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라지지 않는 불안함
계절이 무색하게도 싸늘하기만 했던 방에 훈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좋아. 시작하자!”
하녀들은 미소 띤 얼굴로 열심히 공작 부인의 침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메이 하핀의 얼굴이 가장 밝고 환했다.
겨울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던 침구는 전부 걷어 내고 적당히 가벼운 것으로 교체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관리를 해 온 터라 먼지 한 톨 없었지만 하녀들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 이 삭막한 생활도 끝이겠지?”
한 하녀가 감격에 겨운 어조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번에도 메이가 제일 열심히 동의를 표했다.
“마님께서 돌아오시면 맛있는 걸 잔뜩 해 드리자. 입덧 시작하셔서 제대로 드시지도 못한다며.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면 죄다 구해 오는 거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메이가 앞으로 나서며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너희는 나만 믿어. 이미 내가 다 정리를 해 놨거든.”
“역시 메이 하핀. 마님에 관한 일이라면 네가 제일 빠르구나?”
“두말하면 입 아프지.”
어떤 걸 먼저 해 드리는 게 좋을까.
기분 좋은 고민에 파묻히던 메이의 정신을 일깨운 건 다른 하녀의 피로한 한숨 소리였다.
“벌써 걱정이다. 입덧은 마님께서 하실 텐데, 주인님께서 더 예민해지시겠지? 끔찍하다, 끔찍해.”
“어련하시겠어? 지금도 살얼음판인데 그때 되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그래도 그때는 마님께서 공작저에 계실 것 아니야. 나는 그거로 만족할래.”
잠시 손을 멈춘 하녀들은 몇 달 전만 해도 수시로 목격했던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삭막한 지옥의 주인이었던, 어떠한 표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얼굴을.
공작이 사용인들에게 괜한 트집을 잡거나 말도 안 되는 일로 벌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수행한 일을 완벽하게 해내도, 혹은 너무 긴장한 탓에 큰 실수를 저질러도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얼굴로, 고요하게.
차라리 소리치며 화를 내 주면 좋을 텐데 그 얼굴로 가만히 응시만 해 더 공포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어서 눈물을 쏟아 낸 하녀들도 있었다.
어쩜 마님은 그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실 수 있을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마님은 단 한 번도 공작의 그런 얼굴을 보지 못했을 거다. 마님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은 언제나 따스한 온기만 감도는, 곁에서 지켜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힐 정도로 다정한 기운만 넘실대니까.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 그렇지?”
지옥. 미치도록 공감할 수 있는 그 단어가 하녀들을 일제히 상상에서 벗어나게 했다.
“지옥이 좀 더 무섭지 않을까?”
누군가의 견해에 메이는 코웃음을 쳤다. 새로 단 새하얀 레이스 커튼을 정돈하던 손에 다소 거친 힘이 실렸다.
뽀얀 먼지가 떠오르는 그 아래에서 메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지옥이 따로 있니? 마님이 안 계시는 공작저가 바로 그 지옥이지.”
❖ ❖ ❖
그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온 수행인은 활기를 띠고 있는 로비를 바라보며 허어, 탄식을 흘렸다.
“이거 참…….”
겨우 한 명. 물론 마님께 그런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한 사람에 의해 이 넓은 저택의 분위기가 좌우되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님의 부재 속에서도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는 공작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최근에는 전부 크리프 후작에게 일임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주치의가 가장 눈에 띄었다. 조용히 눈인사를 건넨 주치의가 나가자 공작의 시선이 단번에 그를 향했다.
“마님께서는 어제도 로슈만 경과 함께 계셨습니다. 수업 시간과 실습 시간, 그리고 정해진 일과가 끝이 나면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눈초리에 움찔 몸을 떤 수행인은 곧바로 보고했다.
“별다른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작은 며칠 전, 그러니까 마님께서 쓰러지신 이후에 그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마님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보라고 하셨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런 말까지 덧붙이시면서. 게다가…….
‘노바르 로슈만에게도 사람을 붙여.’
노바르 로슈만. 이 이름에 무슨 큰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목덜미가 절로 서늘해졌다.
마님을 감시하라는 명도 썩 달갑지는 않았는데 하필 사내에게도 연달아 감시를 붙이자 영 찜찜했다. 마님께서 쓰러지신 후라 걱정되는 마음은 백번 양보해 이해한다지만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신 것 같았고, 실습 시간에도 따로 마법을 전개하시거나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시지는 않았습니다.”
무사히 보고를 끝낸 수행인에게 요한은 물러가도 좋다는 눈짓을 보냈다.
