한번 훑어봤을 때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두 아이의 대화가 귀여워 저절로 귀 기울이게 되었다.
“너는 아까는 왜 그런 걸 물어봤냐. 바보야? 선배님은 우등생이니까 당연히 시험 날만 기다리시겠지.”
“우등생들은 다 그런 거야?”
“너는 우등생이 아니라서 잘 모르나 본데, 원래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그래.”
“그렇구나.”
핀잔하는 아이도, 선선히 수긍하는 아이도 귀여웠다. 리세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적당히 참으며 종이를 한 장 넘겼다.
“그런데 너는 공부도 못하면서 왜 시험 날을 기다려?”
사람에 따라서는 비수를 꽂는 말이라 리세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핀잔을 주던 아이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 보였다. 혹시나 아이들이 싸울까 싶어 리세트는 조용히 그들을 주시했다.
“시험만 끝나면 집에 가잖아. 그러니까 기다리지.”
“집에 갈 때 성적표를 들고 가야 하잖아. 안 무서워?”
“바보야, 그런 건 조금만 손보면 돼. 옆 반 애들이 이상한 물로 숫자를 지우고 글자도 다시 써 줘.”
“우와아, 정말? 그럼 내 것도 바꿔 줄래?”
아직도 성적표를 조작하는구나 싶어 리세트는 조금 웃었다. 이맘때쯤이 가장 떠들썩했지. 어른의 필체를 완벽하게 흉내 내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애들이 종종 출몰하는 시기였다.
과거를 회상하던 리세트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떠들고 있는 동급생들과 달리 혼자 구석에 서서 벽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리세트는 책장을 덮은 후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레이나는 참 대단하네. 오늘 배운 걸 벌써 복습하고 있었어?”
처음 실습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에 띄던 아이라 이름을 외운 덕분에 자연스럽게 말을 붙여 보았다. 리세트는 마법진의 오른쪽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여기, 이 부분의 도형은 조금 더 원형으로 그리면 완벽할…….”
리세트가 다가가기 전까지만 해도 마법진에 열중하던 레이나가 저 멀리, 제 자리로 뛰어가 버린 탓에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다음 실습 때도, 그리고 그다음, 또 다음 시간이 돌아와도 레이나는 리세트가 가까이 가면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뛰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일 수도 있고,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더는 다가가지 않고 일부러 시선을 오래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리세트가 잠시 고개를 돌릴 때면 어김없이 레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레이나는 홱 고개를 돌려 리세트를 철저히 외면했다.
❖ ❖ ❖
케서린 로티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리세트를 조금 두려운 듯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후식은 포도구나.”
“선생님 것도 챙겨 왔어요.”
벌써 며칠째 먹는 건지 모를 포도를 케서린 로티는 성의껏 받아 들었다. 질릴 대로 다 질려 버렸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필요 없다 말하면 혹시나 상처를 받을까 봐.
듣자 하니 셀번 밀란도 포도를 받는다 하였다.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리세트가 포도를 건넨다고.
번갈아 가면서 리세트와 식사를 함께 하는 그녀들에게 포도라는 과일은 어느새 사랑스러운 골칫거리가 되어 버렸다. 남에게 주는 건 내키지 않고, 버리는 건 더더욱 그러한 탓에 결국 입에 넣어야만 했다.
“아픈 곳은 없다고 했는데 얼굴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네. 잠을 잘 못 자니?”
케서린 로티는 오늘도 열심히 물 묻은 손수건에 포도알을 문질러 닦는 제자의 눈가를 살폈다.
“잠은 너무 잘 자요. 조금만 잠기운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요.”
“그런데 눈 밑이 왜 그리 검게 변했어.”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실습 때 마력을 과하게 사용하는 건 아니니?”
“제일 어린 학년을 맡아서 마력을 사용할 일도 드물어요.”
더 길게 말을 하면 능숙하게 둘러댈 자신이 없어 리세트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다음에는 포도 말고 다른 과일도 가져올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래. 포도 말고, 다른 것도 가져다주렴.”
로티 선생님과의 식사 시간을 끝마치고 노바르 로슈만과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도, 공부 겸 조사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리세트는 드문드문 다른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기숙사로 돌아와 오늘 새롭게 만든 마법식을 전개해 볼 때까지도 여전히 뇌리를 맴돌았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까지도 혼자 있던 레이나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리세트를 빤히 응시하다 시선이 마주치면 금세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 작은 아이가.
❖ ❖ ❖
요한의 다리를 베고 누운 리세트는 아아, 크게 입을 벌렸다. 입 속으로 들어온 포도를 와삭 씹자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침대 위에 넓게 퍼진 은빛 머리카락만큼이나 리세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그랬다.
“나를 피하는 아이가 있어.”
리세트에게 먹일 포도알을 신중하게 손수건에 닦던 요한은 더 말하라는 듯이 눈길을 보냈다.
“왜 피하는 걸까. 분명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거든.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확실해. 확실히 나를 보고 있었어.”
“그런데?”
“눈이 마주치면 바로 피해 버려. 다가가면 도망가고. 그런데 질문은 제일 열심히 해.”
자그마한 유리잔에 정성껏 껍질을 벗긴 포도 알맹이가 가득 쌓일 때까지도 리세트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그가 과육을 떠먹여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포도를 먹으면서도 심각한 리세트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요한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요한은 새로 꺼낸 손수건으로 손끝에 남은 과즙을 닦아 냈다.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걸 묻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제 또한 답하기 어려운 건 비슷했다. 한 번도 본 적도, 보고서에 올라오지도 않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럭저럭 적절한 답을 찾아냈다.
“너한테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귀족 사회의 생리를 몰라 아직 순수할 테고. 눈이 마주치는 횟수가 적지 않은 걸 보아하니 그 아이는 리세트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겠지.
“정말 그럴까?”
“응.”
만약 아니라면. 요한은 그런 가정도 하지 않고 쉽게 답을 내놓았다.
셀번 밀란이 꽤 신경을 쓴 모양인지 리세트가 맡은 반 아이들은 귀족 사회 특유의 때가 묻지 않았다. 묻을 수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거나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변방의 귀족들이니.
물론 개중에도 아닌 아이들이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요한은 누구보다 리세트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리세트가 말하고 있는 아이가 만약 곱지 않은 눈으로 리세트를 보았다면, 그의 아내는 절대 입 한 번 뻥끗하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 두었을 터였다.
절대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겠지. 속으로 끙끙 혼자 앓고, 바보같이 애를 태우며.
리세트가 필요로 하는 대답이야 뻔하다.
“어쩌면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얼굴을 유심히 볼 일도 없으니까.”
“맞아. 나였더라도 그랬을 거야. 나랑 다르게 레이나는 낯가림이 심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한번 잘 다가가 볼게.”
금세 안색이 환해지는 리세트를 담는 눈길은 한낮의 오후처럼 평온한 빛을 띠었다.
“그래. 잘해 봐.”
델피니움 가문도, 노바르 로슈만도 아닌 다른 고민쯤이야 얼마든지 기쁘게 맞아 줄 수 있었다.
요한은 벌떡 일어나 제 손에 들린 유리잔을 가져가는 리세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도 빼먹지 않고 도서관에 들른 아내가 어떤 책을 빌렸는지 알고 있었다. 육아 서적과 실습 시간에 필요한 몇 가지의 책. 그리고 책장 앞에 서서 읽기만 하고 다시 꽂아 둔다는, 델피니움 가문에 관한 역사서.
“왜 그런 쭉 찢어진 눈으로 봐?”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응시하는 시선에 요한은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켜 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