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리세트를 제 품에 기대앉게 한 요한은 여전히 차갑기만 한 손을 주무르며 주치의를 들게 했다.
“마님, 무사히 깨어나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치의는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은 눈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리세트는 젖은 그 눈을 바라보며 생긋 웃어 줄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피해 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미소 지어졌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된 지금의 상황이 너무 슬펐다.
임신을 확인해 준 것도, 손을 잡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준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주름진 손의 온기가 떠오르자 리세트의 눈에도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임신 소식을 들은 요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마지못해 웃어 주었을 때, 다정한 위로를 건네준 주치의의 얼굴이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네, 아프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 아기는 괜찮은 건가요?”
“아기님은 무사하십니다. 마님께서는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리세트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실린 힘을 느꼈다.
“조금 어지럽고 몸이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아요. 손끝도 저린 것 같은데, 막 눈을 떴을 때보다는 덜해요.”
안심하라고, 이제 괜찮다고 요한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사이 주치의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차츰 옅어졌다.
“식사를 잘 하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면 그 부분은 차차 해결될 겁니다. 마력은 제 영역 밖의 일인지라 치유 마법사님들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셀번 밀란, 그분께서 직접 봐 주시기로 하였어요.”
“밀란 선생님께서요?”
“마님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을 때도 매일 확인하러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말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자세한 건 마님께서 일어나 보셔야 알겠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확답을 주셨습니다.”
조금 경직되어 있던 리세트의 입술에 미소가 감돌았다.
“다행이네요.”
“네. 정말 다행입니다, 마님.”
요한은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조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손길로 리세트의 차가운 손을 주물러 주던 요한의 시선은 깊이 가라앉았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불쑥 대화에 끼어든 공작을 바라본 주치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이상이 없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덧붙여지는 말에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공작의 말이 맞았다. 마님의 몸에 이상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 몸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않았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는데도 다 해결되었다는 듯이 웃은 자신이 문득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의사란 말인가.
“리세트가 쓰러진 원인은 아직도 못 찾은 것 같고. 보아하니 치유 계열 마법사들의 도움으로도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한 거겠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전부 해결될 것처럼 말하다니. 형편없는…….”
요한은 제 손을 단단히 붙든 리세트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리세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너무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해서 그런 거야. 마력 고갈 현상이 약하게 왔던 것 같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기껏해야 수업 시간에나 마법을 전개했을 텐데, 그렇게 쓰러진다고?”
“좀 욕심을 많이 부렸어.”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도 리세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임신한 여자들이 무리하게 마법을 전개하다 큰 변고를 당하기도 하고, 너무나 안타깝지만 그것이 유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걸 적절히 이용하면 요한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거둘 수 있을 터였다.
마력의 흐름이 뒤틀린 건 주치의는 물론이고 다른 마법사들 또한 밝혀내지 못했다. 밀란 선생님, 심지어 요한조차도 모르고 있으니 들킬 위험은 전혀 없다 보아도 무방했다.
“노바르 로슈만한테 지는 게 싫었어. 너도 알잖아. 내가 걔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걔한테 수석을 빼앗길 것 같아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어. 그러다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말을 하다 보니 정말 그런 기분이 들어 리세트의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걔가 수석을 했다잖아. 말이 돼? 지기 싫어서 그랬어. 걔한테만은 지고 싶지 않아서. 너무너무 싫어. 상상만으로도 싫어.”
리세트는 대답하지 않는 요한의 손을 살며시 흔들었다.
“앞으로 조심할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파란 눈동자가 샅샅이 파고들 듯 리세트를 직시했다. 리세트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두 손으로 감싼 커다란 손을 살살 흔들어 보고 이제는 정말 괜찮다는 듯 어깨를 힘껏 펴 보기도 하며.
“너는…….”
미소 짓는 얼굴을 본 요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해 입술을 닫았다.
긴 침묵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던 주치의는 공작의 흉흉한 기세가 누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이제 우리 마님께서 건강히 기운을 차리시기만 하면 되겠구나.
드디어 공작저에도 평화의 시간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 ❖ ❖
뽀얀 증기가 떠다나는 욕실에서 작은 소란이 피어났다.
“나 혼자 씻을 수 있어.”
