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4)화 (44/151)

44화
너를 닮은 아이

“왔어?”

역시나. 리세트는 침대에 앉아 포도를 먹고 있었다. 오물오물, 인사를 건네는 이 순간조차도 리세트의 입술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빗나가지 않은 예상이 즐겁기도 하고 얼마쯤은 허탈하기도 했다.

협탁 위에 올려놓은 쟁반에는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포도의 형체를 하고 있었을 앙상한 가지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스쳐 간 요한의 눈길은 침대로, 그의 아내에게로 향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요한은 한쪽만 볼록 튀어나온 뺨에 입 맞추었다.

“몇 개나 먹은 거야?”

리세트는 바로 대꾸하지 않고 슬쩍 협탁을 보더니 사르르 미소 지었다.

“두 개.”

“거짓말쟁이. 이것까지 합하면 세 개 아니야?”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쟁반을 손등으로 톡, 건드리자 리세트는 명민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너는 몇 개나 먹었냐고 물어봤잖아. 이건 지금 먹고 있는 거니까 제외해야지.”

이걸 똑똑하다 해야 할지, 약았다고 해야 할지.

순간 말문이 막힌 요한의 입 속으로 무언가 쏙 들어왔다. 리세트가 젖은 손수건에 문질러 닦고 있던 굵은 포도알이었다.

말랑말랑한 과육을 깨물자 단맛이 퍼졌다. 순순히 받아먹자 리세트는 또다시 그의 입 속에 포도알을 집어넣었다.

하나, 둘. 어느새 셋. 리세트가 네 번째 포도알을 툭 뜯으며 미소 지었다.

“어때. 맛있지?”

요한은 리세트의 뺨을 감싸며 기습적으로 입술을 내렸다. 리세트가 소중하게 쥐고 있던 쟁반을 빼앗아 협탁에 두고 허리를 끌어안아 더욱 깊이 머금었다. 이 모든 건 움찔거리는 손이 포도를 터트리기 전에 이루어졌다.

리세트를 누이고 그 몸 위에 올라탄 요한의 숨결은 리세트와 달리 평온했다.

눈을 꼭 감은 리세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을 요한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다시 시선을 마주하면 가슴속 깊숙한 곳에 스며든 불안이 옅어질 것처럼.

입술을 뗀 요한은 리세트의 손아귀에서 용케 터지지 않은 포도 한 알을 입으로 물어 가져갔다.

멍하니 그의 얼굴과 사라진 포도, 붙들린 제 손목을 살핀 리세트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꿈속을 헤매는 듯한 얼굴을 보며 요한은 생긋 웃었다.

“맛있네.”

요한은 리세트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맑은 두 눈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뇌리에 새겨 넣고 싶어 깊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픈 곳은?”

과즙이 조금 흘러내린 가느다란 손목에 입술을 붙이며 물어보자 리세트는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없어.”

“저녁은 뭐 먹었어?”

“고기. 잔뜩 먹었어.”

“고기?”

아프지 않게 입술로 손목을 잘근잘근 씹어 괴롭히던 요한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졌다.

고기를 먹은 것도 놀라운데 잔뜩 먹었다는 대목이 더욱 놀라웠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자랑스럽지 않으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뻤다.

“속은 괜찮아?”

“먹을 때나 힘들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먹고 나서도 힘들어하잖아.”

“포도를 먹어서 괜찮아. 울렁거리던 속이 한 번에 진정되더라. 그러니까 계속 가져와. 알겠지?”

리세트는 흘끔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무엇을 찾는지 빤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차에 있어. 아침에 옮겨다 줄게.”

“오늘은 왜 안 들고 왔어?”

“네가 상자를 보면, 바로 상자한테 달려갈 것 같아서.”

요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리세트의 콧잔등을 살짝 힘주어 깨물었다. 그러자 리세트는 곧바로 복수를 해 왔다.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이 목덜미를 안은 후 강한 힘을 주어 단번에 끌어 내렸다. 저항하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지만 요한은 얌전히 고개를 내렸다. 리세트는 그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콱, 콧잔등을 한 번 물었다가 조금 미안한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어 왔다. 약간의 감정이 실린 동작이 그저 귀여웠다.

“생각보다 아프네.”

“이보세요, 거짓말쟁이 씨. 아픈 표정이라도 짓고 말하지?”

미간을 약하게 찌푸려 보던 요한은 점점 가늘어지는 리세트의 눈매를 보다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리세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꾸 웃음이 나와서 아픈 척하는 데 실패했다. 표정을 잘 꾸며내 본들 어차피 리세트에게는 간파당할 것이 뻔해 포기도 빨랐다.

“입덧하느라 힘들 텐데 왜 고기를 억지로 먹어.”

“그래야 아기한테 좋다고 해서. 모르면 모른다는 핑계라도 댈 텐데 이미 알고 있는걸. 그러니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지.”

“힘들면 먹지 마. 그거 조금 안 먹는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

“언제는 포도 말고 음식 좀 먹으라더니.”

“마음이 바뀌었어.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아기 생각 말고.”

“어떻게 생긴 마음이길래 이렇게 자주 바뀌어?”