노바르 로슈만. 노바르 로슈만. 노바르 로슈만.
지겹도록 그 이름이 보고서에 올라왔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모범생의 일과였지만 굳이 문제점을 따지고 든다면 단연코 저 이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리세트의 모든 시간에 노바르 로슈만이 끼어 있었다.
리세트는 그와 약속을 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집으로 오겠다고. 그리고 방학 때도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겠다고,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음 학기에는 출산 때문에 휴학하게 될 수도 있으니 시간을 아끼겠다는 말로 기어코 그를 설득하려 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지. 겨우 공부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리를 한다고…….
애써 미뤄 두었던 궁금증이 하나씩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애초에 유산을 한 몸으로 아카데미를 가겠다고 한 것도, 노바르 로슈만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토록 몸에 무리가 갈 일을 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여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아이의 아버지. 리세트가 잠시 눈길을 준 그 남자가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사랑.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그 단어가 분명 리세트와 그 남자 사이에 존재했을 시기가 있을 테니까. 리세트가 한 번쯤은 그의 눈을 속이고 그 남자를 보러 갈 것이라 예상했는데, 리세트의 일과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강의실. 실습장. 도서관. 식당. 그가 곁에 없는 시간에 리세트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기숙사. 그와 함께 하는 유일한 곳이지만 이곳에는 당연히 그 남자가 찾아올 수 없겠지.
그럼 대체, 너는 어째서 그토록 아카데미에 남고 싶어 하는 걸까. 네 말대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리세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상했다.
그럼에도 선선히 그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고개를 끄덕여 준 이유는 리세트, 그의 소중한 아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마력에 의한 일이라면 제가 알아내지 못한 게 이해가 됩니다. 마님께서 섣불리 무리만 하지 않으신다면 이제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마님의 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주치의가 장담한 대로 리세트는 사경을 헤맸던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쓰러지거나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혈색도 좋아졌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째서 조금도 안심할 수가 없는 거지.
요한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모조리 태워 흔적을 지워 버렸다. 서랍 속에 넣어 둔 서류도 한꺼번에 없앴다.
일렁이는 파란 불빛이 스며든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이 가라앉았다.
❖ ❖ ❖
리세트는 기진맥진한 학부생들을 남겨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 얼굴, 노바르 로슈만이 곧 뒤따라 실습장을 나섰다. 며칠째 이어지는 은밀한 회동이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귀찮게 따라다니더니 결국 그는 원하는 것에 한 걸음 다가간 셈이었다.
타인이 가진 마력의 흐름을 알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데 노바르 로슈만은 모종의 실험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믿음을 쌓지 않아 그 실험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다고 했다.
한시가 급한 사람에게 믿음을 운운하는 것이 꽤나 짜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마력이 뒤틀린 걸 알았으니 조금 더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필, 저 녀석이라니.
리세트는 짜증 섞인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심화 과정을 마친 뒤에는 마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더니, 그는 관련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마력의 흐름이 바뀐 사례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마력을 거부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노바르 로슈만 덕분에 분명하게 알아낸 사실이었다.
단 한 가지. 이 똑똑한 조력자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어려움이 남았지만.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은 리세트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오늘도 누군가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요한의 사람이겠지.
옆자리에 앉은 노바르 로슈만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어 대화는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타인에게 숨기지 않아도 되는 주제는 입으로, 반드시 숨겨야 하는 주제는 손으로.
[어제 얘기해 준 방법도 소용은 없었어요. 마력이 모이는 것 같긴 한데, 금세 흩어져 버렸거든요.]
리세트가 하얀 종이를 살짝 옆으로 밀어 주자 그가 제 앞에 놓인 공책에 무언가를 적었다. 남들이 보면 각자 공부를 하는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그럼 방법을 바꿔 보는 게 좋겠네요. 제 마력으로 직접 살펴보고 싶은데, 그건 힘들다고 하셨죠?]
[다른 사람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거예요. 지난번처럼 쓰러질 것 같거든요.]
[마법을 전개하는 건 아직도 어렵진 않으시고요?]
[네. 그건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늘은 이 공책을 한번 읽어 보세요. 마력의 폭주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왔습니다.]
그가 건넨 공책을 넘겨받은 리세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력의 폭주가 이 일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걸까. 흔하게 볼 수 없는 현상인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마력이 폭주하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하다 결국 그것에 잠식당해 스스로 잡아먹히는 것. 전혀 연관성이 없는 조사라는 생각이 막 들었을 무렵이었다.
공책 하단에 무언가 적혀 있었다.
[공통점. 결국 그 끝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