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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7)화 (37/151)

37화
하지 마

요한이 주는 음식을 열심히 받아먹던 리세트는 어느 순간 다시 잠들어 버렸다. 이번에는 무얼 먹여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요한은 밑으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받쳐 들었다.

깨울까.

이성적인 머리는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몸이 빠르게 회복하려면 적절한 영양 섭취가 가장 중요하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요한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렇게 곤히 자는데 어떻게 깨울 수 있겠는가.

꼬박 일주일을 앓는 동안 리세트는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럽게 울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숨 쉬는 게 버거운지 가슴을 움켜쥐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요한은 무력하게 그걸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니 조금만.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잠을 자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이대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주인님.”

방 안으로 들어온 하녀들의 부름이 불안한 생각을 멈추게 했다. 요한이 조용히 눈짓을 보내자 그녀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소임을 마무리한 후 조용히 물러가는 하녀들 중 덩그러니 남겨진 하녀 한 명이 있었다. 그들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 하녀를 요한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수건을 쥔 그녀의 손이 움찔 떨렸다.

“조, 좋은 아침이지요?”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두 눈을 빛내는 메이 하핀에게 요한은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텐데도 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져와.”

요한은 손쉽게 수건을 건네받았다. 마뜩잖다는 눈으로 그를 보던 하녀마저 자리를 떠나자 온 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새근새근 잠든 말간 얼굴에 수건이 닿자 리세트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이윽고 천천히 드러난 초록빛 눈동자가 요한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눈 감아 봐.”

“왜?”

순순히 눈을 감아 주면 좋을 텐데, 아침의 리세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새 잠기운이 가신 두 눈이 그를 담았다.

“얼굴, 닦아 줄게.”

입술을 문질러 닦아 주자 리세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매일 그를 아프게 하던 울음소리와 달리 곱고 청아한 울림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던 눈가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지나왔다.

“간지러워.”

“곧 끝나.”

“그냥 씻고 나올래. 씻고 싶어.”

“조금 있다가. 주치의만 만나고 씻어.”

잔잔한 미소가 머무르던 얼굴에 서서히 그늘이 드리웠다. 갑자기 변한 리세트의 분위기를 읽어 낸 요한은 수건을 그만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리세트, 무슨 일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겁을 먹었어?”

요한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치료받을 때 너무 아팠잖아. 조금 무서워서 그래.”

“네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멈추게 할 거야.”

물기가 묻어 촉촉한 손으로 요한은 여전히 붉기만 한 눈시울을 매만졌다. 리세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아파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제발 그만, 그렇게 외치던 것 또한.

“미안해.”

멈추어 달라고 애원하던 리세트를 모른 척한 순간의 기억이 아프게 마음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사과가 의아했는지 리세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구한 눈빛이 더 큰 죄책감을 불러왔다. 어젯밤, 리세트를 다그치던 못난 제 모습이 순한 그녀의 얼굴 위에서 겹쳐 보였다.

“그냥, 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리세트는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아직도 몸이 마음처럼 따라 주지는 않아 힘들었지만 그 자세 그대로 머물렀다. 그래도 요한이 다가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가슴을 더 펴 보았다.

“나 팔이 너무 아파.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요한은 그 보드라운 품을 힘껏 끌어안았다.

맑고 포근한 햇살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연인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 ❖ ❖

리세트가 다시 눈을 뜬 건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었을 무렵이었다.

고개를 들자 노을이 스며든 예쁜 얼굴이 보였다. 리세트는 조금 멍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한잠도 이루지 못하였는지 요한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리세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도 평소와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눈을 뜨지 못했을까.

부디 그 시간이 길지 않았기를 바랐다. 홀로 남아 견뎌야 했을 요한이 얼마나 아파했을지 잘 아는 탓이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멀리, 더 과거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요한은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했다. 가끔, 하늘을 보며 해 준 말들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너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하셨어. 몸이 많이 약하셔서 늘 집에만 계셨는데,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 편안해지셨대.’

‘동생이 있었어. 남동생. 그 애도 많이 아팠어. 다 나으면 꼭 아카데미에 입학해 함께 수업을 듣자고 했어. 우리는 학년이 다르니까,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우기고 떼를 썼어. 그럴 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해 줬어. 일단 나으라고. 그러면 생각해 보겠다고 속였거든. 순진해서 그 말을…… 믿었어, 그 바보는.’

