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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36)화 (36/151)

36화
내가 다 잘못했어

요한은 제 손목을 붙든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사히 눈을 떠 주어 고맙다고, 혼자 견디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는데 요한은 어떠한 것도 전할 수 없었다.

화를 낼 마음은 없었다. 그저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나에게는 아픈 걸 얘기해 주지 않았는지. 왜 나에게만 숨겼는지. 그게 전부였다.

무슨 일이 있었겠지.

리세트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고, 리세트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그 말을 되새겼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리세트가 오늘처럼 고통에 몸부림쳤던 날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리세트가 한없이 미웠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발 무사히 눈을 떠 주었으면. 다시 눈을 맞추어 준다면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아. 리세트가 속삭이듯 한 그 말을 들었을 때, 부단히 노력했던 모든 생각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아트반 크리프도, 셀번 밀란도, 노바르 로슈만도 아는 걸 나만 몰랐어.”

결국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대신해 속상한 마음을 먼저 드러내고 말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끔찍했지만 한 번 터져 나온 감정을 요한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 거야?”

“그건…….”

리세트는 까맣게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요한이 왜 화를 내는 걸까.

두 손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 보아도 머릿속은 물안개가 끼는 것처럼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화가 난, 어쩌면 상처받은 듯한 요한의 목소리만이 의식을 잡아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한테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날카로운 외침이 모든 생각을 멈추게 했다. 리세트는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미, 미안해……. 나도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어.”

간신히 초점을 잡아 가던 시야가 다시 흐릿해졌다. 손등 위로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지만 리세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어떤 말로 요한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막막했다.

화가 나겠지. 당연히 내가 밉고 원망스럽겠지. 어쩌면 이제 너무 싫어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치가 떨릴 수도 있겠지.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니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 억지로 사과를 받아들이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네 아이라는 걸 숨겨서 미안해. 사실 나, 그날 네가 한 말 다 들었어. 그래서 너를 떠난 거야. 네가 우리 아이를 죽일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이런 낯선 너를 보게 될까 너무 무서워서…….

수없이 정리해 왔던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그저 아득하고 캄캄하기만 했다. 어둠 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는 꼭, 말하려고 했어.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 했어.”

손을 뻗어 요한의 팔을 움켜쥐었지만, 요한은 리세트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리세트는 힘없이 꺾이는 두 팔로 다시 침대를 딛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 요한……. 말 못 해 줘서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나, 정말 나중에는 다 얘기하려고 했어.”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버겁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요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들거리는 리세트의 어깨를 안아 지탱해 주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요한. 나 좀 용서해 줘. 너무, 싫어하지 말아 줘.”

리세트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소리 높여 울었다.

“내가 많이 밉지? 알아. 나도 너 이해해.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마.”

요한은 한숨을 삼키며 벌벌 떨고 있는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리세트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로 알아차렸다.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울릴 생각도 없었다.

도저히 리세트를 어찌할 수가 없어 요한도 소리 내 울고 싶어졌다.

❖ ❖ ❖

리세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빛이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

햇살이 통과하는 창을 바라보던 시선을 살며시 돌리자 요한이 보였다. 리세트는 눈물이 지나다니던 흔적을 더듬어 나가듯 천천히 손끝을 가져다 댔다.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다.

요한이 화를 냈다. 그러다 안아 주고, 또 미안하다고 속삭이기도 했다. 화를 내 미안하다고,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계속 그런 말을 반복했던 것 같다.

참 이상한 꿈이지. 요한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잔상을 지워 내듯 손등으로 가려운 눈 주변을 문지르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저지했다. 리세트의 손을 아프지 않게 움켜쥔 요한은 천천히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때? 아프지 않아?”

“나…….”

말을 하려고 목에 힘을 주자 콜록거리는 기침만 새어 나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침대를 떠난 요한은 물잔을 가져와 리세트의 입가에 대 주었다.

“천천히 마셔. 조금씩, 응. 그렇게.”

리세트는 물 한 잔을 다 비워 냈다.

“더 가져다줄까?”

요한이 금방이라도 침대를 떠날 것 같아 리세트는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힘껏, 끌어올 수 있는 힘은 전부 다 끌어냈다.

“물 안 마셔도 돼. 안아 줘.”

사실 지금도 목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물보다는 요한의 품이 더 절실했다. 제 몸을 폭 감싸 주는 그 따스한 품이.

