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2)화 (42/151)

42화
언젠가 깨닫게 될 충고

“어려울 건 없지. 치유 계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수업의 최종 결정권자는 나거든.”

마음대로 실습생을 바꾸어도 되냐는 리세트의 질문에 밀란 선생님은 그처럼 간단한 답변을 주었다.

“혹시 싫으니?”

“아니요. 사실 너무 좋아요.”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함께 강의실로 향하던 두 사람의 입술에서 동시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웃음소리와 어우러졌다.

“선생님이 조금 권위가 생긴 것 같지 않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던지는 자신만만한 질문이 리세트의 미소를 한층 더 깊어지게 했다.

“네. 너무 멋있으신 것 같아요.”

“이 자리까지 올라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연구실 텃세가 만만치 않거든.”

몰락 귀족으로 변변한 영지 하나 거느리지 못한 탓에 밀란 선생님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많은 기회를 남에게 고스란히 헌납해야만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우연히 빈자리가 생겼고, 그걸 누구보다 간절하게 잡았다고. 그래서 지금은 개인 연구실까지 가진 어엿한 연구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마. 네가 연구에 더 깊은 뜻을 품는다면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까.”

뿌듯하게 웃고 계신 선생님께 리세트는 계속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실습생을 바꾸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저 애들이 너를 너무 좋아하더라. 자라나는 새싹들일수록 어른의 역할이 중요한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계열에 선배다운 선배가 없잖니. 저러다 귀여운 우리 아가들이 나쁜 물이라도 든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질색하는 목소리와 달리 리세트를 보는 선생님의 눈빛은 따스했다.

“언제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부끄러워져 리세트의 뺨이 붉어졌다.

“너를 좋게 안 보면 누굴 좋게 보겠니. 전부 시든 호박 같은 애들만 남았는걸. 어쩌다 우리 계열이 이렇게 망가졌는지 모르겠어. 네가 봐도 그렇지? 심각하지? 네가 맡은 반 아이들 수업 태도가 무척 불량하다고 하던데.”

“아니에요. 실습 내용이 조금 어려운가 봐요.”

“그것도 못 알아들으면 집으로 돌아가야지.”

뼈가 있는 말에 리세트는 멋쩍은 듯이 웃어 보였다.

방어 계열의 실습 시간은 의외로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노바르 로슈만 덕분인가 싶었지만 학부생들이 꽤나 열의를 보여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은연중에 리세트를 향해 드러내는 반감은 있지만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 갔다.

문제는 치유 계열이었다. 대놓고 비난하는 무리는 없었지만 제대로 실습을 따라오는 사람 또한 없었다.

수업 도중 번쩍 손을 들고 아프다 꾀병을 부리는 애들은 귀여운 축에 속할 지경이었다. 대부분의 학부생들은 잠을 자거나 처음부터 수업을 빠지거나, 혹은 쉬는 시간을 틈타 사라져 버렸다. 리세트를 투명 인간 취급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보였다.

“실력이 출중한 선배를 배정해 줬는데도 못 받아먹는 애들은 수업 들을 자격이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예행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렴.”

“예행연습이요?”

“너도 곧 아기를 낳을 거잖아. 혹독한 세상에 발을 미리 한번 들인다고 생각해 봐. 육아 서적은 별로 도움이 안 돼. 직접 경험해 봐야 쓴맛을 알지.”

리세트의 두 눈이 맑게 빛났다. 며칠 새 기운이 없던 얼굴에 점차 활기가 차올랐다.

“아! 저도 들었어요. 원래 부모들이 자기 마력을 물려받은 아이에게 직접 교육을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마법도 알려 주고, 좋은 책도 많이 읽어 주려고요. 예습은 꼭 시켜서 보낼 거예요.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게요.”

벌써부터 열성적인 학부모가 될 싹을 틔우는 제자를 보는 셀번 밀란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마법을 교육하는 일이야 흔하지.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아 생긴 것이 바로 이 아카데미였다. 제 자식들이 누구보다 앞서길 바라는 마음에 입학 전 혹독한 가르침을 주는 가문이 아직도 많기야 하다. 물론 얼마 안 가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저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요. 선생님들이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겠지만, 엄마인 제가 먼저 가르쳐 주면 아이에게도 더 좋지 않을까요?”

아카데미의 정수라 불러도 손색없는 도서관 건물 앞에서, 이곳의 예비 학부모가 될 아이가 포부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하지. 훨씬 좋을 거야.”

셀번 밀란은 아끼는 제자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도 아름다운 꿈이 깨졌을 때를 대비해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번 키워 보렴. 내 자식을 가르친다는 거, 마음처럼 쉽지는 않더라.”

먼저 육아에 발을 디딘 선배로서 건네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 ❖ ❖

아이들은 수업을 정말 잘 따라와 주었다.

이탈자 한 명 없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화목한 시간이었다.

