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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41)화 (41/151)

41화
당당한 도둑

어제는 실패. 당연히 오늘도 실패.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실패로 맞이한 지 수일이 흘렀다.

창문 앞에서 요한이 떠나가는 걸 바라보던 리세트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미소 지었다. 마주 웃어 준 요한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리세트의 미소는 서서히 흩어졌다.

“이 사람…… 믿어도 되는 거야?”

실력이 출중한 조력자가 되어 주겠다 자신하던 노바르 로슈만은 비밀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어찌나 많은지.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 주는 게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소통에 있어서 많은 난관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리세트가 질문하면 그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현세대에서 사용되는 마법진은 이미 구현된 마법식들에서 영감을 얻어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쳤다. 마법식은 말 그대로 수식. 특정한 목적을 가진 마법사들이 여러 주문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그 수식이 제대로 마력에 감응하면 마법진으로서 기능을 하게 되는 원리였다.

어찌 되었든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는 마법진은 없다 보면 된다. 몇백 년간 이어진 마법사들의 연구는 더 이상 새로운 걸 발견해 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이룩한 상태이니.

그런데 그가 제공해 주는 마법식은 생전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영 꺼림칙했다. 다른 계열의 자료를 참고한 건가 싶어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비슷한 걸 발견해 내지도 못했다.

새것을 창조할 만큼 그 녀석이 그렇게나 뛰어난가?

조력자를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마법식을 계속 전개해 보는 건 리세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오늘은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어봐야지.

커튼을 여미는 손길에 다소 강한 힘이 실렸다. 기숙사를 나서는 발걸음도, 건물의 문을 벌컥 여는 동작도 마찬가지였다.

리세트는 가방끈을 팽팽하게 잡은 채로 실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노바르 로슈만이 따로 예약해 놓은 터라 그곳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제 말 좀 해 주실래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리세트는 톡 쏘아붙이듯 질문을 던졌다.

“부인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실패인가 보군요.”

노바르 로슈만은 읽고 있던 책을 제 옆에 내려놓았다. 벽 한 귀퉁이에 기대앉아 있는 그를 보는 리세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말을 해 줄 듯 말 듯 의뭉스러운 남자가 오늘따라 허탈해 보이는 기색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경께서만 알고 계시는 실험의 정체 좀 밝혀 주시죠?”

리세트는 대답 없는 그의 눈동자를 살짝 흘겨보았다.

“비밀은 지켜 주실 겁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뜸을 들이다 꺼낸다는 게 또다시 저런 말이라니.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몇 번을 말했나요.”

“조금 문제가 커서 그럽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만한 일이라서요.”

가문의 명예까지 거론되는 말에 리세트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데요?”

책장 사이에 끼워 놓은 종이 한 장을 빼어 드는 손길이 사뭇 비장했다.

그가 그것을 건네기도 전에 리세트는 재빠르게 낚아채 갔다. 빛바랜 종이. 그리고 그 안에 적힌 건 상당히 난해한 마법식 여러 개와 왼쪽 밑부분 모서리에 적힌 연도. 만들어진 지 십 년도 더 된 낡은 연구 보고서였다.

보고서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낱장 하나였지만 양식은 나름대로 갖추고 있었다. 이름, 날짜, 연구 제목. 그 외의 건 여백으로 남겨 두었지만 표준 양식을 잘 따른 보고서였다.

찬찬히 살펴본 끝에 리세트의 입술이 황망하게 벌어졌다.

이 마법식을 만들어 낸 사람의 머리글자로 추정되는 건 제 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훔친 거였어요?”

“주운 겁니다.”

하도 당당하게 대꾸를 해 리세트가 도리어 당황했다.

“차이가 있나요?”

“훔친 건 도둑질이지요. 저는 나쁜 마음을 먹고 남의 것을 갈취한 게 아닙니다. 이 종이가 하필 제가 가는 길목에 떨어져 있었고, 저는 우연히 그것을 주워 간직한 거죠. 덕분에 부인을 도울 수 있었고요.”

장황한 말이었지만 남의 것을 제 것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리세트는 그저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터벅터벅, 진이 빠져 책상 앞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리세트가 의자에 앉자 그도 바닥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 사전에 안정성을 다 시험해 본 것이니 부인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남의 것을 허락 없이 가져다 쓰고 있는 남자는 마치 자신이 신사라도 된 양 말했다. 다른 책상과 짝인 의자를 끌어오는 동작도 그 말처럼 단정했다. 그래서 더욱 리세트는 기가 막혔다.

“설마 경께서 이걸 직접 전개해 보셨나요?”

“당연하지요. 최소한의 확인도 하지 않은 걸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써 보라고 합니까. 그것도 임신하신 분께요.”

“아…… 감사해요.”

이제는 저 자신만만한 얼굴이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흘리고 간 종이 덕분에 마력의 흐름이 뒤틀린 걸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모색하는 것이구나.

