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포도
실습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노바르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리세트 델피니움. 어제와 달리 눈 밑이 퀭한 그 여자가 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밤을 새운 게 분명한 얼굴인데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온 용사인 줄 알 정도로 눈동자에 날이 서 있는 듯 보였다.
이상하기보다 무서웠다.
마음만 같아서는 보지 못한 척 회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노바르는 고르고 고른 질문을 최대한 희석해서 내놓았다.
“부인, 그 얼굴은 뭔가요?”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
성공의 여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노바르는 책장을 덮으며 가방 속을 뒤적였다. 그사이 리세트는 성큼성큼 걸어 그의 앞에 당도했다. 햇살을 등지고 선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로슈만 경한테 부탁이 있어요.”
리세트가 가까이 온 덕에 그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뭔데요?”
“어려운 건 아니에요. 좋아할걸요?”
“……확실합니까?”
간신히 초점을 잡은 두 눈에 비친 건 생긋 웃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눈 밑은 거뭇하고 입술 끝이 미묘하게 뒤틀려 올라간 여자. 미소 짓는 건지 냉소를 보이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실험에 미친 연구자가 꼭 저런 얼굴이지 않을까.
“이것 좀 확인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리세트는 품에 무언가를 안고 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노바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놀라워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설마 이걸 다 부인께서 만드신 겁니까? 하루 만에요?”
리세트가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종이 무더기를 담은 눈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대충 보아도 족히 마흔 장은 넘는 양이었다.
“당연하죠. 누구한테 도움을 받았겠어요?”
요한 델피니움.
문득 뇌리에 스친 그 이름을 노바르는 목 뒤로 꿀꺽 삼켜 넘겼다.
그쪽은 절대 아니겠지. 남편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조건을 걸지 않았나. 하지만 이 많은 수식을 혼자 만들었을까?
“어제 저 혼자 만든 거 맞아요.”
묻지도 않은 질문을 간파한 리세트는 켜켜이 쌓인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조금 더 그에게 밀었다.
풀지 못할 의문에 매달릴 바에 의문을 가질 시간조차 없게 만든다. 리세트가 며칠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실패, 아니면 성공.
어차피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리고 아마 실패 쪽으로 가능성은 훨씬 많이 기울겠지.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리세트는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면서 힘을 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장장 스무 개의 마법식을 담은 종이. 리세트의 저녁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어 만들어 낸 소중한 수식들이었다.
“이건 제가 가져가서 차차 확인하겠습니다.”
“여기서 해 보면 안 돼요?”
눈동자를 슬며시 굴리며 노바르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했다.
“성공할지 궁금해서요. 희박한 확률인 건 아는데, 그래도 온종일 마음 졸이는 것보다는 어서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기대감이 선명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하필 오늘 준비한 이야기를 저 얼굴에 대고 꺼내기가 어려워 노바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려고요.”
실망한 듯한 눈을 본 그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마법식도 계속 만들 겁니다. 단지 비중을 조금 줄이는 것뿐이에요. 여러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해 나가야 성공 확률이 올라가니까요.”
“어떤 방법인데요?”
“부인께서 저한테 흘리듯이 말씀하신 게 기억났거든요. 일시적으로 마력이 약해질 수는 없냐고 물으셨지요?”
“네.”
“거기서 착안한 방법입니다.”
노바르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서는 굴욕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말인지라 신중을 기해 차분하게 설득하려 했다.
그가 준비한 말을 마무리 지었을 즈음 리세트가 불쑥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설득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 ❖ ❖
“이번에도 완벽한 특등 상품만 가져왔습니다. 마님께서 무척 좋아하시겠죠?”
집무실로 들어선 로드니를 필두로 하인 셋의 품에는 똑같이 생긴 포도 상자가 두 개씩 들려 있었다. 사실 겉모습만 본다면 저들이 든 것이 포도 상자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상자 하나하나를 분홍색 포장지로 감싼 후 은색 리본을 예쁘게 달아 놓은 상자이니.
포도 상자를 껴안은 그들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준비된 포도들은 어디다 놓을까요?”
“전부 오늘 가져갈 테니 마차로 옮겨.”
“알겠습니다.”
힘찬 걸음으로 물러가는 하인들의 뒷등으로 불현듯 뺨이 볼록 솟아오른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한은 작게 키득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리세트는 요즘 제국에 존재하는 포도나무의 씨를 말려 버릴 작정인지 매일같이 포도 노래를 불렀다. 포도를 뜯을 때도, 입에 넣어 음미할 때도 포도가 너무 맛있다며 기뻐했다.
‘요한, 혹시 자?’