리세트는 감격에 찬 마음을 안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뒷등에서 흔들리는 가방 안에는 노바르 로슈만과 진종일 머리를 맞대어 만들어 낸 마법식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가 한가득이었다.

우선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며 리세트는 선반 맨 아래에 놓아둔 상자에서 포도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입덧이 심한 편은 아니라 크게 음식을 가려 먹지는 않지만 유독 과일이 먹고 싶었다. 요한이 알아서 잘 골라 보내 주었을 테지만 리세트는 개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부터 먹었다.

‘식사는 잘 챙겨 먹어?’

그저 확인차 묻는 줄 알았는데, 요한은 그 말을 한 다음 날부터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에야 기숙사를 떠났다.

포도 상자를 들고 온 날에는 진지한 말도 덧붙였다.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가져왔지만 이건 엄연히 간식이야. 식사 대용이 아니라.’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포도를 씻어 온 요한이 떠올라 리세트는 큭큭 웃었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좀 그랬어.”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를 하다 보면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자신은 괜찮지만 요한까지 식사를 거르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 다음부터는 꼭 시간을 알려 달라고 했었다.

‘너는 지금처럼 편하게 공부만 해. 식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연히 혼자 먹고 오겠다는 소리인 줄 알았다. 집중을 깨는 게 미안할 테니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요한은 리세트 몫의 음식까지 챙겨 오곤 했다. 덕분에 리세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루도 식사를 거른 날이 없었다. 책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한 날에는 먹는 게 너무 귀찮아 음식을 거부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면 요한은 옆에 앉아서 입에 음식을 넣어 주곤 했다.

“아빠는 끼니를 잘 챙겨 먹어서 키가 큰 걸까? 그런데 조금 억울하다.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굉장히 열심히 먹었는데.”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리세트는 유치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빠가 엄마 키까지 다 빼앗아 간 것 같아.”

추억의 이야기를 아기에게 들려주며 리세트는 깨끗하게 씻은 포도를 쟁반 위에 올려 침대로 돌아왔다.

툭툭, 굵은 포도알을 떼어 내는 손놀림에 맞추어 소매에 달린 분홍색 리본이 팔랑거렸다.

메이가 열심히 챙겨 넣은 잠옷들은 생김새가 비슷했다. 소매와 원단 끝에는 프릴이 잔뜩 달려 있거나 리본이 묶인, 분홍색이나 새하얀 잠옷.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취향이 참 확고한 친구였다.

리세트는 침대 밑에 내려놓은 가방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누구일까.

이 마법식을 탄생시키게 도와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치솟았다.

오전에는 노바르 로슈만 때문에 정신이 없어 일부러 미뤄 두었지만 혼자가 되니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원본에 적혀 있던 머리글자와 탄생 연도. 휘갈기듯 대충 써 내려간 필체. 아무리 되짚어 본들 리세트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낯선 것들이었다.

한참을 종이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리세트는 후, 짧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답이 나오지 않을 고민을 붙잡고 있어 보아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서 마법식이나 전개해 보아야지.

❖ ❖ ❖

첫 번째 마법식은 실패. 두 번째도 실패. 그 후에도 마찬가지.

실패작으로 전락한 종이가 하나씩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팔랑팔랑, 가벼운 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제대로 된 마법진 하나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어느덧 마지막 종이를 쥔 손에는 좀 전보다도 더 큰 힘이 실렸다.

은빛으로 물든 손바닥 위에서 갖가지 문양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공간에 퍼지듯 허공을 떠돌던 문양이 한데 모여 마법진의 형태를 갖추었다.

성공한 걸까?

그동안은 문양이 합쳐지는 그 즉시 마력이 흩어져 버렸는데 이번에는 제법 오랫동안 수식의 형태를 유지해 내고 있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마법식이 성공작이라면, 그래서 마법진의 역할을 해 준다면 곧 무언가 몸에 변화가 나타날 테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하던 마법식이 바람에 쓸려 가듯 파스스 깨어졌다. 은빛 마력의 잔재가 공간을 떠돌다 천천히 빛을 잃었다.

“이번에도 실패네.”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누른 리세트는 포도 한 알을 톡 떼어내 입 속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과즙으로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별다른 효험은 없었다. 오히려 쓰디쓴 현실을 자각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 몸에 일어난 변화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요한이 아기를 죽이려는 것이겠지. 나를 살리려고.

하지만 선대 공작 부인들은?

리세트는 한 번도 그녀들이 아기를 낳고 죽었다는 걸 듣지 못했다. 잘 살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다고들 한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요한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모두 건강했다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게다가 요한은 이 상황을 예견해 아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궁에 빠져드는 것처럼 질문이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이 일만 잘 해결되면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요한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도 괜찮을 텐데.

“……가족.”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속으로 되뇌어 보던 소중한 이름을 리세트는 조용히 불러 보았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갔다. 마력을 가장 잘 버텨 낸 마지막 마법식이 적힌 종이는 손에 꼭 붙든 채였다.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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