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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9)화 (39/151)

39화
집으로 돌아가자

아픔을 참는 듯 몸을 잘게 떨던 리세트는 어느 순간부터는 잠잠해졌다. 꾸벅꾸벅 숙여지는 고개를 제 품에 기대게 한 요한은 조심스럽지만 빠른 동작으로 리세트를 씻겨 나갔다.

살짝 미간을 찡그릴 뿐 리세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꼼꼼하게 머리를 말려 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어도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사이 사용인들이 청소를 끝마쳤는지 침구가 전부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보송보송한 햇빛의 냄새가 배어나는 이불 위에 몸을 누여 주자 리세트는 작게 몸을 뒤척였다.

요한은 어깨를 다 덮을 정도로 이불을 올려 주고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편으로 넘겨 주었다. 아직도 붉게 부풀어 오른 눈가를 문질러 보기도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져 얼룩이 생겨나고 있는 바닥을 보고 나서야 요한은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도 리세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요한은 살며시 리세트의 뺨을 감싸 쥐며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길이 막 리세트에게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옅은 온기가 묻어나는 손이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가야 돼?”

리세트가 몽롱하게 눈을 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딜 가겠어. 잠시 나갔다 올게.”

“오늘 밤에도 올 거지?”

“아니,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하인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그래.”

“언제 올 건데? 몇 시쯤?”

“금방. 시간이라고 할 것도 없어. 방 밖에만 나갔다 올 거니까.”

요한은 리세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문밖을 나섰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수행인이 조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주인님, 오늘은 꼭 경매장에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회의 때 마무리 짓지 못한 일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직접 회의를 주관하신다고 합니다. 일단 지금은 바로 경매장부터…….”

“폐하께는 이미 회의 때 결정 난 사항이니 더 할 말은 없다고 전해. 내 의견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경매장은 크리프 후작에게 마무리를 지으라 하고.”

“……남은 일정은 어떻게 소화하실 건지요?”

설마, 계속 여기에 남겠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지?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눈으로 애걸했지만 공작은 그 눈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명령을 내렸다.

“급한 서류부터 전부 가져와.”

“여기, 이곳으로요?”

턱을 까딱이는 간결한 동작으로 대화를 마무리한 공작이 다시 몸을 돌렸다. 수행인은 명령을 듣고서도 믿기지 않아 눈만 끔뻑이다가 급히 공작을 불러 세웠다.

“주인님! 하지만 그것 말고도 남은 일정이…….”

“오늘부터 내일까지, 반드시 내가 가야 할 일은 최대한 미루고 다른 건 크리프 후작에게 일임해. 절대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대화를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은 요한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리세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환한 미소가 떠오르는 그 얼굴을 향해 그는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 ❖ ❖

평화롭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행복인지 가늠해 보던 요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꼭 그것을 알아야 하나.

아득할 정도로 행복하니 그저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요한은 제 다리를 베고 누운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리세트는 책에 집중하다가도 흘끔흘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쁜 거 아니야?”

“안 바빠.”

“그런데 서류가 계속 들어와?”

“괜찮아. 적당히 마무리해 넘기면 처리해 줄 사람이 있거든.”

“처리해 줄 사람이라니?”

모든 일에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요한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저토록 쉽게 일을 맡긴다는 것이 리세트는 신기했다.

“굉장히 유능한 사람인가 보네.”

“유능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쓸 만해.”

“나도 아는 사람이야?”

“글쎄.”

“궁금하다.”

“몰라도 되는 사람이야.”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와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가는 소리가 대화의 빈 공간을 채웠다. 요한은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에 글자를 썼다. 다른 곳보다 굵고, 또렷한 필체로.

[위임자, 아트반 크리프.]

벌써 다섯 개째 배신자에게 보내는 용서의 손길이었다.

사실 평생 그 얼굴을 안 보고 산다 해도 요한은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안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조용하게 살 수 있을 것도 같아 기꺼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리세트는?

자신 때문에 그가 아트반 크리프를 쳐 냈다는 걸 알면 분명 슬퍼할 터였다. 불쌍한 척을 유독 잘하는 녀석이니 리세트의 온정에 매달려 더 귀찮게 굴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장 성가시고 불유쾌한 일은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지.

어차피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한 뒤에 처분을 해도 늦지 않는다.

다음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시선을 돌려 요한은 리세트를 바라보았다.

수석을 하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리세트는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 반듯했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마. 꼭 수석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리세트는 탁, 책을 덮어 내려놓았다.