처음에 포도가 먹고 싶다 말했던 날의 기억까지 불쑥 찾아왔다.
아직 하늘이 캄캄한 새벽에 그를 깨운 리세트의 얼굴은 사뭇 심각해 보였다. 어딘가 아픈 건가 싶어 놀랐지만 다행히 그런 걱정과는 거리가 먼 이유였다. 다소 황당하기까지 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포도가 너무 먹고 싶어서 잠이 안 와.’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말에 요한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을 시작으로 리세트는 포도만 먹었다. 포도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요한의 고민도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포도만 그렇게 먹어도 되는 거냐며 물어보았다. 따지듯 물은 건 절대 아니고, 그저 걱정되어 넌지시 물어만 보았다. 자다가도 눈을 뜨고 포도를 뜯어 먹는 게 걱정이 되어서.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리세트의 반응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해? 이럴 때는 구박하지 말고 잘한다 잘한다 계속 칭찬해 주는 게 필요한 거야.’
어딜 보아야 구박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요한의 입에서는 미안해, 정말 죄를 시인하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달래 주었다.
이대로 리세트를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자기 전, 혹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포도를 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요한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리세트 본인 입으로는 입덧이 절대 심한 편은 아니라 주장하지만 요한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좋아하던 음식을 아무리 가져다주어도 쉽게 삼켜 내지를 못 했다. 갓 구운 빵에 버터와 달콤한 잼을 발라 주어도, 고기와 해산물로 만들어 낸 음식을 잘라 입 속에 넣어 주어도 마찬가지.
결국 리세트의 눈길과 손이 향하는 건 과일, 그중에서도 단연 포도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아기를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억지로 찾아 먹는 모습보다는 좋아하는 음식을 양껏 먹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저렇게 포도만 먹다가는 리세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싶어 걱정될 뿐이었다.
포도 같은 흔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구해다 주고 싶었다. 리세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하녀 몇을 불러다 모아 몇 가지 품목들을 정리해 눈앞에 가져다주었지만 리세트의 입술은 오직 하나만 불렀다.
‘오늘은 포도 안 가져왔어?’
허탈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이제는 포도를 향한 그 대단한 진심에 경탄마저 들었다.
잠이 든 리세트를 끌어안고 있으면 색색거리며 내쉬는 숨에 달콤한 포도 향기가 느껴졌다. 입술과 손끝에도 그 향기가 묻어 있었다. 향기뿐인가. 와인빛이 은은하게 감돌기도 했다.
오늘도 포도를 먹고 있으려나.
요한은 리세트의 일과가 담긴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통에 포도를 알알이 뜯어서 챙겨 가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요즘에는 아침 식사를 끝마친 후 그와 함께 포도알을 하나씩 뜯어내고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리세트를 포도에 미치게 만든 배 속의 아이도 태어나면 포도에 미쳐 있으려나.
보고서에는 포도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노바르 로슈만.
지겨운 이름이 함께하는 일과를 읽어 내려가는 성의 없는 눈길은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리세트가 맡은 치유 계열의 반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어린애들이 아니라 거의 아기라 보아도 무방한 아이들을 맡았다고 한다.
괜찮을까.
요한은 곧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보고서가 올라오기 바로 전만 하더라도 요한의 뇌리를 지배한 건 단 한 가지의 생각뿐이었다.
겁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히려 노바르 로슈만보다 어린애들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그 애들의 나이 무렵에 리세트가 특히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그런 듯했다.
하지만 이 작은 애들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반이 바뀌고 보고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웃으면서 실습에 임하고, 웃으면서 마무리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요한은 미소 띤 얼굴로 보고서를 넘길 수 있었다. 그 실습 시간에는 짜증스러운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한몫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상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은 꽤 괜찮은 기분으로 낮의 시간을, 리세트가 없는 그 시간을 견뎠다. 단조롭고 순조로우며 그저 그런 일과였다.
애써 미루어 놓은 누군가의 존재를 떠올린 건 사용인들의 휴게실을 지나왔을 때였다.
“태어나실 아기님은 누구를 닮았을까?”
그 말을 던진 하녀는 다른 하녀들의 의견을 구하듯 어서 대답해 보라며 채근했다. 그러자 모여 있던 하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님을 닮은 도련님과 주인님을 닮은 아가씨는 어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얼굴은 주인님을 닮고 성격은 마님을 닮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반대여도 좋을 것 같고.”
“온화한 주인님과 무서운 마님이라니. 그건 좀…… 안 어울리지 않을까?”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를 뒤로한 채 요한은 집무실로 돌아와 남은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마침내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요한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섯 장도 채 넘기지 못한 서류는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밤의 시간. 리세트에게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