과거를 회상하는 말들에는 슬픈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기억의 한편에 머문 사람들을 추억하는 요한의 눈과 담담한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건 사랑이었다.

그토록 가족을 그리워하는 요한이 우리 아이를 죽이려 하는 이유. 리세트는 이제 필사적으로 부정해 왔던 진실을 받아들였다.

나 때문에 우리 아기를 죽이려고 했구나.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

그날 집무실 앞에서 요한과 집사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그 소문을 떠올린 자신의 모습을 리세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까.

하필 그 상황에서 생각난 소문은 리세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닌 걸 알면서. 소문 때문에 괴로워한 요한을 옆에서 지켜봤으면서도 그랬다. 그때는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 소문 자체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두려웠다. 십여 년간 알아 온 요한의 모습이 그 문을 연 순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영영 요한을 잃어버리게 될까 겁이 났다.

리세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을 거다.

밀란 선생님의 연구실에 찾아가 선생님의 마력을 몸에 받아들인 순간부터 기이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몸이 아니라 아기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건 치유 마법사들의 마력이 쏟아지듯 들어왔을 때 깨달았다.

타인의 마력을 조심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요한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즉시 망설이지 말고 죽이라 하였지.

그 말은 즉, 아기가 태어난 후에야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지 엄마의 배 속에 있는 동안은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걸 방증하는 셈이었다. 태어나기 전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는 것이라면, 요한은 이미 그때 손을 쓸 터이니.

‘도와드리겠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그 남자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만약 이것마저 소용이 없다면, 그때는 요한에게 털어놓자.

노바르 로슈만의 말을 되짚어 보며 리세트는 부드러운 손길로 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시울에 조심스레 마력을 씌웠을 때였다.

“하지 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란 리세트의 손에서 마법진이 사라졌다. 요한은 제 눈가에 닿아 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마법, 전개하지 마.”

실망감이 스미는 눈을 바라보며 요한은 단단히 붙잡은 리세트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이대로 만져 줘. 치유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만져만 줘.”

“눈 따갑지 않아? 내가 금방 낫게 해 줄 수 있는데.”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도 요한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만져 주는 게 더 좋아. 이건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니까, 오래 남는 상처도 아니잖아.”

요한은 살며시 구겨지는 리세트의 고집스러운 눈매를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를 낫게 해 주겠다는 건지.

사실 진작부터 깨어 있었다. 리세트가 잠에서 깨려는 듯 뒤척이던 순간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려던 마음을 바꾼 건 순전히 리세트의 손길이 좋았던 탓이었다.

“만져 주면, 아프지 않을 것 같아.”

리세트가 망설이고 있는 것이 보여 요한은 한 글자씩 느릿하게 말했다.

“요즘은 만져 주지 않았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손쉽게 리세트의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요한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리세트에게 더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이마가 닿자 흠칫 놀란 리세트의 고개가 뒤로 물러났다.

요한은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가는 아내의 몸을 당겨 안았다.

“왜? 내가 모르는 새 만졌나?”

“누가? 내가?”

황당하다는 듯 높게 올라가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지만 대놓고 부정하니 조금, 아주 조금 못된 마음이 치솟았다.

“안 만졌어? 한 번도?”

“응!”

“단 한 번도?”

“그렇다니까?”

마치 치한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에 리세트는 더욱 뻔뻔한 얼굴로 응수했다. 깊은 잠에 빠진 걸 확인했을 때만 만졌으니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비록 양심이 콕콕 찔리기는 하였지만.

완벽한 범죄를 꿈꾸는 범인의 얼굴이 하도 절박해 보여 요한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 유쾌한 소리가 잦아든 무렵에는 슬쩍 말을 돌려 주었다.

“전부 꿈이었나.”

기억을 되짚는 듯한 나른한 어조에 리세트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떼었다.

“아마도?”

“그럼 지금 만져 주면 되겠네. 이건 꿈이 아니니까.”

리세트는 못 이긴 척 요한의 뺨을 손끝으로 문지르다 쭉 잡아 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는 요한의 얼굴은 무척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이제 아프지 않은데 마법 한번 쓰기 되게 힘드네.”

투덜투덜 미운 말만 골라 하는 리세트의 뺨을 요한이 쿡 찔렀다. 한참을 찔러도 반응이 없어 아프지 않게 깨물어도 보았다. 뾰족하게 올라가는 눈초리와 쭉 삐져나온 입술이 그를 미소 짓게 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안락한 시간의 끝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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