리세트는 문손잡이를 움켜쥐어 버티고 있었다. 이런 반항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지만 요한은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껏 눈을 찡그린 리세트는 두 손으로 힘겹게 문을 끌어당기고 있었는데, 요한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한 손으로 문을 잡고만 있었다. 문틈은 점점 더 벌어졌다.
“혼자 씻을 수 있다고?”
“응.”
“정말?”
“정말!”
“아닐 텐데.”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라 단정 짓는 어조였다.
“그 손, 그 다리, 그 팔로?”
“……응!”
“지금도 살짝 건드리면 넌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손 떼. 감기까지 걸리고 싶어?”
리세트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요한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문턱을 넘어가는 그의 입매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넘어질 것 같은데, 제대로 씻을 수는 있겠어?”
활짝 열린 문을 황망하게 쳐다보던 리세트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요한은 뒷걸음질 치는 리세트를 안아 들었다.
“내가 설마 아픈 너한테 다른 생각이라도 품을 것 같아?”
문득 말하고 나니 억울해져 요한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필이면 과거의 기억까지 떠오르는 게 아닌가.
“여기서는 아무 짓도 안 해. 내 아내는 상당히 고지식한 학생이셨거든. 물론 지금도 변함없으신 것 같고.”
“고지식하다니. 지극히 정상이었어!”
리세트의 작은 외침은 코웃음 치는 요한의 목소리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우리 빼고, 다른 애들은 기숙사에서도 할 짓 다 했어. 우리가 너무 건전했지. 우리만.”
“그건 걔네들 잘못이지! 공부를 하는 공간에서 그 잠깐을 못 참아? 주말이나 방학 때 아카데미를 벗어나서 해도 되는 거잖아.”
결국 문제는 장소였던 건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제 모습이 우스워 요한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침대 위에서 그의 품에 찰싹 붙어 뺨을 문지르던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다. 요한은 맑은 눈으로 자신을 흘끔거리는 리세트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왜.”
저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반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몸을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내려 주자 리세트는 멀찍이 구석으로 가 버렸다. 그 모습이 기가 막히고 깜찍스러워 요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이리 와.”
머뭇거리던 리세트는 슬금슬금 더 뒤로 멀어져 따듯한 물속에 몸을 푹 담갔다. 얼굴만 쏙 빼놓은 채로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그의 눈썹이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하아, 헛웃음을 짓던 요한이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세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금방 씻고 나갈게. 이따 봐!”
아직 자유롭지 않은 몸이라는 건 리세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으니. 그래서 요한에게 씻겨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본 순간 리세트는 절대 그런 부탁을 건넬 수 없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가슴과 목 언저리에는 손톱자국이 가득했고, 손목에는 밧줄 같은 것에 묶인 듯한 검푸른 흔적이 번져 있었다.
이런 몸을 어떻게 요한에게 보여 준단 말인가. 분명 또 슬퍼할 텐데.
리세트는 수면 아래로 비치는 제 몸을 흘끔거리느라 요한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사이 아랫입술에 닿아 찰랑거리던 수면이 코밑까지 훅 올라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리세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들어와 앉은 요한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너도 씻게?”
그만 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요한은 계속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 뼘 더 다가와 리세트가 물러나야 했다.
“나 나가고 나면 들어오지.”
“…….”
“먼저 씻을래?”
벌떡 일어서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리세트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하지만 지척까지 다가온 요한 때문에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
“몰라. 네 마음대로 해.”
“그럴 생각이었어. 어서 이리 와. 씻겨 줄게.”
등은 비교적 깨끗하다는 것을 떠올린 리세트는 몸을 돌려 앉았다. 요한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나갔다.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느낌이 좋아 스르르 눈이 감기려 했다. 또다시 잠들기는 싫어 리세트는 부릅뜬 눈으로 뭉게뭉게 떠다니는 수증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요한의 손이 목덜미를 지나올 때는 저절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참아 보려 했던 아픔은 결국 아릿한 신음으로 번져 나왔다.
“조금 아파, 조금. 아주 조금. 혹시 많이 놀랐어?”
대꾸하는 대신 요한은 리세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리세트, 제발 다치지 마. 아프지 마.”
처참한 흔적이 남은 손목에 입 맞추자 리세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요한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계속 만지다 보면 이 흔적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나는 너를 치유해 줄 수 없잖아.”
그 감촉이 너무 슬프고 이상해 리세트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