“아직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어. 금방 가져올게.”

“방금 일어나서 그래. 막 잠에서 깨어나면 당연히 목이 잠기잖아. 나 괜찮아.”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옷자락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짧게 그 손을 내려다본 요한은 리세트를 안아 든 채 물잔을 채우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온기에 이끌리듯 그의 품에 몸을 기댄 리세트는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부분을 뺨으로 문질렀다. 간질간질한 이 감각이 좋았다. 아픔도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더 좋은 것 같다고, 이상한 억지를 부리며 품을 더 파고들었다.

“……물부터 마셔.”

뒤에서 리세트를 끌어안은 채로 요한은 헤드 쿠션에 등을 기댔다.

목이 마르지 않다던 리세트는 물을 전부 마시고도 조금 아쉬운 듯한 얼굴로 빈 잔을 쳐다보다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리세트가 머뭇거리며 건넨 말에 요한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요한은 핏기 없는 뺨과 거칠어진 입술, 퉁퉁 부어오른 눈가에 차례대로 입 맞추었다. 깜빡거리는 속눈썹의 그림자에 가려진 맑은 눈은 무구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어젯밤이 미안했다.

“이제는 아프지 않아?”

“응.”

웅얼거리며 대답한 리세트는 완전히 몸을 돌려 그의 품속으로 폭 안겨 왔다. 아직 잠기운을 떨쳐 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가누지 못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만져 주던 요한은 이불을 끌어 올려 리세트의 몸을 감싸 주었다.

“배고프지는 않아?”

“모르겠어.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한데 안 먹어도 돼. 이대로 있고 싶어.”

무심코 호출종을 울리려 손을 뻗던 요한은 이곳이 기숙사라는 걸 깨달았다. 이불로 리세트를 꽁꽁 감싸 안아 든 채로 그가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사용인들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공작에게 다가갔다. 마님께서 일어나셨다는 기쁨이 너무 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 이상할 게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주인님께서 이러시는 게 하루 이틀인가.

마님께서 주변 시선을 적잖이 살피시는 바람에 한낮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스름한 새벽이나 밤이 찾아올 때는 종종 일어나던 일이었다. 그 시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저택 2층에 배속된 사용인들이 슬그머니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속에 부담이 가지 않을 음식으로, 물은 조금 따듯하게 데워서 가져와.”

사용인들은 공작의 명을 기쁜 마음으로 받들었다.

“요한, 너는? 너는 안 먹을 거야?”

물러가던 사용인 중 하나가 리세트의 말을 듣고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주인님께서 드실 것도 챙겨 올까요?”

어제는 물론, 최근 식사량이 현저히 줄어든 공작을 잘 알고 있는 하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예상한 바로 그 답변이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내 것도 가져와.”

❖ ❖ ❖

요한의 품에 등을 기댄 채 리세트는 꾸벅꾸벅 잠에 빠져 있었다.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온 하녀들이 물러난 후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를 깨웠다.

“이제 일어나야지.”

아직도 몸이 조금 차갑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리세트는 식사를 하지 않고 더 자겠다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문득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리던 요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리세트를 집으로, 우리의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면 분명 싸우게 될 텐데.

고민이 깊어지던 무렵에 리세트가 반짝 눈을 떴다.

“지금은…… 배가 조금 고픈 것도 같아.”

시선을 피하는 리세트의 뺨이 붉어졌다.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자 요한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먹을까?”

리세트는 포크를 든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직 손에 제대로 힘을 줄 수 없는지 모든 동작이 어설펐다.

“먹고 싶은 걸 말해.”

요한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포크를 빼앗아 들었다.

“음…… 포도?”

리세트는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부분 과일만 골라 커트러리를 쓸 기회조차 없었다. 다음, 그다음에도 리세트는 과일만 골랐다.

순순히 명을 따르던 요한은 리세트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음식을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리세트는 콧잔등을 씰룩이며 고개를 돌렸다.

“생선은 먹기 싫어.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

“그럼 스프라도 먹어. 과일 말고.”

웅얼웅얼 입술을 오물거리던 리세트는 마지못해 조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그 후로도 요한은 리세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나만 먹이지 말고 너도 먹어.”

리세트가 핀잔을 줄 때마다 요한의 입에도 음식이 들어갔다.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리세트가 배시시 웃음 지었다.

그 미소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요한은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모처럼 포만감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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