요한은 손끝으로 리세트를 가리켰다.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

“예쁜 마음이네.”

동시에 흘러나온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번져 나갔다.

요한은 힘을 싣지 않은 손으로 리세트를 끌어안으며 몸을 누였다. 팔에 닿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주고 조금 발갛게 물든 콧잔등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그 장난스러운 손길은 거뭇해진 눈 밑으로 옮겨 갔다.

“실습 시간에 널 괴롭히는 애들은 없어?”

뒤에 이어질 답을 알면서도 요한은 굳이 질문을 꺼냈다.

“없지. 델피니움 공작 부인을 누가 괴롭히겠어. 이제 리세트 하리펜이 아닌걸.”

거짓말쟁이.

요한은 하고 싶은 말을 눌러 담아 입맞춤을 건넸다. 부서지는 숨결에,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끝에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흘려보냈다.

어째서 너는 가장 중요한 걸 나에게는 말해 주지 않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더 좋은 소식은 내가 아가들 반으로 옮겼다는 거야. 조그만 애들이 말은 훨씬 잘 듣더라. 그 예쁜 애들이 나중에 커서 천방지축 어린이로 자란다는 게 믿기지 않아.”

빠르게 내뱉는 말들 사이로 가빠진 숨결이 흘러들었다. 포도 향기가 옅게 풍겨 오는 입술이 붉어져 있었다.

“리세트 하리펜 양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 듣는 아이였나?”

“당연하지. 얼마나 착하고 똑똑했는지 몰라. 너도 알잖아.”

“알지.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용감했지.”

“기분이 좋으니까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

배시시 웃는 리세트의 눈동자가 차츰 흐려졌다. 피곤한지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하품을 했다.

“너무 공부에 매달리지 말고 낮잠이라도 좀 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는 말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 요한은 베개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어 협탁에 올려놓았다.

“아…… 저거 다 못 읽었다. 내일 예습 시험 본다고 했는데.”

“일단 자. 일찍 일어나서 내일 읽어.”

“일찍 못 일어날 것 같은데…….”

요한은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손을 뻗는 리세트의 손가락에 단단히 제 손가락을 엮은 채로 눈을 감았다.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려 가자 요한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끔뻑끔뻑 움직이던 리세트의 속눈썹이 스르르 감겼다. 얼마간 부산하게 움직이던 눈꺼풀도 차츰 잠잠해졌다.

❖ ❖ ❖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맑은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유난히 작고 하얘 보였다. 그 얼굴이 요즘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마주 웃어 준다는 사실이 요한을 기쁘게 했다.

위태로운 평화 같다는 느낌은 저 혼자만 느끼는 별것 아닌 기우겠지.

‘아기님은 누구를 닮았을까?’

들은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말이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글쎄. 누구를 닮았을까.

요한은 색이 옅은 속눈썹을 가만가만 만져 보았다. 리세트를 닮는 게 가장 좋겠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

만약 아이가 리세트의 마력을 물려받지 못한다 해도 적당히 둘러댈 핑계까지 있었다.

기적.

리세트 하리펜의 이름 앞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그 말이 있지 않은가.

리세트가 시험에 통과해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도, 차석에 올랐을 때도, 큰 공을 세워 전장에서 돌아온 순간에도 사람들은 언제나 리세트의 노력을 기적이라는 단어로 칭해 값싼 질투심을 쏟아 냈다.

기적을 타고났지만 그 기적이 아이에게까지 옮겨 가지는 못했다고 떠들어 대려나.

만면 가득 조소를 띄운 요한은 살짝 찡그려지는 눈썹 사이를 문질러 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리세트의 얼굴은 평온한 잠에 빠진 아이처럼 순하게 돌아왔다.

이 얼굴을 닮고, 이 기적을 다시 아이가 품고 태어난다면 가장 좋겠지.

사실 아이가 제 아버지를 닮는다 해도 요한은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을 단서로 삼아 그자를 추적해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가족은 완벽한 형태로 행복을 그리며 살아가겠지.

아이가 누구를 닮든 사랑할 수 있었다.

리세트를 닮는다면 리세트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 남자를 닮았다 해도 리세트의 아이라는 이유로 사랑해 줄 것이다. 그의 아이가 아니면 기꺼이 그리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어 사랑을 퍼부어 줄 것이다.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서는 부디 리세트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길 바랐다. 간절히, 누구보다 애타게 아이가 태어날 날을 기다렸다.

“리세트 너는 왜, 그 남자를 만나러 가지 않아?”

보고서를 받아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요한을 덮쳐 왔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리세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또한 지워지지 않는 불안감을 함께 맛보았다.

정말 다 끝난 사이일까. 이제 너에게 그 남자는 더 이상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닌 거야?

보고서만 보고 있노라면 리세트가 공부에 뜻이 있어 아카데미로 간 것만 같았다. 그가 그렇게 믿고 싶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일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요한은 쉽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리세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 마음이 커질수록 요한의 눈빛은 냉랭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세워, 리세트와 리세트의 아이를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머지않아 그럴 날이 오겠지.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이 너절한 기분을 지울 수 있게. 더는 불안한 마음을 껴안고 밤을 새우지 않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