“내가 노바르 로슈만보다 밑에 있어도 좋아?”

“성적보다는 네 몸이 더 중요하니까. 또 무리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정말 너를 아카데미에 보낼 자신이 없어.”

“마력만 무리해서 운용하지 않으면 괜찮아. 후배들 실습 도와주는 시간을 제외하면 심화 과정은 전부 이론 수업이거든. 그러니 내게 유리한 조건인 거지.”

“그래?”

요한의 눈초리가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리를 한 건데? 점수에 직결되는 게 아니라면 굳이 힘들게 마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나. 아기에게 좋지 않은 걸 너도 알잖아.”

너무도 타당한 말에 당황한 리세트는 금방 핑곗거리를 생각해 냈다.

“학부생 때 선배들이랑 실습한 거 기억하지? 노바르 로슈만이랑 같은 조인데, 걔가 후배들 앞에서 나보다 더 잘하려고 하는 게 너무 보기 싫었어.”

어쩐지 노바르 로슈만에게 미안해진 리세트는 요한의 분노가 그에게 닿기 전에 또 다른 대안을 찾아냈다.

“그리고 내가 조금, 그냥 자격지심인 거지. 아무래도 공작 부인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니까.”

“누가 너한테 또 그런 헛소리를 했어? 로슈만은 아닌 것 같으니, 그 실습에 참여하는 학부생들인가?”

리세트는 구겨진 요한의 미간을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미소 지었다.

“나 혼자 찔려서 그래. 사실이기도 하잖아.”

“그런 말,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귀족이 아닌 건 맞잖아.”

“리세트.”

요한이 어떤 것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리세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티파티나 가든파티 때 귀부인들에게 받았던 멸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요한에게는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요한은 그녀를 헐뜯은 귀족 가문에 철저히 복수했다.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혹은 당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이러다 제논의 모든 귀족 가문과 척지게 되는 건 아닐까.

종종 떠오르던 슬픈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리세트는 다시 책장을 펼쳐 들었다. 어려운 내용에 집중하다 보면 이 순간의 아픔은 금세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요한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원인은 어차피 하나였다.

슬쩍 책을 내리자 아직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짙은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주인님, 시간이 촉박합니다. 어서 집무실로 가셔야지요.”

아침마다 침실 앞에서 듣던 수행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하자 요한도 결국 피식 웃었다.

“어쨌든 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응.”

“제발 부탁입니다, 부인.”

“네에. 알겠습니다.”

“네가 수석을 못 한다고 해서 너의 평판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

과연 평판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나. 리세트도 알고, 사실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얼마나 리세트의 유능함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그 척도로 내세울 것이 겨우 학업 성적이라니.

요한은 멍청한 귀족들의 작태를 비웃으며 학구열에 불타오르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네 실력은 내가 잘 알아. 가끔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도. 그러니 너무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지 마.”

“너만 알면 뭐 해. 다른 많은 사람들도 알아야지.”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를 두고 리세트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는지 떠올린 요한은 한 사람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아트반 크리프도 알아.”

“참…… 눈물 나게 고맙네.”

아트반 크리프. 지금은 아이의 임시 아버지로 낙인찍힌 그 이름이 불쑥 화두에 올라 리세트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떻게 저 이름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편하게 언급하는 거지?

“아트반이랑 화해했어?”

리세트가 넌지시 물었다. 질문하고 보니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한 찰나였다.

“아니. 죽이고 싶어.”

조금 멍해져 얼마간 입술을 벌리고 있던 리세트는 황급히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가, 방금 그 말 못 들었지?

아기가 부디 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기를 바라며 리세트는 열심히 책장을 넘겼다.

쿵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는지 요한도 더는 그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 ❖ ❖

리세트가 손등으로 간지러운 눈 주변을 문지르자 요한이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살살 문지를게. 손 놔주면 안 돼?”

“간신히 가라앉고 있어. 조금만 참아.”

요한은 차가운 물수건을 감긴 눈 위에 덮어 주었다.

“시원해서 좋다. 이제는 간지럽지 않아.”

겨우 이틀이지만 그 시간 동안은 온종일 이런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리세트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잘 웃고 오랫동안 눈을 맞추어 주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가 주었다. 단 한 순간도 눈치를 보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욕실에서의 시간만 제외하면.

리세트가 떠난 후로 처음 느낀 온전한 행복이었다. 불안도 타들어 갈 듯한 갈증도 없는,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었던 그 시간.

이 감미로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요한은 결국 속에 묻어 둔 얘기를 꺼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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