그간 끙끙 앓았던 궁금증이 전부 해소되었지만 찜찜함은 더더욱 불어났다.

“누가 만들었을까요?”

“발표된 논문과 지원이 중단된 연구를 모두 확인해 봤지만 관련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저야말로 어떤 분이 이걸 창조해 내셨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아요.”

맞은편에 앉은 그는 가방에서 두꺼운 무언가를 꺼냈다. 어쩌다 우연히 주웠다 주장하는 종이에 적힌 마법식과 상당히 유사한, 아마도 그가 만든 새로운 마법식인 듯 보였다.

“어떤 가문에 속해 있으신 분인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목소리만큼이나 초롱초롱한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리세트는 아트반의 말을 불현듯 떠올렸다. 공부에 미치신 방어 계열의 독종. 그를 향해 리세트가 전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렇군요.”

밋밋한 반응이지만 그런 건 별로 개의치 않는지 노바르 로슈만은 신이 나 떠들어 댔다. 가문의 명예까지 들먹이며 비밀 엄수를 목숨처럼 여기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학식이 깊은 분이라면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어요. 기회가 닿으면 그분 밑에서 수학해도 좋을 것 같은데,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실까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네.”

더 이상의 단서는 없으니 리세트는 그쯤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하였다. 계속 대꾸해 주다가는 이런 상황이 쭉 이어질 것 같았으므로.

“더 숨기시는 거 없지요? 빨리 마법식이나 같이 만들어 봐요.”

❖ ❖ ❖

학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을 만한 연구 자료를 길바닥에 흘리고 간 사람이 있다니.

덕분에 이득을 보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리세트는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꼭 주인을 찾아 주고 싶다 하였는데, 노바르 로슈만은 아쉬운 내색 하나 없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저도 꼭 찾고 싶습니다. 같이 찾아요, 우리.”

아마 다른 곳에 마음을 품은 듯했다.

“그래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리세트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가 준비해 온 마법식을 조합하고, 본래의 식을 한 번씩 더 살펴보면서.

사각사각, 펜이 나아가는 자리마다 까만 선들이 그어졌다. 종이에 빼곡하게 그려진 주문과 각종 도형이 한데 모이자 제법 그럴싸한 마법식의 모양으로 탈바꿈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섯 개의 마법식을 더 만들어 냈다. 머리가 하나 더 늘어나니 확실히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며 그는 좋아했다. 이럴 거면 진작 알려 주지 그랬냐고 반문하자 금세 시선을 피해 버렸지만.

“부인께서는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든 노바르 로슈만이 펜을 내려놓으며 시간을 알려 주었다.

“수업 시간에 봐요.”

오전 수업이 있는 리세트가 먼저 실습실을 나섰다. 손날에 남은 잉크 자국을 손수건에 문지르며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치유 계열의 건물로 향하던 도중 누군가 달려와 리세트의 앞을 막아섰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자그마한 아이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손을 번쩍 들어 흔드는 움직임을 따라 목에 묶인 녹색의 리본이 팔랑거렸다.

리세트는 곧 그 아이들을 기억해 냈다. 밀란 선생님의 제자들. 그러니까 리세트의 후배가 되는, 얼마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아이들이었다.

“안녕.”

돌려주는 인사에 신이 난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며 웃었다. 가장 어린아이들이 매는 녹색 리본을 보는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이 애들이 조금 더 커도 나에게 다가와 줄까.

리세트는 입학할 당시에 붉은색 리본을 부여받았다. 녹색 리본을 벗으면 바로 쥐게 되는 게 붉은 리본이었다. 그 빛깔의 리본을 맨 아이들이 리세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던졌던 경멸 섞인 눈빛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지금은 알은체하고 인사를 해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귀족들처럼 변하겠지. 어리니까.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가능한 일이겠지.

안 좋은 생각이 깊어지던 무렵에 천진한 감탄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배님은 이 시간에도 실습실에서 공부해요? 대단하다.”

“어른이 되면 아침부터 공부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일찍 일어나도 기숙사에서 못 나오게 하거든요.”

“밀란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말씀하셨어요. 그날 본 선배님은 착하고 엄청 똑똑하고 용감하다고요. 어떻게 하면 똑똑해져요?”

무어라 대답을 해 주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는 고민거리도 툭툭 던져졌다.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워요. 놀고 싶은데…… 어른들은 공부를 안 하면 못 놀게 하고. 선배님은 안 힘들었어요?”

“선배님은 언제부터 키가 컸어요? 저도 나중에는 크겠지요?”

유심히 경청하던 리세트는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들과 차례대로 눈을 맞추며 착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와아아-, 작은 입들이 터트리는 감탄사가 아픈 기억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실습 시간에 오는 선배님 말고 델피니움 선배님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 줄까?”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던진 말에 대답한 건 리세트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고민을 좀 해 볼게. 좋은 방향으로.”

셀번 밀란이 어린 제자들의 환호성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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